I. 서론
II. 이론적 배경: 불편유산과 기억의 정치
III. 제주 4・3 사건과 수용소
1. 4・3 사건과 수용소의 설치
2. 제주읍 수용소의 주민 수용 과정
IV. 제주 4・3의 불편유산: 기억의 선택과 침묵
1. 불편유산과 장소기억의 재현: 제주 주정공장 수용소의 사례
2. 장소기억의 선택적 보존과 불편유산의 침묵: 일도리 공회당의 사례
3. 기억의 단절과 불편유산의 정치: 제주농업학교의 사례
V. 제주 4・3 수용소의 유산화 가능성
VI. 결론
I. 서론
본 연구는 제주 4・3 사건(1947~1954년) 당시 운영되었던 민간인 수용소 유적을 고통스러운 과거와 관련된 불편유산(difficult heritage)1)으로 조명하고 수용소 유적의 유산화(heritagization) 과정, 즉 공동체의 기억자원으로 재맥락화하는 과정에서 기억의 정치가 공간과 장소를 어떻게 재구성하는지 검토하였다. 특히 역사적 사건이 전개된 장소에 대한 기억의 보존이 과거에 발생한 폭력에 대한 반성과 함께 사회적 화해의 기반이 될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하였다.
제주도의 4・3 민간인 수용소는 4・3 사건 당시 예비검속(豫備檢束)2), 무장대 협조 혐의 등의 명목으로 진압 군경에 의해 체포된 주민, 중산간 마을 소개민(疏開民), 도피자 가족 등을 집단 수용하기 위해 조성된 시설을 지칭한다. 4・3 당시 군경 주둔지 인근의 유치장, 민가, 공회당, 학교, 창고 등이 임시 수용시설로 이용되었으며, 제주도 내 132개소에 달하는 군경 주둔지도 부분적으로 민간인 수용시설의 역할을 하였다(제주특별자치도・(사)제주4・3연구소, 2020a, 1271). 제주도가 2003~2004년, 2018~2019년 2차에 걸쳐 실시한 4・3 유적 전수조사에 따르면, 민간인 수용소로 38개소가 식별되었다(제주특별자치도・(사)제주4・3연구소, 2020a, 1271). 민간인 수용소로 이용된 건물들은 대부분 4・3 이후 철거・개축되어 물리적 흔적을 거의 확인하기 어렵지만 2023년 4・3역사관이 건립된 제주시 건입동의 옛 주정공장 수용소 터의 사례와 같이 수용시설의 흔적을 기억의 공간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시도 역시 전개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불편유산의 개념은 폭력, 전쟁, 학살 등이 전개되어 트라우마를 발생시키는 장소가 어떻게 유산화되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는데, 특정 장소가 지닌 ‘불편함(difficulty)’은 유산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사회적으로 생성된다고 설명한다(허수진, 2022, 117). 또한 고통과 트라우마, 집단기억이 투영된 공간이 유산화 과정을 거쳐 국가 혹은 지역공동체가 책임 있게 기억해야 할 대상으로 재설정될 수 있다고 제시한다(Meskell, 2002; 허수진, 2022, 117에서 재인용). 즉, 부정적 기억과 관련된 장소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불편한’ 것으로 인식되지만 MacDonald(2015)는 공동체의 부정적 역사를 공개적으로 다루는 행위가 오히려 공동체의 윤리성, 정직함, 신뢰성을 발현하여 긍정적 정체성을 형성시킬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장소가 기념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MacDonald, 2015, 19).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본 연구는 제주 4・3 수용소가 과거와 현재를 잇는 기억의 매개체로서, 그리고 사회적 화해의 장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장소기억의 보존 방안을 모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특히 장소의 유산화 과정을 기억 주체들 간의 상호작용과 긴장의 결과로 이해하기 위해 불편유산의 개념을 공간의 재구성과 연계하여 기억의 장소가 갖는 물리적이며 상징적인 층위를 통합적으로 분석하고자 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제주 4・3 사건 당시 구 제주읍 시가지에 해당하는 제주시 일도동, 이도동, 삼도동, 건입동(4・3 사건 당시 제주읍 일도리, 이도리, 삼도리, 건입리) 일대에 위치했던 민간인 수용시설을 주요 분석 대상으로 삼았으며(그림 1),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4・3 사건의 전개 양상은 해안 지역과 중산간 지역 간에 차이를 보였는데, 구 제주읍 시가지는 해안지대이자 행정 중심지로서 무장대와 군경 간의 교전이나 초토화 작전이 전개된 주요 장소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관공서와 진압 군경의 본부가 밀집해 있었으며 도내 각지에서 체포된 주민들이 집결・수용되는 최종 수용소로서의 역할을 담당한 곳이다. 특히 군경에 의해 타 지역에서 연행된 민간인들이 이 지역에서 심문을 받거나 집단학살을 당하였고(제주특별자치도・(사)제주4・3연구소, 2020a, 54, 98), 중산간 마을에서 소개된 주민들 역시 구 제주읍 시가지 내 수용소로 다수 유입되면서 이 지역의 수용시설은 4・3 당시 국가 폭력의 집행 공간이자 기억의 장소로 기능하게 되었다(김상봉, 2019, 33). 이와 같은 공간적 특성과 역사적 맥락을 바탕으로 본 연구는 현 제주시에서 운영되었던 수용시설들의 유적(터)이 오늘날 어떤 사회문화적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유산화의 방향은 어떠해야 하는지 검토하였다.
제주 4・3 민간인 수용소에 관한 연구는 주로 역사학, 사회학 등의 분야에서 이루어졌는데 대부분 수용소의 설치 배경, 운영 과정, 수용자들의 경험, 그리고 국가 폭력과 인권 침해의 양상을 다루고 있다. 임송자(2023a; 2023b)는 제주 4・3 수용소를 중심으로 주민 수용 과정과 수용소에서 주민들의 생활 실태를 조사하였고(임송자, 2023a), 이데올로기가 투영된 공간으로서 수용소의 상징적 의미를 해석하였다(임송자, 2023b). 먼저, 구술 자료와 관련 문헌을 바탕으로 수용자들의 입소 경위, 취조와 고문, 기아, 비위생적 환경, 질병 등 수용 과정에서의 인권 유린 실태를 조사하였다(임송자, 2023a). 이와 함께 수용소의 역할 및 의미와 관련하여 제주 4・3 진압 과정에서 국가 권력이 수용소를 새로운 냉전의 공간으로 창출하였다고 보았다(임송자, 2023b). 제주 4・3 수용소가 냉전의 질서 속에서 국민 만들기를 위한 체계적 공간으로 작동하였으며 국가의 이념 청소를 실현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해석하였다. 이 연구는 냉전기 국가 권력의 작동 방식과 폭력의 구조를 밝혔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한편, 박찬식(2012)은 4・3 당시 군법회의 및 일반재판으로 다수의 제주도민이 형무소나 임시수용소에 구금된 사실을 행형자료와 판결문을 통해 확인하였다. 특히 광주형무소 등으로 이송된 수형인 명부를 분석하여 군경의 민간인 검거・구금이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었으며 4・3의 전개 과정에 체계적인 국가 폭력과 인권 탄압이 수반되었음을 지적하였다.
이와 같이 제주 4・3 민간인 수용소에 관한 연구들은 사건 당시 민간인 수용소가 군경에 의해 임의로 운영되었으며 다수의 도민은 불법 구금, 고문, 열악한 수용 환경에 시달렸다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이 연구들은 국가 폭력의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고 있지만 물리적 실체로서 수용소 유적이 어떻게 사회문화적으로 활용되고 재생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상징성이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연구는 부족한 실정이다. 이에 본 연구는 제주 4・3 사건 당시 수용소가 국가 공권력에 의한 주민 희생의 상징적 공간이었다는 역사적 맥락을 기반으로 이러한 장소들을 사회적 성찰과 교훈의 장으로 전환할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즉, 수용소 터가 집단기억의 장소이자 사회적 대화를 촉진하는 매개체로서 유산화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하고자 하였다.
