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earch Article

국토지리학회지. 31 March 2026. 1-15
https://doi.org/10.22905/kaopqj.2026.60.1.1

ABSTRACT


MAIN

  • I. 서론

  • II. 아르헨티나 철도의 건설과 근대 국가의 형성

  •   1. 철도 건설과 국토의 확장

  •   2. 철도 건설과 연방 체제의 완성

  • III. 영국 철도 자본의 유입과 산업 독점

  •   1. 영국 철도 자본의 유입

  •   2. 영국 자본의 철도 부문 독점화

  • IV. 과두 엘리트계층의 집권과 반외세 정서의 고취

  •   1. 과두 엘리트계층과 이민자 간의 갈등

  •   2. 반 외세 정서의 고취

  • V. 요약 및 결론

I. 서론

1825년 영국 스톡턴과 달링턴 간에 최초의 철도 노선(Stockton and Darlington Railway)이 개통된 이후 철도는 산업화와 근대화의 가장 기본적인 인프라였으며, 도시 및 국토 발전의 주요한 축이었다. 아르헨티나는 철도로 인한 경제 발전 및 국토 개발의 모범적인 사례로 꼽혀 왔다. 20세기 초반 아르헨티나의 철도망은 3만 5천여 ㎞로, 이는 남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40%에 이르는 것이었고, 전세계에서 8번째로 긴 것이었다.1) 철도를 기반으로 아르헨티나는 유럽 국가들의 산업화에 따른 국제노동분업에 편입되었다. 즉, 아르헨티나는 유럽 도시 노동자들에게 저렴한 식량을 제공함으로써 공산품 대비 임금의 비율을 낮추는 역할을 분담하였다(Conde, 1963, 143). 19세기 중반까지도 빈곤한 농업국이던 아르헨티나는 철도 건설을 기반으로 세계 경제체제에 편입하며 20세기 초반 세계 5대 부국으로 성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철도 건설은 아르헨티나의 경제 체제 및 국토 발전에서도 근본적인 부문에 영향을 미쳤다. 우선 식민시기 서부 및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국토의 경제 발전축이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이후 인구, 산업, 교통 노선, 사회 통제 등이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중심으로 중앙화되고 집중화 되었다. 또한 국제 자본 시장에서 소외되어 있던 아르헨티나에 외국 자본과 기술을 기반으로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철도 건설 이후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농산물 수출에 기반한 구조를 갖추게 되었고, 농업 노동력으로 대거 이주해온 유럽계 비숙련 노동력이 국민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정치적으로는 대토지 소유에 기반한 엘리트계층이 집권하였다.

그러나 농산물 수출을 기반으로 근대 국가로 성장한 아르헨티나에서는 이후 경제, 정치, 사회의 불안정성과 갈등 상황이 반복되었다. 철도 부설의 과정 및 운영의 과정에서 형성된 외국 자본과 엘리트 세력의 결탁이, 이후 아르헨티나 경제와 사회의 불안정성을 높이는 구조적인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 외국의 자본과 기술로 커피 수출용 철도를 건설한 중앙아메리카 국가들도 건설 비용 대신 철도 회사에 이양한 토지로 인해 미국 농기업의 전횡에 휘둘리게 되었으며, 바나나 공화국이라는 멸칭을 얻게 되었다. 브라질 등에서도 커피 등 농산물의 수출을 위해 철도를 건설한 이후, 해마다 총공사비의 7%씩을 외국 회사들에 지불하여야 했고, 철도는 국가의 부가 유출되는 주요 경로가 되었다(Rippy, 1943).2) 즉, 근대화와 수출경제를 위해 도입한 철도가 국가 경제 및 사회의 왜곡과 갈등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자원 수출 중심의 경제 구조는 생산지의 이익은 적고 공산품의 수입으로 산업 발전이 지체되는 것이 특징이지만,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그에 더하여 사회 갈등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Bebbington(2009)은 자원 수출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자원 채굴 산업이 민간 및 외국 자본의 통제하에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Gudynas, 2010, 12). 사회 갈등의 근본 원인은 자원 채굴을 담당하는 외국 자본, 즉 선진국 자본과 엘리트 세력의 결탁이다. 식민 제국주의 대신, 외국 자본과 결탁한 엘리트계층이 자원의 채굴 및 수출로 인한 이윤을 독점하고, 일반 국민은 저임금에 열악한 노동 환경에 시달리며, 이러한 과정을 유지하기 위해 독재정치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에 본고에서는 아르헨티나의 근대화 시기, 철도의 건설에서 나타난 사회 갈등을 영국 철도 자본과 엘리트계층을 중심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

국내에서는 아르헨티나 사회의 다양한 부문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특히 군사독재의 경험(김미덕, 2020; 2024)이나 포풀리즘(김달관, 2007), 그리고 소위 핑크 타이드라 불리운 진보 정권의 집권(최윤국, 2007) 등은 주요 사회적 관심사였으며, 아르헨티나의 민주주의 방식에 관한 관심(이순주, 2019)도 지속되었다. 불안정한 아르헨티나의 경제 상황에 관한 연구(김달관, 2022; 황지현・김용일, 2021)도 이루어졌으며, 페미니즘 및 성적 소수자에 관한 연구(이순주, 2020; 2025; 김영철, 2024; 박윤주, 2021)도 비중있게 다루어졌다. 아르헨티나로의 이주는 1965년 시작되어 오늘날 2만 3천 여명의 한인이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들의 이주 및 정체성, 그리고 한류에 관한 연구(송지영, 2021; 2023; 강희진, 2022; 박정하, 2024; 이순주, 2021)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철도에 관해서는 철도 건설을 통한 국토 개발 및 경제 발전에 중점을 둔 최윤국(1992)의 논문이 있으며, 근대화 시기에 관해서는 정치 및 사상에 대한 연구(손혜현, 2025; 전용갑, 2016)가 이루어졌다.

본고에서는 아르헨티나의 근대화와 경제 발전의 기초적인 인프라로서의 철도가 아니라, 외국 자본이 유입되는 경로로서 철도에 대해 살펴보고, 엘리트계층이 국가의 이익보다는 계층적 이익을 추구한 주요 수단으로서의 철도, 나아가 외국 자본과 엘리트계층의 결탁을 통해 국가 경제구조를 왜곡시킨 주요 원인으로서 철도를 다루고자 한다. 본고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우선, 철도 건설을 통한 국토의 확장 과정과 정치적 통합 과정에 대해 다룬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유입된 영국의 철도 자본이 아르헨티나의 주요 노선을 건설하면서 독점적 이윤을 취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나아가 이들과 협력한 과두 엘리트계층이 이민자를 배제하고 제조업의 발전을 막으며 외국 자본을 옹호함으로써 반외세 정서를 이끌어내는 과정을 다룬다. 즉, 본고에서는 철도가 경제 및 국토 발전의 인프라로서의 역할 이외에도, 오늘날 라틴아메리카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갈등 구조인 외국 자본과 엘리트 계층의 결탁을 공고히 하는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II. 아르헨티나 철도의 건설과 근대 국가의 형성

1. 철도 건설과 국토의 확장

1850년대까지 아르헨티나는 내수 중심의 빈곤한 신생 농업국으로, 농업 및 제조업 부문에서의 발전이 매우 미미하였고, 독립 이후 40여년 동안 발전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본래 식민시대 리오델라플라타 부왕령(1776-1810)의 주된 경제는 알토 페루(Alto Peru) 지역의 포토시 은광에 가죽, 밀, 가축 등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내륙의 비옥한 토지의 상당 부분에는 원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농촌 지역에서는 토호 세력인 카우디요(caudillo)들이 강력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오늘날 정치, 경제, 사회의 중심지인 리오델라플라타 강 하류, 즉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의 주요 항구들은 식민시대에 건설되었으나, 스페인이 직접 통제하지 않고 방치하던 지역이었다.3) 게다가 1852년까지 집권한 독재자 로사스(Juan Manuel de Rozas, 1835-1852)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목축업자 출신으로, 내륙 지역의 목축업 성장을 우려하여 철도 건설을 반대하였으며 반외세 정서를 정치적 기반으로 하였다(Wright, 1974, 14-16). 이는 당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철도 건설에 매우 적극적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4)

19세기 철도는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게 국토에 관한 인식을 제고시키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남아메리카 국가들은 철도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독립 이후 불분명했던 국경선들을 확정하였다. 철도 건설로 이어지지 않은 경우에라도, 국가들은 이웃 국가와 국경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고 정확한 측량을 통하여 국경의 위치를 확정하였다(Barkley, 1917, 168). 아르헨티나의 경우 원주민들이 파타고니아의 전역과 내륙 지방의 상당 부분, 그리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의 일부 지역까지 방대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고, 토지를 둘러싼 영토분쟁이 끊이지 않았다.5) 이에 아르헨티나 정부는 농장의 안전성 확보와 농작물 및 가축의 생산성 확대를 명분으로 원주민 토벌 작전을 수행하곤 하였다(Rock, 1985: 손혜현, 2025, 284에서 재인용). 대표적인 예로, 1875년 아베야네다(Nicolás Avellaneda) 대통령은 “원주민을 제거하고 국경 지대를 차지한다는 것은 다름아닌 사막을 식민화한다는 것”이라고 하였다. 1876년부터 근대적 국경을 확립하고, 수출용 목축업에 필요한 토지를 확보하기 무장한 농장주들로 구성된 군대가 팜파와 파타고니아의 원주민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다. 일명 ‘사막 정복(Conquista del Desierto)’이라고 불리운 이 작전을 통해 3천만 ㏊의 토지가 국가에 수용되었다. 이후 원주민을 몰아낸 토지에 철도가 개통되고 농업이 이루어졌다(박수경, 2025, 121). 이렇듯 사막 정복은 아르헨티나가 근대화를 이행하고 완수하는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아르헨티나의 철도 시대는 1857년 8월 30일,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 중심 광장과 플로레스타 마을 사이를 잇는 서부 철도(Ferrocarril Oeste)의 10㎞ 구간이 개통되면서 시작되었다. 1855년, 160명의 기술자와 작업자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하면서 공사가 시작되었고, 레일, 철도 차량, 기관차 등은 영국에서 수입되었다(Pulley, 1966, 64). 아르헨티나는 철도 건설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국토의 대부분이 기복이 적고 지반이 단단한 평야로, 하천도 적어서 건설 비용이 여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철도 건설에 필요한 석재와 목재가 국내에서 조달되었고 철로 정도만 외국에서 수입하였다(Pulley, 1966, 66). 이후 전국에 걸쳐 철도망이 구축되면서 소위 ‘팜파 혁명’이라 일컫는 1880년대의 농업 지대 확장 및 오지 개척이 이루어졌다. 팜파의 개척 과정에서 철도 네트워크의 중심은 부에노스아이레스였다. 1890년까지 5개의 노선이 팜파의 서쪽 및 남쪽을 가로 질러 연결되었으며 철도를 따라 경작지가 조성되고 주거지가 확대되었다. 1872년부터 1914년 사이 경작지는 18만 ㏊에서 2,430만 ㏊로 증가했다(Pulley, 1966, 69).