본 연구는 질적 사례 연구 방법에 기초하여 제주시 구도심 내 민간인 수용소 유적의 유산화 가능성과 그 사회문화적 의미를 검토하였는데, 문헌조사, 유적지 조사, 관련 제도와 기념 활동에 대한 검토를 병행하였다. 특히 2002~2003년, 2018~2019년 2차에 걸쳐 실시된 4・3 유적 전수조사 결과를 기록한 제주 4・3 유적(제주특별자치도・(사)제주4・3연구소, 2020a; 2020b)을 중심으로 민간인 수용소의 위치, 형태, 운영 방식 등을 파악하였고, 제주시에 현존하거나 기념시설로 전환된 사례에 대해서는 현장 조사(2024년 1월 21~24일, 8월 13~16일, 2025년 9월 1~5일)를 통해 연구 지역 내 물리적 흔적의 보존 또는 장소기억의 기념 현황을 확인하였다. 또한 제주4・3평화재단 및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추진한 유산화 정책 문서와 언론보도를 분석함으로써 국가와 지역사회 차원에서 기억의 정치가 유산화 과정에 어떻게 개입하였는지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본 연구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먼저, 이론적 배경으로서 불편유산의 개념과 기억의 정치가 공간・장소에 미치는 영향을 고찰하였다. 다음으로 제주 4・3 수용소가 불편유산으로서 지니는 특성과 그 의미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분석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제주 4・3 유적에 대한 사회정치적 논의를 살펴 이 장소들이 미래에 어떻게 기억되고 유산화될 수 있는지 논하였으며, 최종적으로 제주 4・3 수용소가 과거와 현재를 잇는 기억의 장으로 작동할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II. 이론적 배경: 불편유산과 기억의 정치
불편유산은 “고통과 아픔의 역사적 사건과 연결된 장소가 유산화 과정에서 국가 및 공동체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미치고 기억 투쟁과 정치적 분쟁을 유발하는 유산”을 통칭한다(이현경, 2018, 172). 불편유산은 과거의 사물, 장소, 관습 등을 유산화라는 사회집단의 의도적이며 동적인 과정으로 인식하는 과정과 연관되어 있는데, 유산화의 과정에는 현재의 기준과 필요에 따라 대상을 선정하여 가치가 부여된 유산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이 동반된다(함예림・김의연, 2023, 229). 즉, 유산으로서의 의미 부여가 현재의 기준에 따라 이루어지므로, 불편유산의 개념은 기억의 정치와 필연적으로 연결된다.
기억의 정치는 과거의 사건에 대한 기억과 해석의 방식을 둘러싼 권력관계와 담론적 경합 및 투쟁을 의미한다. 즉, 어떤 사건이 공식적으로 기념되고 어떤 목소리가 배제되는지는 사회 내의 권력 구조, 집단의 정체성 형성 과정, 지배적 이념 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불편유산은 기억의 정치가 첨예하게 드러나는 영역이 될 수 있다. 폭력, 전쟁, 학살, 식민 지배, 인권 침해 등이 전개되어 집단적 트라우마를 발생시키는 장소나 상징물은 특정 집단에게는 성찰과 반성의 계기가 되지만 다른 집단에게는 고통을 유발하고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정희선 등, 2024). 따라서 불편유산은 기억 정치의 산물이며 그 자체가 새로운 사회정치적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물리적 흔적을 보존할 것인가, 장소기억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는 모두 현재를 기준으로 사회의 가치와 권력관계에 의해 재정의된다(백지혜・정희선, 2020). 이와 같이 불편유산과 기억의 정치는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과거를 둘러싼 사회적 담론과 집단 정체성의 형성, 권력의 재편성 과정에 깊이 관여한다.
불편유산은 주로 문화유산학, 역사학, 사회인류학, 사회학 등 여러 학문 분야에서 다루어져 왔으나 최근에는 기억연구, 박물관학, 관광학 등의 연구 주제로 확장되고 있다. 불편유산에 대한 논의는 대체로 왜 현재 상황에서 해당 장소가 불편한지, 그리고 이와 같은 장소의 유산화가 역설적으로 나타내는 사회정치적 의미와 가능성에 대해 탐색하고 있다(표 1). Tunbridge and Ashworth(1996)는 불화유산(dissonant heritage)의 개념을 제시하며 유산이 장소(유적)의 의미에 대한 해석을 통해 만들어지므로 본질적으로 대상에 갈등(dissonance, 불화)이 내재되어 있음을 지적하였다(허수진, 2022, 116-117). 이 관점은 이후 불편유산에 대한 논의의 기틀이 되었는데, Tunbridge and Ashworth(1996)는 유산에 대한 불화가 첫째, 경제적 이익을 위해 상업적으로 유산이 선정되고 전시될 때, 둘째, 한 장소가 서로 다른 집단에 대해 상반된 의미를 지닐 때, 셋째, 동일한 장소나 사건이 해석의 주체에 따라 상이하게 기념되고 기억될 때 발생한다고 보았다(Tunbridge and Ashworth, 1996, 21, 23, 27). 이들은 유산을 둘러싼 다양한 주체들 간의 상반된 기억, 권력관계, 상품화 과정, 의미 해석과 기념의 충돌이 불화유산에 투영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불화유산은 특정 유산을 둘러싼 다양한 집단과 이해관계자 간의 해석과 가치관의 갈등, 그리고 그 결과로서 과거의 유산이 현재 공동체 내에서 의견 불일치와 논쟁,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현상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표 1.
불편유산에 대한 논의
| 용어 | 연구자 | 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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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화유산 (dissonant heritage) | Tunbridge and Ashworth (1996) | 유산을 둘러싼 다양한 집단의 기억과 권력, 상품화, 해석과 기념의 충돌・경합이 불화유산을 야기하며, 이것이 유산의 본질적인 속성이라고 주장. 해당 유산을 둘러싼 해석, 가치, 정체성의 불일치와 갈등, 즉 유산의 사회적 구성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속적이고 구조적인 불협화음에 주목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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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유산 (difficult heritage) | Logan and Reeves (2008) | 고통과 수치, 갈등의 장소를 받아들이고 기념하는 것이 불편한 것은 과거의 사건 자체가 아니라 현재의 사회적 정체성, 정치적 실천, 윤리적 선택 등에 기인하는 것임을 강조. 왜 그러한 불편함이 나타나는지와 관련하여 과거와의 관계 재설정을 통해 유산화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실천과 담론을 입체적으로 접근해야 할 필요성을 제시 |
| MacDonald (2009; 2015) | 불편유산은 집단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사회적 차이점을 드러낼 위험이 있는 유산임. 이와 같은 유산이 기념되는 이유에 대해 역설적으로 집단이 저지른 부정적 역사를 공개적으로 다루는 행위가 집단의 도덕성, 정직성, 신뢰성을 표현하여 긍정적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 | |
| Wollentz (2020) | 유산이 가진 시간성에 주목하여 불편유산을 검토하였으며 유산에 내재된 불화를 유산이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데 참여할 가능성으로 바라봄. 오히려 ‘정화되고 조화로운’ 문화유산이 불화와 갈등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침묵을 적극적으로 생성할 수 있기 때문에 더 우려스러울 수 있다는 시각 제시 |
출처: 이현경(2018), 허수진(2022), Tunbridge and Ashworth(1996), Logan and Reeves(2008), MacDonald(2009; 2015), Wollentz(2020) 등을 참조하여 작성
여기에서 불편유산과 불화유산의 차이를 검토하면, 불편유산은 한 사회가 과거, 특히 폭력과 가해의 역사를 마주할 때 경험하는 도덕적, 정서적 불편함에 중점을 두는 데 비해, 불화유산은 동일한 유산이 서로 다른 집단에 의해 상반된 의미로 해석될 때 나타나는 사회정치적 불협화음에 주목한다. 두 개념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불편유산이 과거에 대한 윤리적 성찰의 내면적 문제에 초점을 두지만 불화유산은 집단 간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외적 갈등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불편유산은 상처와 트라우마를 남긴 과거 유산 자체, 그에 대한 해석과 집단기억, 그리고 정체성 형성에 미치는 영향에 초점을 두지만 불화유산는 유산을 둘러싼 해석, 가치, 정체성의 불일치와 갈등, 즉 유산의 사회적 구성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속적이고 구조적인 불협화음에 주목한다.
Logan and Reeves(2008)는 불편유산을 전쟁, 내전, 인권 침해, 억압, 폭력 등 고통스럽거나 수치스러운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장소, 그리고 그와 연관된 물질적 대상으로 규정하였다. Logan and Reeves(2008)는 고통과 수치, 갈등의 장소를 받아들이고 기념하는 것이 불편한 것은 과거의 사건 자체에만 국한되지 않고 현재의 사회적 정체성, 정치적 실천, 윤리적 선택 등에 기인하는 것임을 강조하였으며, 왜 그러한 불편함이 나타나는지와 관련하여 과거와의 관계 재설정을 통해 유산화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실천과 담론을 입체적으로 접근해야 할 필요성을 제시하였다(이현경, 2018, 172).
한편, MacDonald(2009)는 특정 집단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사회적 차이점을 드러낼 위험이 있는 유산을 불편유산으로 지칭하였다(MacDonald, 2009, 4). 이러한 유산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불편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경우에 따라 부정적인 유산에 대한 기념 역시 이루어지고 있음을 역설하였다. MacDonald(2015)는 불편유산이 기념되는 이유로 공동체의 부정적 역사를 공개적으로 다루는 행위가 공동체의 윤리적 태도와 신뢰성을 표현하여 긍정적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MacDonald, 2015, 19).
Wollentz(2020)는 유산이 가진 시간성에 주목하여 불편유산의 의미를 검토하였으며, 유산에 내재된 불화를 유산이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데 관여할 가능성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유산이 시간적 경계를 허물어 과거의 타자성을 해체함으로써 공감을 통한 성찰을 유발할 가능성을 제시하였다(Wollentz, 2020, 278). 그러나 동시에 “정화되고(purified) 조화로운(harmonious)” 문화유산이 갈등을 조정하고 잠재우는 과정에서 오히려 침묵을 능동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을 주장하며 이러한 측면이 더 큰 사회적 문제와 우려를 낳을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Wollentz, 2020, 291).
이와 같은 논의들은 불편유산이 갈등과 대립이 컸던 역사적 사건을 표상하고 나아가 현재의 사회정치적 배경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재맥락화되고 재해석되는 기억의 공간임을 시사한다. 즉, 불편유산은 기억의 정치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어떤 기억이 드러나고 배제되는지를 둘러싼 권력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경합이 이루어지고 재구성된다. 이는 유산을 둘러싼 주체들 간의 긴장과 협상, 권력의 작동을 이해하는 데 불편유산의 개념이 유효한 분석의 틀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불편유산은 사회적 갈등을 가시화하거나 특정 집단의 기억을 정당화시키는 수단으로 작동하기도 하며 묵인되거나 은폐된 기억을 되살리려는 저항의 현장이 되기도 한다. 요컨대, 불편유산은 서로 다른 기억의 주체들이 과거를 해석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다중적 실천의 장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유산화 과정 또한 단선적이지 않고 여러 주체들의 사회정치적 실천과 논쟁을 수반하는 동적인 과정으로 접근이 이루어져야 함을 알 수 있다. 즉, 불편유산은 사회적 정의, 화해, 정체성의 정치 등과 결부되어 끊임없이 경합이 이루어지고 재해석되는 사회적 구성물로 이해할 수 있다.
III. 제주 4・3 사건과 수용소
1. 4・3 사건과 수용소의 설치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서는 4・3 사건을 1947년 3・1절 발포 사건에서 1954년 9월 한라산 출입금지령 해제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된 사건으로 정의하고 있다(국가법령정보센터, https://www.law.go.kr). 광복 직후 제주도에서는 인구 증가, 식량난, 미군정의 정책 실패로 사회적 불안이 심화되었고, 3・1절 발포 사건을 계기로 좌・우익 대립이 격화되었다. 1948년 4월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의 봉기 이후 협상이 결렬되고 5・10 제헌의원 선거가 무산되면서 초토화 작전과 계엄령이 실시되었으며, 이는 제주도 전역에 심각한 인적・물적 피해를 초래하였다(4・3 위원회, 2003, 533-536).
1948년 10월 송요찬 9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대 전역을 통행금지 지역으로 포고하고, 이를 위반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고 선포하였다(4・3 위원회, 2003, 535). 초토화 작전은 제주도민을 무장대와 연관될 가능성이 있는 잠재적 협력자로 간주하고 진행되었다. 군경은 주민과 무장대를 차단하기 위해 통행금지가 발령된 중산간 지역 주민들을 해안의 요새화된 ‘전략촌’3)으로 이주시키고 이들에 대한 선별 작업을 실시하였다. 사전에 작성된 명단에 따라 신분이 확인된 주민에게는 양민증을 발급하였고, 그렇지 않은 주민은 주요 감시 대상으로 지정하거나 처형하였다(김은희, 2006, 185-186). 중산간 주민 일부는 해안으로 소개되는 대신 산간 지대로 도피하였으며, 이에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결원이 있는 민간인을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하여 이들 역시 주요 감시 대상에 포함시켰다(4・3 위원회, 2003, 535).
전술한 바와 같이 제주 4・3 수용소는 4・3 기간 동안 진압군에 체포된 주민, 중산간 마을 소개민, 도피자 가족과 같은 민간인들을 수용한 시설을 일컫는데, 민간인 수용소는 군경이 심문을 위해 연행한 주민들을 군부대에 수용하는 등 진압 초기 단계부터 운영되었다. 그러나 1948년 11월 이후 군경에 의한 무장대의 초토화 작전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1949년 이후에는 선무공작(宣撫工作)4)의 강화로 중산간 지역 마을 소개민과 검거자, 입산자가 증가하면서 주민들을 조사・수용하기 위한 수용소 설치가 대규모로 확대되었다(임송자, 2023b, 58). 수용소 입소자들은 1차적으로 경찰지서 혹은 군부대에 설치된 유치장 등에 수용되었으며 일부는 훈방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수용소로 이송되어 2차 취조를 받았고, 무장대와 연관된 혐의가 있을 경우 헌병대의 추가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수용자들은 대부분 입소한 시설에서 일정 기간 수감된 후 석방되었지만 그렇지 못한 인원은 육지 수용소・형무소로 이송되거나 처형되기도 하였다(임송자, 2023a, 271-272, 279). 수용소의 열악한 환경과 고문・구타 등 인권 침해 행위에 의해서도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제주4・3평화재단, 2019, 85).
수용소는 대부분 예비검속자・도피자 가족과 소개민 임시 수용 등 민간인 통제와 처분의 목적으로 활용되었으나 민간인 수용소별 규모나 수용 인원은 공식적으로 집계・기록되지 않았으며 당시의 언론보도와 관련자 증언 등도 불일치하는 경우가 많아 추정하기 어렵다(임송자, 2023b, 50-51). 제주 4・3 유적 전수조사에서는 제주도 전역에 25개소의 민간인 수용소가 운영되었고, 추가진상조사의 교육계 피해 조사에서는 13개소의 학교가 민간인 수용소로 이용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중복 사례를 제외하면 제주도 전역 38곳에서 수용소가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민간인 수용시설이 운영되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고 있다. 현 제주국제공항 터에 있었던 제주비행장은 1950년 8월 제주경찰서와 주정공장에 예비검속으로 수감된 주민들이 총살된 곳으로, 제주 4・3 유적에는 “학살지”로 등재되어 있으나(제주특별자치도・(사)제주4・3연구소, 2020a, 109), 김달삼과의 회담에서 귀순 절차의 일환으로 제주읍 비행장에 귀순자 수용소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고 기술한 김익렬의 회고록, 포로와 귀순자를 비행장에 집결시켜 “폭도와 양민을 엄격히 구별”할 것임을 언급한 1948년 6월 이형근 대령의 담화, 1948년 가을 입산했다 귀순한 후 비행장 군부대를 거쳐 수용소에 수감된 한남택의 증언 등 당시의 기록 및 구술사에서는 제주비행장 역시 민간인 수용시설로 이용되어 귀순자들을 수용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임송자, 2023b, 51-52). 또한 제주비행장 인근 용담리 닥그내・정뜨르 공회당 역시 민간인 수용소로 이용된 것으로 알려져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4・3 위원회, 2003, 457; 임송자, 2023b, 55).
표 2는 4・3 유적 전수조사(2002~2003년)와 교육계 피해 실태 조사가 포함된 4・3 추가진상조사(2018~ 2019년)에서 파악된 민간인 수용소 건물의 분포와 현재 용도를 나타낸다. 4・3 당시 민간인 수용소로 사용된 시설은 총 38개소로, 대부분 제주읍, 조천면, 한림면, 서귀면 등 인구 밀집지나 교통의 거점, 그리고 군경의 통제가 용이한 장소에 설치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공간적 효율성과 통제의 목적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된다. 시설 유형별로는 교육시설이 16개소(42.1%)로 가장 많은데, 학교 교사(校舍)가 주요 수용 공간으로 활용되었으며, 산업시설은 10개소(26.3%)로 주정공장, 단추공장, 통조림공장, 창고 등 일제강점기 산업시설이 전용된 경우가 많았다. 수용소로 이용되었던 창고 중에서는 주정・전분 등을 생산하기 위해 고구마를 저장하는 창고가 5개소로 가장 많았으며, 그 외에는 농・어업 조합이나 관공서 내지는 대한청년단 등과 같은 진압군측 개인 가옥 창고가 이용되기도 하였다. 기타 공공시설과 주거시설은 각각 5개소(13.2%)씩으로, 수용소로 이용된 건물 중 도피자 주택은 가족 중 행방불명된 사람이 있을 경우 남은 가족을 도피자 가족으로 간주하여 자택에 감금하면서 수용소로 이용되었고, 다른 도피자 가족들이 함께 수용되기도 하였다(제주4・3연구소, 2020b, 361~362).
표 2.
제주 4・3 민간인 수용소 건물의 분포와 용도
출처: 제주특별자치도・(사)제주4・3연구소, 2020a; 2020b; 제주4・3평화재단, 2019의 자료.
현존 상태를 살펴보면, 교육시설로 유지된 곳이 12개소로 가장 많아 대부분 4・3 이후 본래 기능을 회복하였으나 9개소는 주거시설로 전환되었다. 특히 4・3 역사관으로 재구성된 주정공장 수용소를 제외하면 수용소 시설이 보존된 경우는 찾아볼 수 없으며, 대부분의 부지는 공원, 상가, 관공서, 공동주택, 개인주택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제주 4・3 수용소 유적은 교육시설로서의 기능 유지, 주거지 개발과 상업화, 물리적 소멸 등의 변화를 겪으며, 기억의 불균형적 전승 구조를 보여준다. 38개소 가운데 1개소만이 기념시설로 보존된 것은 4・3의 기억이 투영된 장소들에 대한 기념화와 통합적 관리의 필요성을 말해 준다.