이러한 확장의 기반은 상업적 농업, 즉 곡물과 육류 제품의 대규모 수출이었다. 철도의 부설과 함께 밀 재배 지역은 내부 지역까지 확대되었고, 밀 수출량은 1876년 21톤에서 1890년 30만 톤으로 증가하였으며, 1900년부터 1914년까지는 매년 평균 221만 톤이 수출되었다. 이는 아르헨티나 밀 생산량의 약 70%였다. 또한 20세기 초 냉장선이 도입되면서 냉장 쇠고기가 주요 수출품으로 부상하자, 아르헨티나의 목축업은 근본적인 변화를 통해 유럽, 특히 영국 시장을 빠르게 개척하였다. 목축업자들은 농업협회를 구성하여 가축 사육 기술을 개선하고 새로운 목축 방식을 보급하였으며, 새로운 품종을 유럽에서 수입하였다(Wright, 1974, 54). 당시 국제 환경도 아르헨티나 농산물 수출에 우호적이었다. 우선 유럽의 산업화와 도시화로 농산물의 수요가 급증하였다. 또한 기술의 진보로 운송비용이 감소하였다. 나아가 자유무역의 확산으로 관세와 각종 규제가 완화되어 국제 무역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이에 아르헨티나 정부는 철도, 선박, 항만 및 통신 사업에 외국자본을 유치하여 수출경쟁력을 향상시켰다(손혜현, 2025, 282). 농산물 수출을 지원하기 위해 주요 철도 회사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 로사리오, 바히아블랑카 등의 항구에 창고와 곡물 엘리베이터를 운영했다(Pulley, 1966, 70)

철도는 국내 무역도 성장시켰다. 철도를 통해 광물, 소금, 목재, 건축 자재들이 국내 시장으로 운송되었다. 인구 밀도가 높은 부에노스아이레스와 팜파 지역은 국내 소비 시장으로 성장하였다. 멘도사와 쿠요의 와인, 투쿠만의 설탕, 북동부 예르마의 마테차, 차코의 면화, 리오네그로강 상류 계곡의 과일 등이 철도를 통해 국내 소비 시장에 공급되었다. 그러나 외국에서 수입된 공산품들이 철도를 통해 국내에 유통되면서 지역의 내수 산업은 전반적으로 몰락하였다. 동부 지역의 목축업과 금융업이 국가의 주요 산업으로 성장하였지만 내륙 지역은 자체적인 산업이 쇠퇴하며 중앙 정부의 재정에 의존하게 되었다(Wright, 1974, 55-57).

2. 철도 건설과 연방 체제의 완성

아르헨티나는 1810년 독립혁명과 1816년 투쿠만 의회 소집을 거쳐 독립 공화국이 되었지만, 1853년에야 헌법이 제정되면서 입헌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완전한 형태의 국가는 1880년에야 성립되었다. 근대 국민국가 형성이 지연된 것은 헌정 수립을 도모했던 엘리트계층이 연방을 지향하는 연방파(federales)와 통합주의를 지향하는 통합파(unitarios)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연방파는 내륙지방 주들이 중심이 되었고, 통합파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기반으로 하였다. 연방파는 중앙집권화에 반대하고 주별 자치권 강화를 주장하였으나 통합파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화를 원했다(조영실, 2011, 288-289; 297). 연방파와 통합파 간의 갈등은 정치적 당쟁을 넘어 무력을 동원한 전투로도 이어졌다. 이들 간의 갈등은 정치적 이념뿐 아니라 지역간 경제적 상황의 차이에서 기원하였다. 내륙 지역은 외부와의 교역을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를 이용해야 했고, 이에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내륙지방의 상품에 통관세를 부과하였다. 일찍이 항구가 발달하고, 주변 지역에 목축업이 이루어져 경제적 자립도가 가장 높았던 부에노스아이레스 주는 독립 국가를 형성하고자 했다. 1853년 연방 헌법 공표 이후 여타 모든 주들은 헌법을 수용하고 아르헨티나 연방에 가입하였으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주는 1860년까지 연방 헌법을 비준하지 않았다(Wright, 1974, 25).