2. 제주읍 수용소의 주민 수용 과정
4・3 당시 제주도 해안 마을에서는 무장대로부터의 방어를 위한 성담이 축성되고 주민들에게 경비 의무가 부여되었으며 성담 바깥에 고립된 마을들은 소개되어 성담 내부 마을로 주민 이주가 이루어졌다. 제주읍 일대에서는 1949년 1월 중순까지 도남리・연동리(현 도남동과 연동) 등의 중산간 마을이 소개되었고, 1949년 1월부터 동쪽 사라봉에서 서쪽 도두2리에 이르기까지 약 8km에 걸쳐 성담이 축성되었다(김은희, 2005, 29-30)(그림 2). 축성 작업에는 읍내 주민을 포함하여 인근 마을에서 소개된 주민들도 동원되었다. 성담은 무장대의 공격을 막기 위한 군사적 방어시설이자 주민들의 이동을 통제하는 물리적 장치로 기능하였으며 주민들의 일상생활을 철저히 감시・관리하는 체제로도 작동하였다.

그림 2.
4・3 사건 당시 제주읍 성담의 경계와 주요 민간인 수용소 및 학살지
(배경지도: Korea 1:50,000 Map by United States Army Map Service, 1950; 제주읍 성담 경계는 김은희(2005, 29-30) 참조)
1948년 말부터 제주농업학교(현 제주시 삼도1동 305-4번지 일대)와 제주 주정공장(현 제주시 건입동 940-4번지 일대)에는 대규모 수용소가 설치되었는데, 이 시설들에는 제주도 전역에서 검거되거나 귀순한 후 군부대와 경찰지서에서 조사를 거친 주민들이 수용되었다(한라일보, 2008년 12월 23일). 먼저, 제주농업학교에는 1948년 5월 조선경비대 9연대가 주둔한 후 실습장과 운동장에 임시 천막수용소를 설치하여 토벌 과정에서 체포한 주민들을 수용하였으며, 1948년 10월 이후 초토화 작전이 확대되면서 수용된 주민들이 박성내(현 제주시 아라이동 2421-3 일대) 등지로 끌려가 학살되기도 하였다. 1948년 12월 조선경비대 9연대가 2연대로 교체된 이후에도 수용소는 지속적으로 운영되었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수용된 주민들에게 이념적 낙인이 찍혀졌고, 혐의의 유무와 무관하게 체포에서 수감, 희생으로 이어지는 반복적인 폭력의 구조가 형성되었다.
1949년 3월 선무공작이 강화되고 입산자의 귀순이 이어지면서 제주농업학교의 임시수용소는 이들을 수용하고 취조하는 시설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고문과 폭행을 피하고자 거짓으로 자백한 주민들이 육지의 형무소로 이송되기도 하였다. 육지 형무소 이송자 가운데 다수는 6・25 전쟁 발발 이후 형무소 재소자 학살이 이루어지면서 함께 피살되었다(제주특별자치도・(사)제주4・3연구소, 2020a, 80-81). 이에 따라 제주에서의 수용과 육지 형무소로의 이송은 주민들에게 또 다른 생존 위협의 경로가 되었다.
현재 제주시 일도1동 1108-20, 1109번지 일대에 위치했던 일도리 공회당도 그 규모는 작았지만 1949년 초 귀순자가 증가하며 수용시설로 이용되었다. 제주도에 설치된 민간인 수용소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곳은 주정공장 수용소로 1949년 5월 11일 주정공장을 방문한 국제연합 한국위원단의 보고에 따르면 당시 주정공장 창고에는 2,000여 명의 수감자가 수감되어 있었다(4・3 위원회, 2003, 457). 수용 인원은 여성이 남성의 약 3배였으며, 수용소장에 따르면 대부분의 수감자는 산간 지대에 은신해 있다 귀순하였고 약 10% 정도는 군에 의해 체포된 사람들이었다(4・3 위원회, 2003, 457). 제주 주정공장 수용인 가운데 일부는 공장 가까이에 위치한 산지항(현 제주항)으로 끌려가 앞바다에 수장되었다(조성윤, 2022, 38; 헤드라인제주, 2025년 4월 2일).5) 이는 4・3 당시 제주읍이 섬 안의 섬과 같이 고립되어 국가 폭력이 집중적으로 행사되었음을 보여준다.
무고하게 연행된 주민, 귀순자, 자수자 등은 상당수가 충분한 조사나 법적 절차 없이 장기간 수용소에 억류되어 최소한의 개인 공간조차 보장되지 않은 채 집단생활이 강요되었다. 하루 한두 끼의 보리주먹밥・밀밥 등 최소한의 식사만이 제공되었고, 그로 인해 노약자와 아동은 질병과 영양실조에 시달렸다(임송자, 2023a). 수용 기간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취조와 고문, 폭력은 수용자들에게 심각한 신체적・심리적 피해를 초래하였으며, 수용소에서 풀려난 뒤에도 이들은 사회적 낙인과 가족 해체, 생계 파탄 등 2차 피해를 겪어야 했다(임송자, 2023a). 결과적으로 수용소 체험은 개별 주민들의 삶을 파괴하였으며 공동체의 신뢰와 사회적 기반을 붕괴시키는 구조적 폭력으로 작동하였다.
IV. 제주 4・3의 불편유산: 기억의 선택과 침묵
제주 4・3과 관련 장소들은 참혹한 과거의 기억이 어떻게 재현, 또는 묵인되는지를 보여준다. 주정공장 수용소, 일도리 공회당, 제주농업학교 터는 각각 기억의 보존과 실천, 그리고 사회정치적 맥락 속에서 단절되거나 선택적으로 재현되는 불편6)한 역사 유적의 성격을 드러내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불편유산(터)에서의 기념의 방식과 사회적 실천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이 장소들을 중심으로 과거에 대한 장소기억이 어떤 방식으로 보존되고 재현되는지, 혹은 침묵과 단절 속에 잊혀져 가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하였다.
1. 불편유산과 장소기억의 재현: 제주 주정공장 수용소의 사례
1934년 설립된 동양척식주식회사 제주 주정공장은 제주도산 고구마를 원료로 주정(알코올)을 생산하는 산업시설이었다. 일본 제국은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으로 연료 수급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조선에서 무수주정(물을 섞지 않은 에탄올)의 생산 확대 방침에 따라 제주읍에 공장 건립을 추진하였다(제주투데이, 2023년 4월 12일). 일제강점기 제주 주정공장은 공장 부지 약 1만 4,000평에 창고, 전용 부두까지 갖춘 제주의 대표적 산업 시설이었다(제민일보, 2025년 1월 14일).
산지항(현 제주항)과 맞닿아 있던 주정공장 부지는 단차가 커서 구릉지 상부와 하부로 나뉘었는데, 해안과 인접한 구릉지 아래쪽에는 공장 건물과 사무실, 완제품 창고 등이 들어서고 주정공장 전용 부두 또한 조성되었다. 구릉지 위쪽에는 주정의 원료가 되는 절간(切干)고구마7)를 저장하기 위해 각각 폭 21.6m, 세로 64m로 440평 넓이의 창고 4동이 건립되었다(조성윤, 2022, 36-38). 또한 창고에서 공장 건물로 고구마를 운송하기 위한 벨트와 고구마 야적장 역시 마련되었다(조성윤, 2022, 36-38).
일제가 건설한 주정공장 건물은 1945년 6월 미군의 폭격으로 손상을 입었다. 광복 이후 주정공장은 미군정 하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가 해산되고 신한공사가 설치되어 적산(敵産)으로 관리되었고, 1949년 봄 이후 귀순자들이 증가하자 군경은 절간고구마 창고를 민간인 수용소로 전환하여 귀순자와 예비검속자를 수용・분류하였다. 6・25 전쟁 발발 이후 주정공장에는 1950년 7월 육군 제5훈련소가 설치되어 수용소와 함께 운영되었고, 공장 시설은 1951년 민간에 불하되어 1953년부터 재가동되었다(제민일보, 2025년 1월 14일).
제주 주정공장은 1970년대 이후 전분의 수요가 감소하고 전분 찌꺼기를 포함한 폐수와 매연 배출 등 환경오염 문제가 발생하여 조업이 어려워지자 가동이 중단되었고, 이후 공장 건물은 1993년 지역 건설사가 매입하여 수용시설이 위치했던 구릉지 위에 아파트 단지가, 공장 터에는 창고가 신축되었다(제주투데이, 2023년 4월 12일)(그림 3, 4)8). 당시 공장 사원들이 거주했던 사택은 공장에서 남쪽으로 떨어진, 현재 건입동 1106번지 일대에 위치하였으며, 2010년대 초까지 잔존하였으나 이후 철거되었다(제주특별자치도・(사)제주4・3연구소, 2020a, 100).
창고시설 앞 공터는 2000년 이후 4・3 유족들이 매년 행방불명인 진혼제를 열면서 기억의 공간이 되었다(한겨레신문, 2010년 9월 8일). 진혼제를 올리면서 유족들은 국가가 주정공장 터를 매입하여 4・3 역사공원을 조성할 것을 요구하였다. 2010년 제주도는 해당 부지에 추모탑을 세우고 공원을 조성하기로 하였고(한겨레신문, 2010년 9월 8일), 2023년 3월 13일, 옛 주정공장 수용소 터에 ‘주정공장수용소 4・3역사관’이 개관하였다. 그림 5와 같이 주정공장 수용소 터에는 아파트와 4・3 역사관이 들어서 있다.