근대 국가의 수립에 대한 이념의 차이는 사회적 갈등의 원인이 되었으나 이들을 종합하려는 시도도 이루어졌으며, 이는 아르헨티나 국가 수립의 기저가 되었다. 두 이념의 종합은 사상가이자 법학자인 알베르디(Juan B. Alberdi)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는 연방주의와 통합주의가 결합된 정부 형태가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며 연방주의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였다(조영실, 2011, 290). 알베르디는 연방 헌법의 주요 기초가 된 󰡔Bases y puntos de partida para la organización política de la República Argentina󰡕(1852)에서 단결된 아르헨티나 공화국을 구성하고 현대화를 이루는 데에는 철도망이 필수적인 요건이라고 주장하였다(Alberdi, 2017). 알베르디의 이러한 주장은 1853년 헌법 제67조에 반영되었다.6)

철도가 아르헨티나의 건립과 관련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연방파와 통합파 모두 동의하였지만, 입장은 달랐다. 통합파인 부에노스아이레스 주민들은 내륙 지역에 철도가 건설되면 내륙 지역의 목축업이 경쟁력을 지니게 될 것이라 생각하여 철도 부설을 반대하였으며, 철도 부설을 통한 외국 자본과 기술의 유입에 대해서도 혐오를 표출하였다. 반면 연방주의를 지지한 내륙 지역 주민들은 철도가 내륙의 경제적 발전을 이끌어낼 것이고, 결국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경제적 우위를 종식시키리라 기대했다(Wright, 1974, 34).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연방 합류를 미루고 철도 부설에도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파라나 강 상류로 400㎞ 정도에 위치한 로사리오를 북부 및 서북부 지방의 관문 도시인 코르도바로 연결하고자 하였다. 1850년대 로사리오의 성장은 아르헨티나 경제 발전에서 철도 시대의 분기점으로 꼽힌다. 즉,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분리 독립에 대한 대안으로서 로사리오를 무역항으로 성장시키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기능을 분담하여, 나아가 내륙 북부 지역의 경제를 발전시키고자 하였다(그림 1). 로사리오는 외국 무역 개방 이전부터 하천 교통의 종착지이자 코르도바와 쿠요로 향하는 육상 무역의 허브 역할을 했지만, 1854년 외국 무역을 시작한 작은 항구 도시였다. 본래 코르도바는 인구밀도가 높은 내륙 중심 도시로, 칠레, 볼리비아, 페루의 태평양 연안 주들에서 대서양으로 향하는 주요 육상 교통로의 교차점에 입지하였다. 로사리오와 코르도바 간 철도가 완공되자 팜파 북부 지역으로 인구 이동이 시작되고 경제가 빠르게 발전하였다. 이후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인구 희박 지역에 철도를 건설하여 지역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이 국토 건설의 암묵적인 이상으로 자리 잡았다(Goodwin, 1977, 613-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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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로사리오와 코르도바 간 철도 건설(1871)
출처: Goodwin, 1977, 614.

연방헌법의 공표 이후 1880년까지 실질적으로 개통한 철도는 적었지만, 철도 건설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이 시기에는 철도 건설에 적극적이고 정치적으로는 매우 진보적인 대통령들이 집권하였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정치 지도자들은 경제적 발전이 정치 및 사회적 발전을 이끌어낸다는 자유주의적 사고에 기반하고 있었으며 유럽인들의 이주와 외국 자본의 유입, 즉 유럽화를 통해 현대 국가 건설을 이루고자 하였다(Wright, 1974, 8-9; 15). 미뜨레 대통령(Bartolomé Mitre, 1862-1868)은 영국계 상공인협회가 철도 건설에 지원하도록 독려하였으며, 외국계 기업들이 전국 규모의 철도를 건설하도록 유도하였다(Wright, 1974, 26). 사르미엔토 대통령(Domingo Faustino Sarmiento, 1868-1874) 시기에는 로사리오와 코르도바 간 철도가 완성되었다. 사르미엔토 대통령은 철도 건설 독려를 위해 국가의 보조금을 적극 지원하였고, 런던에서 600만 파운드의 차관을 도입해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에서 코르도바까지의 노선을 투쿠만까지 연장하였다. 이후 투쿠만의 설탕 산업이 성장하였고 이주민의 정착이 이어졌다. 1860년대와 1870년대의 꾸준한 경제 발전은 1880년대의 경제 호황으로 이어졌으며, 이후 전국에 철도가 본격적으로 건설되었다(Wright, 1974, 38-40; 43).

정부는 철도 건설을 장려하기 위해 총공사비에 대한 이자 보증, 자재 및 장비에 대한 면세 혜택, 철도 노선 주변의 토지 부여 및 경쟁 노선 자제 등의 유인책을 제공했다. 예를 들어, 1863년 중앙아르헨티나 철도(Ferrocarril Central Argentino)는 총공사비에 대해 40년간 7%의 이자 지급을 보증을 받았으며, 철로 양측 5㎞ 씩의 토지에 대한 권리를 부여받았다. 이자 보증은 외국 철도 자본을 유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정부의 이자 지급 보증은 1890년 아르헨티나 금융공황의 주요 원인이 되었으며, 당시 국가 외채의 약 20% (292만 금 페소)가 철도 보증 채무 불이행분이었다. 국가의 지급 보증은 1907년 소위 미트레 법의 제정 시기까지 유효했다(Pulley, 1966, 65; 72-73).

III. 영국 철도 자본의 유입과 산업 독점

1. 영국 철도 자본의 유입

19세기 후반부터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해외 철도는 런던 금융시장의 주요 투자처이자 수익원이었다. 이 시기 영국 해외 투자액의 40%에서 60% 정도가 아메리카 지역에 집중되었는데, 특히 미국과 아르헨티나가 주요 투자처였다. 철도 시대가 열린 직후부터 영국은 미국을 비롯한 아메리카 지역에 투자하였는데, 특히 1870-1880년대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영국의 대미 투자액 40억 달러 중 약 30억 달러가 철도 부문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대아르헨티나 투자는 20억 달러 정도였으나 철도 부문의 비중은 약간 낮았다. 당시 영국 자본은 아르헨티나 철도 노선의 75% 이상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미국의 철도 노선은 약 15% 정도 소유하고 있었다(Jenks, 1951, 375-379).

미국과 아르헨티나는 영국 철도 자본의 주요 투자처였지만, 투자와 관련된 양 국가의 상황은 상이하였다. 런던의 자본 시장에서 미국 철도는 고수익 상품으로 인기가 있었고, 영국 자본은 미국 전역의 철도에 투자하였다. 그러나 영국 자본은 미국 철도 관련 기업 운영이나 통제, 철도 운영 부문에 관여하지 않았다(Jenks, 1951, 377-378). 이는 미국에 투자된 영국 자본 대부분이 다수의 소액 주주들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7) 한편 아르헨티나에 영국의 철도 자본이 유입되는 과정은 미국과 상이했다. 1850년대까지 아르헨티나의 철도 사업에는 외국 자본이 유입되지 않았다. 정치적 불안정, 연방파와 통합파 간의 지속적인 적대 관계, 원주민의 공격 등이 위험요소였고, 투자처로서 아르헨티나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낮았다. 국제적으로 아르헨티나는 상업적 감각이 부족하고 농업 구조가 정체된, 후진적인 국가로 비쳤으며, 인구 밀도가 낮은 팜파 지역의 철도 건설은 낮은 수익률이 예상되었다(Goodwin, 1977, 619). 게다가 영국 자본은 연방 정부보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더욱 매력을 느꼈다(Wright, 1974, 20).

일찍이 알베르디는 자본이 부족한 아르헨티나가 외국 자본의 투자를 통해 근대화를 이루어내기를 희망했다. 따라서 관대한 특권과 이윤을 제공하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혜택을 부여함으로써 외국 자본을 유치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심지어, “외국 자본을 면세와 특권으로 둘러싸서 우리들 사이에서 정착하게 하라”고 했다(Pulley, 1966, 63). 외국 자본을 통한 국가 발전은 알베르디 뿐 아니라 당시 아르헨티나 엘리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자유주의 경제를 통해 유럽과 같은 선진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엘리트계층은 미국을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간주하였고, 미국처럼 유럽의 자본을 투자받아 철도를 건설하고 근대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1860년대 아르헨티나의 철도 건설에 대한 투자를 이끌어낸 것은 아르헨티나에 거주하던 영국계 기업가들이었다. 당시 팜파 지역에는 아일랜드 출신 이민자 수천 명이 정착해 있었다. 게다가 영국계 상인들은 내륙 지역을 영국 상품에 대한 잠재적인 시장이자 수출용 농산물의 생산기지로 보았고, 철도의 부설 및 유지 자체가 고수익 산업이라는 점도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의 산업화 및 도시화로 농축산물 시장이 확대되고 있었고, 영국 정부는 회사법(1862년)을 제정해 영국 자본의 해외 투자를 독려하였다. 영국계 상공인협회는 1860년대 아르헨티나의 주요 철도 노선 건설에 적극 투자하였다(Wright, 1974, 27-30). 이에 아르헨티나 연방 정부 및 지방 정부는 1870년대부터 적극적으로 철도 사업을 지원하였다. 정부는 토지를 분배하고, 이익을 보장하며, 주식을 매입해 주고, 세금을 면제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지원을 제공했다. 당시 철도 부설과 관련된 엔지니어와 시행자, 노동력 등 대부분의 인력이 영국 출신이었고, 철도 차량과 레일, 침목 등 자재도 대부분 영국에서 수입되었다(Jenks, 1951, 383). 이는 영국의 철강 산업과 목재 산업의 발달에 기여하였고, 철도 산업과 관련된 직간접적인 부문은 고용 증가로 이어졌으며, 나아가 영국의 산업 혁명에 추가적인 동력을 제공했다(Wright, 1974, 12).