현재 주정공장수용소 4・3역사관은 지하 1층의 상설전시실과 1층의 추모의 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설전시실에서는 주정공장 수용소가 세워진 배경, 제주 4・3 당시 민간인 수용소의 운영, 불법 재판과 수형인의 삶, 수형인 명부 등 역사적 사건에 관한 기록물과 증언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실 도입부에서는 제주 주정공장의 설립을 일제 식민지 수탈의 교두보였던 산지항(제주항)의 설립과 연결하여 설명하고, 현재 제주항 여객터미널이 위치한 부지가 당시 주정공장 전용 부두였음을 명시하고 있다. 또한 주정공장에서 생산된 95% 농도의 알코올이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원된 항공기 원료로 공급되었음을 전시물에 기술하여 일제가 공장을 건설한 이유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한림・서귀포 등 제주도 내 다른 시가지에 건립된 유사한 공장 시설들의 사진 역시 전시하고 있다.
한편, 주정공장 내부 수용시설 전시물에서는 대규모 입・하산자를 발생시킨 초토화 작전과 선무공작 등 수용자들의 수용 경위와 열악한 수감생활에 대해 조명하고 있으며, 제주 4・3 사건 당시 주정공장의 모형 전시를 통해 공장과 수용시설로 이용되었던 구릉지 상부의 창고 위치와 공간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그림 6). 민간인 수용을 다룬 전시물에서는 6・25 전쟁기 예비검속과 제주항에서 벌어진 예비검속자 수장 학살, 4・3 사건 연루자에 대한 불법 군사재판 및 육지 형무소 이송 등 수용자들의 희생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수형인 명부와 수용자들의 편지, 오디오 형태로 제공되는 증언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수용자들이 겪은 상황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4・3역사관의 마지막 전시패널에서는 4・3 이후로도 계속된 침묵의 강요와 유족에게 씌워진 연좌제의 굴레,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제주도민들의 노력을 소개하며, 사건의 상흔을 극복하는 데 있어 지역사회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주정공장 터를 기억의 공간으로 변모시킨 행방불명인 진혼제와 수형인 명예 회복이 주요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또한 과거의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역사관 외부 공간에는 결박되어 끌려가는 주민들을 묘사한 추모 조형물과 분수대 등 조경시설이 설치되어 있으며 주정공장 유적에서 유일하게 잔존한 4・3 동굴유적지가 역사관 외부에 보존되어 있다. 해당 동굴은 길이 약 20m의 인공 동굴로, 당시 거동이 불편한 주민 10~20여명이 학살된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제주의소리, 2005년 4월 1일)(그림 7). 한편 4・3역사관이 건립되기 이전에 설치되었던 표석은 역사관 입구로 옮겨졌는데, 주정공장 터가 4・3에 대한 기억의 공간으로 유산화된 역사를 보여주는 기념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주정공장 터에 4・3역사관이 건립된 후 역사관 전시물의 구성이나 역할에 대해 여러 관점에서 평가가 이루어졌고 새로운 전시공간 마련의 필요성 등이 제시되었는데, 4・3역사관 건립이 유산화의 완결이 아니라 여전히 계속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제주의소리, 2023년 3월 13일; 제주일보, 2025년 3월 31일; 노컷뉴스, 2025년 5월 13일; 뉴시스, 2025년 7월 28일). 역사적 사건이 전개된 터를 유산화하는 과정 속에서 어떤 기억을 드러낼 것인지, 누구의 목소리를 기반으로 할 것인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그 기억을 재현할 것인지가 지속적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먼저, 주정공장 수용소는 4・3 당시 민간인 최대 집단 수용소로 참혹한 역사의 장소였기 때문에 그 장소성을 온전히 드러내고 전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재현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개관한 4・3역사관이 사건의 참상과 해당 장소만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제주투데이, 2023년 4월 12일; 노컷뉴스, 2025년 5월 13일). 전술한 바와 같이 역사관의 전시가 주로 기록자료, 패널, 영상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실제 수용자가 겪은 비극적 일상이나 개별 희생자들의 구체적 경험, 고통의 정황이 현장감 있게 재현되지 않아 관람객이 당시의 참상에 공감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었다. 이는 국가・지자체 주도의 기억과 시민사회・유족의 기억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폭력의 현장을 담론화하고 사회적 기억 을 재현하는 방식 속에 불편유산으로서의 의미가 드러날 뿐만 아니라 주정공장 터가 지역사회 내에서 과거의 장소기억을 표상하는 기능을 하며 현재와 미래의 사회문화적 활용을 둘러싼 기억의 정치가 전개되고 있음을 제시한다.
이렇게 주정공장 터에 역사관이 건립된 이후에도 역사적 사건이 전개된 물리적 실체로서 장소성을 어떻게 재현하여 유족과 지역사회의 목소리를 반영할 것인지, 그리고 깊이 있는 내러티브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 주정공장 역사관은 4・3 사건의 기억을 포함하여 불편유산을 사회적으로 수용하고 계승하는 방식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상징적 장으로 해석될 수 있다.
2. 장소기억의 선택적 보존과 불편유산의 침묵: 일도리 공회당의 사례
일도리 공회당9)(현 제주시 일도1동 1108-20, 1109번지)은 제주읍의 중심지로 관공서와 공공기관들이 들어서 있었던 일도리의 마을회관이었다. 일도리 공회당이 위치한 곳은 조선시대 제주목 동성(東城)에 위치한 운주당(運籌堂) 터였다. 조선시대 군사시설 운주당이 위치한 구릉은 제주성이 내려다보이는 고지대로 전략적으로 중요성을 띠며, 1555년 을묘왜변 당시 마지막 왜장이 쓰러진 제주성 전투의 승전처로 추정되는 곳이다(정현창・김병인, 2022, 180). 운주당은 1568년(선조 1년) 제주목사(濟州牧使) 곽흘(郭屹)이 제주성 동남쪽의 높은 언덕에 군사적 지휘와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한 목적으로 장대(將臺)를 축조하였다고 알려져 있다(정현창・김병인, 2022, 164). 운주당은 설립 이후 재건립과 여러 차례에 걸친 수리가 반복되었는데, 1683년(숙종 9년) 신경윤 목사가 중창, 1694년(숙종 20년) 이익태 목사가 중수, 1743년(영조 19년) 안경운 목사가 중수, 1753년(영조 29년) 김몽규 목사가 중수하였고, 1892년(고종 29년)에는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찰리사(察理使) 겸 제주목사였던 이규원이 재건한 것으로 전해진다(제주일보, 2019년 10월 29일; 2016년 12월 27일). 이후 운주당이 어떻게 소실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4・3 사건 이전에는 항일운동에 참여하였고 1950년 예비검속으로 희생된 승려 이일선(1895~1950년)의 포교당(백양사 산하)이 있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곳이 어떻게 공회당으로 이용되었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1934년부터 항일운동가이며 의사였던 김태민(1888~1965년)의 가옥이 운주당터 인근에 위치했었다고 알려져 있다. 한편 제주 4・3 유적은 일도리 공회당이 1949년 3월 이후 제주읍의 주정공장과 함께 귀순자들을 수용하는 시설로 이용되었으며, 1951년부터 김태민・고수선 부부가 운주당터 부근 자택에 거주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제주특별자치도・(사)제주4・3연구소, 2020a, 54-55; 문소연 등, 2021, 33).
전술한 바와 같이 군경 진압군은 1948년 11월 중순부터 한라산 중산간 지역 마을들을 전소시키는 초토화 작전을 실시하였고, 이후 주민들은 해안마을로 이주하였으나 일부 주민들은 집을 잃고 야산에서 피신 생활을 하였다. 1949년 봄, 진압군의 귀순 정책에 따라 귀순한 민간인들은 수용소로 보내졌는데, 대표적인 시설이 앞서 언급한 주정공장 창고였으며 이곳에서 귀순자들에 대한 심문과 재판이 이루어졌다. 일도리 공회당은 주정공장과 함께 귀순한 주민들이 수용된 시설로서 이곳에 수용된 주민들 가운데 아동과 노약자는 몇 개월 후 석방되었지만 다수의 청년들은 심문 후 육지 형무소로 이송되었다(임송자, 2023b, 54-55).
2015년과 2017년 발굴 조사 결과, 김태민 부부 고택의 기단석 자재가 제주목 관아의 것과 유사하여 운주당의 것을 재사용한 것으로 추정되었다(제주고고학연구소, 2015, 22-23; 제주의소리, 2019년 9월 30일). 또한 조선시대 관청・읍성에서 발굴된 명문기와 역시 확인되어 조선시대 군사지휘소로서 2019년에 향토유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제주고고학연구소, 2015, 22- 23; 제주의소리, 2019년 9월 30일). 2022년 5월에는 운주당의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고 제주성 유적을 알리기 위해 ‘운주당 지구 역사공원’이 조성되었다. 이 역사공원은 제주도 원도심 내 역사유적들을 연결하는 ‘성안올레 1코스’에 포함되어 공원 내부에는 역사공원 조성 과정과 유구・유물에 대한 개요, 조선시대 방어시설로서의 운주당의 중요성을 알리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포교당과 4・3 시기 공회당 수용소에 관한 설명은 부재한 상태이다(그림 8, 9).