19세기 말 20세기 초반, 아르헨티나는 투자에 적절한 국가였다.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되고 법적 체계가 갖춰져 있었으며, 투자 수익의 송금에 제한이 없었고, 특히 통치 계층이 외국 투자에 대한 보장을 했기 때문이다. 1910년 당시, 아르헨티나에 투자된 외국 자본 22억5천6백만 금페소 중 영국 자본이 81%였다. 영국 자본은 철도 부문에 8억 금페소, 정부의 차관 및 채권 부문에 6억 9천만 금페소를 투자하고 있었다. 또한 영국 자본은 토지 사업에도 투자하여 상당한 이익을 거두고 있었다(Conde, 1963, 145).8)

그리고 1914년 당시 가장 수익률이 높고 주요한 구간은 영국계 철도회사가 운영하던 3대 철도로, 이들 세 노선의 총길이는 13,200km로 전국 철도의 40%에 달하였다(표 1). 나머지 노선은 소규모 영국 기업들과, 소수의 프랑스 철도 회사, 그리고 아르헨티나 정부가 소유하고 운영하였다. 프랑스의 영향력은 상당히 제한적이어서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연결되지 않는 노선을 운영하였고, 운영 길이는 약 3,041km로, 전국 철도노선의 10% 정도였다(Pulley, 1966, 69). 아르헨티나 연방정부도 지속적으로 철도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외국계 민간 기업들은 수익성이 높은 지역에 집중적으로 투자한 반면, 국영 철도 노선은 그 이외의 지역에 건설되거나 주요 노선의 지선으로 건설되었다. 1880년대 중반 국영 철도는 1,500km로 당시 전국 철도망의 1/3에 달하는 것이었으나 과두정부가 종식될 무렵 5,580㎞로, 전국 철도의 약 17%에 그쳤다(Palermo, 2006, 216)(그림 2).

표 1.

영국계 주요 철도 노선

중앙 아르헨티나 철도
(Ferrocarril Central Argentino)
부에노스아이레스 남부 철도
(Ferrocarril Sud)
부에노스아이레스 태평양 철도
(Ferrocarril Buenos Aires al Pacífico)
계획 1854년 9월 1862년 6월 1874년
최초 운행 1863년 4월 1865년 1885년 4월
시작 윌리엄 화이트(미국) 휠라이트(미국) 존 E. 클라크(런던 신디케이트)
정부의
보장 사항
해마다 총공사대금의 7% 지급 보장
철도 양안 5㎞의 부지 무상 제공
해마다 총공사대금의 7% 지급 보장
세금 면제
해마다 총공사대금의 7% 지급
보장(20년 간)
노선 확장 1900년 1,350㎞
1910년 4,213㎞
1913년 4,966㎞
1881년 563㎞
1900년 3,580㎞
1914년 5,977㎞
1887년 598㎞
1900년 1,031㎞
1914년 1,721㎞
노선 부에노스아이레스~투쿠만
부에노스아이레스~코르도바
로사리오-코르도바(1870)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과 바히아블랑카 항
부에노스아이레스~칠레
(안디노 노선 연결)
운영의 특성 ・ 1870년대 말까지 60개의 농업 식민지 건설
・ 이민 촉진과 농업 확장에 가장 기여
・ 1913년까지 연간 승객 2,500만 명, 곡물 400만 톤, 가축 65만 마리 수송 ・ 가장 번영
・ 1914년 23,500만 금페소 자산 보유
・ 운영 초기는 파산 위기(폭우[1888] 및 1890년 금융공황으로 정부 보증금 지급 연체)
・ 1914년 1억 2천만 금페소 자산 보유

출처: Pulley(1966)의 내용을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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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1880-1911년 철도망의 확대
출처: Barclay, 1917, 194.

2. 영국 자본의 철도 부문 독점화

영국계 자본의 독점적인 철도 운영은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이외의 지역 간에는 연결도가 매우 낮게 비효율적으로 설계되었고, 요금은 높으나 서비스의 질은 낮았다. 회사들은 비용은 과도하게 책정하였지만 자산과 수익 규모는 은폐하였다.9) 특히 영국계 주요 3대 철도 회사들은 런던에서 이사회를 개최하고, 아르헨티나의 철도 운영 및 관련 세부 사항들을 모두 런던에서 결정하였다. 아르헨티나 현지의 철도 시스템 관리도 대부분 영국인 남성들이 담당하였다. 모든 역의 역장은 영국인이었고, 기관사, 사무직, 철도 관련 주요 관리 등도 영국인이었다. 따라서 아르헨티나 현지인들의 철도 부분 취업률은 저조하였다. 영국인 직원들은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에 비해 매우 높은 급여를 받고 장기간 계약을 하였다. 반면, 아르헨티나 직원들이 고위직에 오르려면 영국인과의 인맥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게다가 철도 부문에서의 고용 경력은 아르헨티나 행정부의 고위직 진출 시 좋은 발판이 되었다(Jenks, 1951, 384-385).