2022년 10월 1일 개장한 성안올레 1코스는 운주당 지구 역사공원을 경유하며 제주시 원도심의 역사적 흔적을 집중적으로 연결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이에 따라 운주당은 도보 여행에서 핵심적인 유적으로 기능하고 있다. 성안올레 1코스의 주요 테마는 옛 제주성(제주읍성) 안의 원도심을 따라 제주의 생활사와 역사를 체험하는 시간 여행으로, 성벽과 옛 골목, 인물(김만덕), 민간신앙(동자복, 영등굿 벽화), 생활문화(객주), 해녀와 어촌 문화(건입동 박물관, 건입동 벽화길), 근대사의 흔적(모충사, 산지등대) 등 서로 다른 시대의 제주도민의 삶을 보여주는 상징물과 장소들을 포함하고 있다(경향신문, 2025년 4월 19일).
운주당 터에서 일제강점기 항일운동가가 운영한 불교 포교당 시기와 제주 4・3의 수용소 시기가 부각되지 않는 이유로는 2019년 운주당 지구 발굴과 문헌조사 결과를 기반으로 향토유형유산으로 지정된 사실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터의 발굴과 관련 문헌조사는 주로 관아와 군사유적(운주당), 그리고 고수선 고택의 흔적에 초점이 맞춰졌는데, 불교 포교당의 시설・운영 기록은 단편적이고 일도리 공회당이 4・3 민간인 수용소로 이용된 것에 대해서는 관련 기록은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발굴 보고서와 학술 문서 등에서 을묘왜변 당시의 승전처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부각되고, 이 정보가 전시・안내로 환류되면서 불교 포교당과 그 인물사・운동사는 주변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조선시대 관아, 성곽 유적은 물리적 흔적이 뚜렷하여 발굴, 복원, 전시가 가능했지만 포교당이나 4・3 시기의 수용소는 목조 건물과 천막 등 임시 구조물이 많아 흔적이 남지 않았는데, 이는 가시적 잔존성이 약할수록 유산 지정에서 배제되기 쉬운 구조적 한계가 작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그림 10).
그러나 한 장소가 다층적 기억과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기억만 계승・강조될 경우, 결과적으로 기억의 단절과 역사성의 축소를 초래할 수 있다. 운주당 터의 현장 구성은 지역의 과거사 논쟁, 원도심 도보 투어코스 운영을 통한 도시마케팅, 그리고 현대의 공공 공간의 활용 방식이 교차하는 가운데 선택적 장소기억의 정치와 공동체 정체성 관리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사례로 해석할 수 있다.
3. 기억의 단절과 불편유산의 정치: 제주농업학교의 사례
제주농업학교는 제주도 근대교육의 상징이자 지역사회 발전을 이끈 기관으로, 1907년 당시 제주군수 윤원구가 성금을 모아 사립 의신학교라는 교명으로 설립한 교육시설이었다. 이 교육시설은 현 제주시 이도동의 오현단(五賢壇) 부지에 세워졌으며, 1909년 공립제주농림학교로 인가를 받고, 1911년 제주공립농업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으며, 1940년 오현단 부지에서 광양 부지(현 제주시 삼도2동 238번지 일대)로 옮겨갔다(제주의소리, 2020년 8월 13일).
제주농업학교는 4・3 이전부터 제주도 내에서 정치적 상징성이 큰 장소였다. 일제강점기 다수의 제주농업학교 학생들은 항일운동에 헌신하였고 광복 이후로도 1947년 3・1절 만세 시위를 비롯하여 미군정의 실정에 항의하는 사회 참여를 이어갔다. 또한 제주농업학교 교정은 1945년 9월 23일의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 결성식, 9월 28일의 제주도 주둔 일본군 항복조인식과 같은 주요 역사적 사건이 전개되기도 하였다(노컷뉴스, 2021년 3월 30일; 제주특별자치도・(사)제주4・3연구소, 2020a, 79). 한편, 1945년 11월 주둔한 미군 제59군 군정중대를 시작으로 제주농업학교는 계속해서 군 주둔지로 이용되었는데, 4・3 시기에는 사건 초기 진압군의 주력이었던 9연대, 1948년 5월 9연대를 흡수하여 개편된 11연대, 1948년 7월 재설치되어 11연대와 진압 임무를 교대한 9연대, 1948년 12월 이후 재차 진압 임무를 교대한 2연대 본부가 주둔하면서 진압군의 지휘소 역할을 담당하였다(제주특별자치도・(사)제주4・3연구소, 2020a, 79). 제주농업학교의 진압군 지휘소는 1948년 6월 18일 강경 토벌작전을 주도한 박진경 11연대장이 부하들에게 피살된 장소이기도 하다(제주특별자치도・(사)제주4・3연구소, 2020a, 79; 한라일보, 2008년 12월 23일).
1948년 5월, 9연대가 학교에 주둔한 이후 운동장은 체포된 주민들을 감금하고 취조하는 임시 수용소로 활용되었다. 당시 농업학교 북쪽 운동장은 연병장으로, 남쪽 운동장은 포로수용소로 이용되었다(제주4・3평화재단, 2019, 619)(그림 11, 12). 초토화 작전이 진행되던 시기에는 수용자 가운데 처형되는 인원이 증가하였으며, 이러한 양상은 진압부대가 교체된 이후로도 지속되었다. 특히 9연대와 12연대가 교체되던 1948년 12월 말은 제주농업학교에서 학살 사건이 집중적으로 발생한 기간이었다(임송자, 2023a, 279). 제주농업학교 수용소는 1949년 3월 이후부터 대규모로 귀순하는 주민들을 수용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임시 수용소에는 교육계와 법조계의 주요 단체장, 공무원 등이 구금되었으며(한라일보, 2008년 12월 23일), 수용소에 있던 이들은 취조・고문을 당하거나 처형되고, 일부는 육지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제주농업학교의 경우 교사(校舍)와 떨어진 곳에 위치한 운동장・실습장에 천막이 설치되고 주민들이 수용되었기 때문에 물리적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제주의소리, 2020년 3월 5일). 1976년 캠퍼스가 노형동으로 이전(현 제주고등학교)한 이후 학교 부지에는 제주도 학생과학관이 들어섰고(한라일보, 2008년 12월 23일), 이후 제주도 교육청 산하의 제주도과학교육원(1990)과 제주융합과학연구원(2023) 등으로 개편되었다. 또한 학교 동남쪽 부지에는 1983년 삼성초등학교가 개교하였으며, 옛 교사와 운동장을 비롯하여 학교 부지의 상당 부분은 일반 주택가로 개발되었다.10) 현 제주융합과학연구원 입구에는 1978년 설립된 학교 이전 기념비와 2023년에 설치된 ‘제주고의 옛터’ 및 ‘제주도와 항일투쟁’ 표석이 설치되어 있다. 표석의 내용은 1926년의 동맹휴학 사건과 1931년 제주농업학교 학생들이 참여했던 항일투쟁 내력, 학교의 설립・이전 등 학교 자체의 역사와 관련된 것으로 4・3에 대한 언급은 ‘제주고의 옛터’ 표석에서 “광복 공간의 혼란”으로 모호하게 표현한 정도에 그친다. 즉, 1947년 제주농업학교 학생들의 3・1절 시위 참여, 진압군의 지휘소 설치, 민간인 수용소 운영 등에 관한 내용은 부재하여 장소기억의 단절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1952년 제주도 군경원호회에 의해 관덕정 경찰국 청사에 세워졌다 이후 노형동 충혼묘지로 이설되었고 다시 어승생한울누리공원 인근(산록북로 변)으로 옮겨진 박진경 대령 추도비(제주의소리, 2021년 11월 15일; 제주의소리, 2023년 3월 9일)도 제주농업학교와 연관된 불편유산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박진경 대령 추도비는 제주농업학교 터의 지휘소에서 암살된 박진경 대령을 애도하기 위해 세워졌지만(제주특별자치도・(사)제주4・3연구소, 2020a, 395) 박진경 대령이 4・3 당시 대규모 민간인 피해를 초래한 강경진압을 주도하였기 때문에 추도비는 4・3 유족회 및 제주도의회에 의해 이전・철거 요구의 대상이 되었다(KBS, 2021년 4월 2일). 제주도는 2021년 국립제주호국원 조성사업 과정에서 추도비를 충혼묘지 외부 도로변으로 이설하였으나 이후로도 4・3 관련 단체들은 박진경 추도비 주변에 “역사의 감옥”이라는 구조물을 설치함으로써 항의의 뜻을 나타냈다(제주의소리, 2023년 7월 5일). 또한 제주도의회를 대상으로 추도비와 관련하여 “올바른 4・3 안내판” 설치를 요청하는 청원을 제출하며 문제 해결을 촉구한 바 있다(제주의소리, 2023년 7월 5일).11)
제주농업학교와 박진경 대령 추도비의 사례는 4・3 사건과 관련된 장소기억의 단절, 불편유산의 생성, 그리고 기억투쟁의 현재성을 드러낸다. 제주농업학교는 본관과 분리된 운동장과 실습장 부지에 민간인 수용소가 설치되었으나 사건 이후 물리적 흔적은 잔존하지 않았고 학교의 이전과 함께 해당 부지는 과학교육기관, 초등학교, 주택지, 공공기관 등으로 재개발되면서 4・3의 기억은 공간적으로 단절되었다. 현재의 표석 또한 주로 항일운동과 학교 자체의 역사에 집중하고 있고 4・3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언급함으로써 기억의 부재를 보여준다. 이와 대조적으로 4・3 당시 강경 진압으로 대규모 민간인 희생을 초래한 박진경 대령의 추도비는 제주농업학교에 설치된 진압군 지휘소에서 암살된 지휘관을 애도하기 위해 건립되었으나 피해자와 유족에게는 억압과 폭력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또한 추도비를 둘러싼 이전과 철거 요구, “역사의 감옥” 설치, 그리고 “올바른 4・3 안내판” 설치 청원과 같은 실천은 특정 기억을 공적 공간에서 어떻게 기념하고 전승할 것인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와 사회적 협상 과정을 보여준다(제주의소리, 2022년 3월 11일; 제주일보, 2023년 3월 12일). 이 사례들은 4・3 사건이 살아있는 기억으로서 사회적 갈등과 협상을 매개하고 있음을 나타내며 불편유산 연구에서 강조하는 기억의 지속성과 정치성을 보여주고 있다.
V. 제주 4・3 수용소의 유산화 가능성
현재 제주시 수용소 유적 가운데 다수는 공식 기록이나 현장 표식 없이 파편화된 채로 방치되어 당시의 역사를 기억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이 터들은 폭력과 억압, 고통이 투영된 기억의 장소이자 한반도에서의 이념 대립과 분단, 냉전 시대가 지역공동체에 유발한 상흔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일제강점기의 강제 동원, 6・25 전쟁기의 학살 등과 마찬가지로 4・3 수용소 터는 공동체가 직면하기 어려운 아픈 기억을 담은 불편유산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기억하기 어려울지라도 잊어서는 안 되는 곳들로, 해당 터에 내재된 갈등 요소가 오히려 사회적 화합을 이끌어 낼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장소들이다.
제주 주정공장, 일도리 공회당, 제주농업학교 터에는 공통적으로 4・3의 기억이 투영되어 있지만 현재는 서로 다른 시대의 역사를 선택적으로 재현하며 각각 고유한 유산화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주정공장 터는 4・3 유족들이 행방불명인 진혼제를 정기적으로 열면서 4・3에 대한 기억의 장소가 되었고, 주정공장수용소 4・3역사관의 개관은 이곳을 공식적 기억의 공간으로 재편하였다. 역사관은 4・3 진상규명운동의 성과이기도 한데, 4・3 유적을 냉전 시대의 국가 폭력을 극복하고 화해와 상생의 상징이 되도록 긍정적 정체성의 유산으로 재해석하는 기억의 정치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주정공장수용소 4・3역사관의 전시물은 수용시설에 대해 소개하면서도 개별 수용인의 증언에 초점을 맞추어 역사적 사건을 관람객에게 실체화된 대상으로 여기게 하는데, 이와 같은 방식으로 시간적 경계를 허물어 과거의 타자성을 해체하는 것은 공감을 통한 성찰을 촉발할 수 있다(Wollentz, 2020, 278). 그러나 전시물과 콘텐츠가 주정공장 터만의 구체적인 사연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해 방문자가 사건의 참상을 충분히 체감하기 어렵다는 점, 주요 전시물이 다른 기념관과 중복되거나 복사물과 요약 위주로 구성되었다는 점, 전시 방식이 정형화되어 있다는 점 등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이는 제주4・3평화공원, 행방불명인 표석 등 기존 기념관의 전시방식이나 자료 재활용의 경향과 맞물려 주정공장만의 장소성과 사연이 희석되는 문제가 있다는 점에서 나온 비판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일도리 공회당과 제주농업학교 터는 지방자치단체와 교육행정기관 주도로 역사공원이 조성되고 표석이 설치되는 등 기억의 공간화가 이루어졌으나 4・3에 대한 기억 대신 다른 시대의 기억이 선택되었다. 이와 같은 차이가 나타나는 배경에는 장소의 위치에서 드러나는 맥락이 자리하고 있다. 주정공장 터의 경우 제주항 인근에 위치한 유휴지로, 공장 폐쇄 이후 재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장소의 역사적 흔적은 드러나지 않게 되었으나 4・3 유족들이 행방불명인 진혼제를 매년 봉행하면서 기억과 추모의 장소로서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었다. 즉, 유산화의 맥락에서 희생자 가족들의 4・3에 대한 장소기억이 주정공장을 기억의 공간으로 전환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일도리 공회당은 1555년 을묘왜변 당시 제주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한 역사적 사건의 공간적 배경으로서, 조선시대 군사시설 유구가 발굴된 향토유형유산이자 제주성의 역사에 초점이 맞춰진 성안올레 코스의 일부로서 4・3 이전 시기의 장소기억을 중심으로 기념화가 이루어졌다. 제주농업학교 역시 학교가 이전한 이후로도 교육청 시설로 계속 사용되었으며, 4・3 당시 군 주둔지이자 민간인 수용소로서의 장소기억보다는 제주도 교육의 역사적 중심지라는 장소성을 토대로 유산화가 이루어졌다(표 3). 즉, 중층적 역사를 가진 장소에서 특정 시대의 기억이 선택적으로 복원되는 것은 해당 장소에 대한 현재 사회의 가치관과 정체성, 집단기억과 정치적 목적 등이 복원 방향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표 3.
사례 연구 지역의 유산화 양상
한편, 물리적 흔적이 잔존하지 않을 경우 장소 기억이 쉽게 소멸된다는 것 역시 확인된다. 제주 4・3 당시 군경은 기존 공공시설이나 개인주택 등을 징발하여 수용소로 이용하였고, 이렇게 형성된 수용소들은 쉽게 탈맥락화되거나 해체되었다. 수용소의 대부분은 마을 공공시설, 학교, 창고, 주택, 공장 등을 강제 전용한 일시성(temporality)의 공간이었으며, 사건 이후 원래의 용도로 복귀되었다 하더라도 곧 철거되는 등 물리적 실체로서 구조물이 장기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일시성과 소멸의 특성은 ‘잃어버린 마을,’ ‘4・3성’을 비롯하여 다른 4・3 유적에서도 나타난다(김민하・정희선, 2023).
일시성의 공간이 흔적을 남기지 않아 장소기억이 단절되는 상황은 장소기억의 보존 방식이 가지는 한계와 새로운 해석의 틀이 필요함을 나타낸다. 4・3 유적의 역사성과 의미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파편화된 단일 건축물이나 단일 장소(터와 흔적)를 단위로 보존 여부를 결정하기 보다는 확장된 공간 스케일에서 경관 요소들의 결합 관계로 구성된 총체로서의 문화경관(전종한, 2019, 72)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유네스코는 유기적으로 진화해 온 경관(organically evolved landscapes)을 문화경관의 한 유형으로 포함시키고 있는데, 문화경관은 다시 과거의 진화 과정이 물리적으로 남아있는 ‘잔존경관(흔적)’과, 사회적 역할을 유지하며 진화가 지속되는 ‘지속경관(a continuing landscape)’으로 구분된다(박리디아・강동진, 2024, 48). 지속경관은 새로운 제도나 기술의 도입에도 불구하고 지역 주민들의 생업과 정체성을 매개하며 사회공간적 맥락 속에서 살아있는 문화적 자산으로 평가된다(오혜인・김숙진, 2020). 즉, 지속경관이 역사성과 현재성을 동시에 담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동적 문화유산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문화경관으로서의 접근은 4・3 수용소와 같은 특정 유적을 물리적 흔적에 한정 짓지 않고 그 속에 축적된 집단의 기억, 사회적 맥락, 지역사회의 변화와 연결하여 이해할 필요성을 시사한다.12)
앞서 검토한 바와 같이 제주 4・3 사건 당시 민간인 수용소로 활용된 제주 주정공장과 일도리 공회당 터, 그리고 제주농업학교 옛터는 분절적으로 분포하여 사건의 연속적 맥락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할 때, 세 장소를 마을의 전소와 주민 체포, 수용소 이송과 심문, 그리고 학살터, 전략촌, 육지 수용소로의 선별적 이동 등 일련의 사건 전개 과정을 보여주는 핵심 거점으로서 통합된 문화경관 안에서 제주 4・3의 장소기억을 복원할 필요가 있다. 즉, 세 유적을 수난의 연결고리라는 서사적 틀로 재구성하여 마을에서 수용소로, 수용소에서 생사의 갈래로 이어지는 시공간적 연속성을 구현하는 통합 문화경관 조성 방안이 필요하다. 이는 불편유산이 내재한 성찰의 공간을 창출함으로써 개인과 공동체가 겪은 수난의 전 과정을 체험하는 데 바탕을 두는 것이다.