이렇듯 아르헨티나 정부는 외국 자본의 민간기업, 특히 영국계 철도 관련 기업들에 대해서는 적극 지원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국내 제조업의 발전은 막았다. 제조업에 필요한 원자재나 중간재를 수입할 경우 완제품보다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였다. 반면 아르헨티나의 유통 및 신용 제도는 수입에 특화되어 있었고, 유럽산 소비재의 수입에 대한 제한 등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인구의 상당 비율을 차지하던 이주민들은 고국에서의 소비 습관을 유지하며 수입품을 선호했다. 따라서 아르헨티나 경제계에서는 제조업보다는 수입업을 선호하였고, 국내 제조업 분야에 대한 투자는 하려들지 않았다. 아르헨티나의 농산물을 유럽에 수출하기 위해서는 유럽산 공산품을 수입해야 했기 때문이다(Conde, 1963, 153-155).

철도 부문에서의 영국의 독점적 지위의 강화는 철도 건설 초기 아르헨티나 자본의 태도에서도 일부 기인하였다. 영국계 자본이 아르헨티나의 철도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참여한데 반해 아르헨티나 금융계는 자본을 제공할 능력이 있더라도 투자하려 하지 않았다. 즉, 아르헨티나 사회는 초기부터 철도 사업에 투자하거나 통제권을 확보하려 하지 않았다. 아르헨티나 엘리트들의 관심사는 철도 사업 자체보다는 철도 부설로 인한 지가 상승으로, 철도 주변 토지에 투자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이러한 지대 추구적 행태는 스페인 식민지배의 영향이었다.10) 당시 엘리트계층에게는 대토지 소유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지위를 높이는 가장 주요한 방법이었다. 따라서 1854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철도 건설을 위한 “오에스테(Oeste)”사가 설립되었을 때에도, 아르헨티나의 민간 자본 투자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주 정부가 공사비의 1/3을 부담하였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영국계 상공인협회가 2/3를 투자하였다. 결국 1857년 8월,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와 외곽의 10㎞를 잇는 아르헨티나 최초의 철도는 영국계 자본과 주 정부의 자본으로만 건설되었다. 이후 외국 자본의 철도 회사는 국가가 원하는 지역에 철도 노선을 건설하였고, 아르헨티나 정부는 국가 계획 프로그램을 통해 외국인 투자자들의 수익을 보장해 주었다. 정부는 또한 외국인들이 철도를 운영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으며, 외국계 민간 철도 회사들은 국가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운영하였고, 경영에 관해서도 비공개를 유지하였다. 외국 자본과 아르헨티나 정부, 엘리트계층은 철도 건설과 관련하여 이러한 방식으로 서로 간의 이익을 유지하였다(Wright, 1974, 22; 30-31).

IV. 과두 엘리트계층의 집권과 반외세 정서의 고취

1. 과두 엘리트계층과 이민자 간의 갈등

자원 수출 중심 경제가 나타나는 국가에서는 권위주의 정부가 들어서는 경향이 강하다. 엘리트계층으로 구성된 정부가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고 외국 자본과 공생함으로써 국가의 이익보다는 계층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하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의 철도 건설과 경제적 발전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던 시기에는 과두정치라 불리는 엘리트계층의 지배가 이루어졌다. 과두 세력은 공권력을 계급적 권리로 생각하였고, 자신들의 계급적 특권을 유지하고자 노력하였다(Pulley, 1966, 71). 나아가 자신들의 이익과 특권을 위협하는 세력의 도전을 봉쇄하기 위해 일반 국민의 참정권을 제한하고 선거를 조작하여 독재를 공고화했다.11) 정치적으로는 중앙 및 지방의 행정력을 장악하였고, 경제적으로는 토지를 기반으로 하는 이익 집단이었으며, 농산물 수출을 통한 자유무역 체제를 옹호하였다. 즉, 비옥하고 방대한 토지를 이용해 국제 노동분업 구조에서 농업 생산자로서의 역할을 확고히 함으로써 국가를 근대화시키고자 하였다. 따라서 외국 자본, 특히 영국 철도 산업 부문과 대규모 목축업을 기반으로 하는 과두 엘리트계층 간에는 굳건한 연대가 형성되었다. 이들 간의 연계는 철도 뿐 아니라 토지 회사, 금융 회사, 포장 공장, 창고, 전차, 항구 등으로 확대되었다. 1947년 철도 국유화 이전까지 아르헨티나 대기업의 대부분은 영국 기업이었으며, 상당 수가 철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Jenks, 1951, 385).