공간적 전략은 주정공장수용소 4・3역사관을 중심 축으로하여 제주농업학교와 일도리 공회당 터를 순환형으로 연결하는 4・3 기억의 순환로를 조성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물리적 접근성과 상징적 연속성을 확보하며, 4・3평화공원을 경유지로 포함하여 추모와 성찰의 동선을 형성할 수 있다. 일반적인 서사 구조는 중산간 지대의 ‘잃어버린 마을’에서 시작하여 주정공장, 농업학교, 공회당 등에서의 ‘도착과 절망,’ ‘심문과 분류,’ 그리고 학살터와 부두에서의 ‘공동체의 고통과 상흔’으로 이어지며, 각 장소의 구술증언과 인물의 스토리를 음성 가이드로 구현하여 추상적 역사를 개인적 체험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기억의 층위는 개인의 사적 기억과 공동체의 집단기억, 그리고 국가와 사회 전체의 공적 기억의 다층 구조로 설계하여 개인 중심의 미시사와 국가와 사회 중심의 거시사를 통합적으로 연결시킬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제주 주정공장 역사관의 정보센터 기능의 강화, 제주농업학교 터의 추모공간 조성, 일도리 공회당 터의 상징적 복원을 통해 각 장소의 특수성과 고유성을 유지하면서도 전체 서사 속에서의 의미를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또한 디지털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사라진 구조물을 가상 복원하고 통합 플랫폼을 통한 탐방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는 디지털 기억 복원 방식이 도입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통합적 접근은 세 곳의 수용소 터를 제주 4・3을 상징하는 문화경관의 일부로 재생시키며 불편유산의 윤리적 성찰 기능을 강화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사건의 연속성과 맥락을 공간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각 유적의 의미를 해석하고 기념하는 방식에 공동체의 다양한 목소리가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산화를 위한 장소 해석과 재현 과정에 유가족과 지역공동체의 견해가 적극적으로 반영되어야만 기억 주체 중심의 장소화가 실현될 수 있다. 요컨대, 4・3 기억의 장소화는 개별 공간에서의 재현이나 기념으로만 그치지 않고 사건의 순차적 전개에 따른 공간상의 경로에 기반한 통합적 문화경관으로 접근되어야 하며, 이는 치유와 추모의 공간을 조성하고 공동체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여 화해와 상생의 역사의식을 공유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VI. 결론
본 연구는 제주 4・3 사건 당시 구 제주읍 시가지에 위치했던 민간인 수용소 유적을 불편유산의 관점에서 조명하고 이들 유적의 유산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기억의 정치와 공간 재구성의 양상을 검토하였다. 특히 제주 주정공장, 일도리 공회당, 제주농업학교 터를 중심으로 동일한 역사적 사건과 연관된 장소들이 각각 다른 방식으로 기억되고 유산화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사회정치적 갈등과 대립이 전개된 장소에 대한 기억의 보존이 과거의 폭력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사회적 화해를 이끌어낼 수 있는 토대가 될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하였다.
제주 주정공장 수용소 터는 4・3 유족들의 지속적인 추모 활동과 시민사회의 요구로 가장 적극적인 유산화가 이루어진 사례이다. 2000년부터 시작된 행방불명인 진혼제는 이 장소를 기억의 공간으로 전환시켰으며, 2023년 개관한 주정공장수용소 4・3역사관은 사회적 기억을 공식적 유산으로 제도화시킨 결과이다. 그러나 수용소로 운영되었을 당시 주정공장의 공간과 수감되었던 주민들의 참상에 대한 재현이 부족하고 기록자료와 전시패널 등이 해설 위주로 이루어져 주정공장만의 고유한 장소성과 희생자들의 구체적인 사연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어 불편유산의 진정성 있는 재현에 대한 과제를 남기고 있다.
운주당 지구 역사공원으로 조성된 일도리 공회당 터는 선택적 기억의 정치가 드러나는 사례이다. 이 장소는 조선시대 군사지휘소, 일제강점기 불교 포교당, 4・3 시기 민간인 수용소라는 다층적 역사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조선시대의 방어유산으로만 표상되고 있다. 이와 같은 선택적 기억의 재현은 향토유산으로의 지정과 성안올레 코스의 일부로 편입되면서 승전의 기억을 반영한 역사유산으로서의 의미만이 채택된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관광 자원화와 도시재생이라는 현 시점에서의 필요에 의해 추동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MacDonald(2015)가 우려한 바와 같이 공동체의 부정적 역사를 회피함으로써 성찰의 기회를 상실하는 사례가 될 수 있다.
제주융합과학연구원으로 활용되고 있는 제주농업학교 터는 교육 당국에 의해 설치된 기념 표석을 통해 근대 교육기관으로서의 역사가 공식적으로 기념되고 있다. 4・3 당시 이곳에 설치된 임시 천막 수용소에서 발생한 민간인 수용과 학살의 역사는 침묵 속에 남아있다. 장소기억의 단절이 나타난 이유로는 4・3 사건 자체가 오랫동안 금기와 침묵의 역사를 거쳤다는 점, 4・3 당시 임시수용소의 물리적 흔적이 남아있지 않고 재개발이 이루어진 점, 해당 장소의 관리 주체가 유산화의 방향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는 Wollentz(2020)가 지적한 ‘정화된’ 문화유산이 갈등과 불화를 잠재우는 과정에서 오히려 침묵을 능동적으로 생성할 수 있다는 우려를 현실화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본 연구의 사례 분석은 불편함을 유발하는 장소의 유산화 과정이 결코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동일한 역사적 사건과 연관된 장소들이 각각 다른 방식으로 기억되고 재현되는 현상은 Logan and Reeves(2008)가 강조한 바와 같이 현재의 사회적 정체성, 정치적 실천, 윤리적 선택에 의해 불편함의 정도가 결정됨을 입증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4・3 수용소 유적의 유산화가 국가 주도의 하향식 과정이 아니라 유족과 시민사회의 지속적인 기억 경합의 결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불편유산이 권력관계의 역동적 변화 속에서 재구성되는 살아있는 유산임을 보여주는 동시에, 기억 주체들의 능동적 실천이 유산화 과정에 미치는 영향력을 확인시켜 준다. 4・3 수용소 유적의 물리적 일시성과 파편화된 특성을 고려할 때 개별 건축물이나 개별 장소 중심의 접근보다는 보다 넓은 공간 스케일에서 문화경관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주 주정공장 터, 일도리 공회당 터, 제주농업학교 옛터를 중심으로 잃어버린 마을과 수용소, 학살터 등 수난의 연결고리로 연결한 통합 문화경관 조성이 요구된다. 구체적으로는 주정공장수용소 4・3역사관을 중심 허브로 하여 세 지점과 희생 장소 등을 순환형으로 연결하는 4・3 기억의 순환로를 구축하고, 시간순 체험 동선을 통해 마을에서 수용소로, 수용소에서 생사의 갈래로라는 사건의 연속성을 구현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개인적, 집단적, 공적 기억의 다층 구조를 통해 미시사와 거시사를 연결시켜야 하며 디지털 아카이브를 활용하여 물리적 흔적이 소실된 터의 장소기억을 복원할 필요가 있다. 즉, 소개된 마을-은신처-수용소-형무소-학살터 또는 전략촌으로 이어지는 사건의 전개 과정에 따른 시계열적 경로의 형태나 국가폭력 체계의 총체적 경관으로서 유적들을 연결하는 접근이 효과적일 것이다. 그러나 일도리 공회당과 제주농업학교의 사례에서 확인되듯이 한 장소가 지닌 다층적 역사 중 일부 기억만이 선택적으로 보존될 경우 역사의 축소와 기억의 단절이 발생한다. 따라서 각 시대의 기억이 상호 보완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또한 주정공장 역사관의 사례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불편유산의 진정성 있는 재현을 위해서는 희생자 개개인의 구체적 경험과 증언을 통해 관람객이 역사적 사건을 체험할 수 있는 전시 기법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본 연구는 제주 4・3 수용소 유적이라는 구체적 사례를 통해 유산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기억의 정치를 실증적으로 고찰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특히 동일한 역사적 맥락을 공유하면서도 서로 다른 유산화 양상을 보이는 세 사례의 비교 분석을 통해 유산화 과정의 복잡성과 다층성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4・3 유적의 유산화가 지역공동체의 집단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사회적 화해를 모색하는 능동적 과정임을 확인함으로써 불편유산이 가진 치유와 성찰의 잠재력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는 다른 지역의 유사한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흔적과 기억의 보존・활용에 있었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그러나 본 연구는 구 제주읍 시가지 내 수용소에 국한된 분석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제주도 전역에 분포한 수용소 기억의 재현 양상, 그리고 지역별 차이에 대한 비교는 추후 연구 과제로 남는다. 또한 유산화 과정에서 배제된 목소리들, 특히 이념적으로 상이한 주체들의 관점에 대한 분석도 불편유산 연구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필요하다. 무엇보다 제주 4・3 수용소 유적의 유산화가 진행 중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억의 정치는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으며 새로운 세대의 등장과 사회적 맥락의 변화에 따라 이들 유적의 의미와 활용 방향도 재정의될 것이다. 따라서 이들 유적이 진정한 의미에서 사회적 화해와 평화교육의 장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제주 4・3 수용소 유적은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현재의 성찰과 미래의 평화로 전환시킬 수 있는 불편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다만 이러한 가치가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기억의 정치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 신중하고 포용적인 유산화 전략이 요구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