더욱이 아르헨티나의 목축 엘리트들은 이윤 및 자본의 분산을 막기 위해 이주민들이 토지 소유를 제한하였다. 아르헨티나의 내륙 지역에 대한 정복 및 개척, 즉, 사막 캠페인과 철도 부설을 통해 팜파 지역 및 파타고니아 지역의 광대한 토지가 농업지역으로 개척되었다. 알베르디의 주장에서처럼 아르헨티나의 엘리트계층은 유럽계 이민자를 받아들여 농업 노동력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엘리트계층은 이민자들과는 이윤의 기반인 토지를 공유할 의도가 없었다. 엘리트계층은 이민자들이 농촌으로 이주할 경우 토지 구매를 제한하거나 시가보다 3~4배 높은 가격에 구매하게 함으로써 토지에 대한 독점력을 유지하였다(Wright, 1974, 55-56). 경작 가능한 토지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지만, 대부분 소수의 대지주들에게 집중되었고, 이민자들에게는 매우 적은 토지만이 분배되었다. 원주민으로부터 확보한 토지 1,070만 ha 중 300만 ha 이상이 19명의 지주에게 분배되었으며, 전체 면적의 3/4 정도를 100명의 지주가 소유하였다. 토지 매입에는 기존 지주들 외에도 상인들과 투기꾼, 외국인 투자자들도 참여하였는데, 외국인 투자자들은 대부분 영국인이었다. 농지의 확대와 농업의 근대화 과정에서도 대농장제(latifundio)는 더욱 강화되었다(Bisang, 2011: 손혜현, 2025, 284-285에서 재인용).

토지를 분배하는 과정에서도 토착 지주들은 생산성이 높고 교통 인프라가 잘 갖춰진 토지를 분배받았고, 이민자들은 척박하고 외진 지역의 토지를 분배받았다. 농촌에 정착했던 이민자들 중 다수가 불평등한 토지 분배, 불합리한 토지 계약 조건, 높은 토지 임대료, 열악한 정착 요건 등으로 인해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도시로 이주하였고, 일부는 고국이나 제3국으로 재이주하였다(Rock. 1985, 142-147: 손혜현, 2025, 288에서 재인용). 이주민들은 대부분 도시에서 다양한 경제활동에 종사하였다. 이민자 중 상당수는 자국에서의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경제적 성공을 거두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아르헨티나 상업 및 기업 부문의 3/4 정도를 이민자들이 장악하였다. 이에 폐쇄적인 엘리트계층 및 과두 정치세력은 이들 신생 부유층을 두려워하고 배제하였다. 진취적인 이민자 남성들이 상업 및 전문직 분야에서 성공하는 것에 분노했고, 이주민 노동자들과 지식인들의 노동조합을 경멸했으며, 이민자들을 사회 전복 세력으로 인식하기까지 했다.

본래 엘리트계층은 젊고 생산성이 높은 유럽인의 이주를 통해 인구 구조 및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고, 나아가 선진국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아르헨티나의 1853년 헌법에서는 대규모의 이민을 유치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라고 명기하였다. 팜파 지역의 유럽 식량 기지화와 농업 노동력 부족을 예견한 그는, 근대 국가로의 발전에서 이민은 필수적이며 이민을 장려하는 것은 엘리트계층의 시대적 소명이라고까지 생각했다. 당시 엘리트들은 대규모 이민, 보편적인 의무교육, 외국 자본과 철도망을 기반으로 하는 현대적인 생산양식에 기반한 국가발전계획을 수립하였다(Conde, 1968). 1856년에서 1930년 사이에 유럽을 떠난 약 6천만 명의 유럽인들 가운데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인구는 660만 명에 달했다.12) 이민자들은 대부분 하층 계급 출신으로, 이들의 유입은 도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확대로 이어졌다. 이에 대중 및 중산층 역시 외국인 혐오 정서를 기반으로 이민자들을 배척하였다. 범죄율이 증가하고, 주택이 부족하며 끄리오요 계층의 일자리가 줄어드는 현상 등을 이민자의 증가 탓으로 돌렸다. 아르헨티나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정확히 성립되지도 못한 상태에서, 이민자들과 외국계 자본 및 기업은 혐오나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Wright, 1974, 90-92).

2. 반 외세 정서의 고취

외국인 이주민에 대해서는 모든 계층이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과는 달리 외국계 자본에 대해서는 계층에 따라 다른 태도를 보였다. 우선 엘리트계층은 근대화 및 경제적 성장의 공을 철도 및 영국 자본에 돌렸으며, 영국 자본 없이는 국가가 생존할 수 없다는 신념까지도 지녔다. 엘리트계층은 영국 기업의 현지 이사나 고문, 변호사로 근무했으며, 철도 부설로 인한 지가 상승으로 부를 축적했다. 따라서 엘리트계층 및 과두정치인들은 영국 기업을 국가의 발전과 질서, 근대화의 주체로서 옹호했으며, 외국 자본의 지속적인 유입을 희망하였다(Wright, 1974, 89-90; 100).

그러나 외국계 자본에 대한 대중 및 중산층의 인식은 부정적이었다. 수출용 농업을 제외한 대부분의 상업, 산업, 소규모 농업 등은 외국과 상품 및 자본과의 경쟁에서 불리한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대중은 외국 기업들이 엘리트들과 연합하여 국가를 지배한다고 인식하였다. 특히 내륙 지역의 소농과 상인들은 영국 소유의 철도에 적대감을 느꼈다. 그들은 초기에는 지역 개발의 수단으로서 외국 소유의 철도를 찬성했지만, 내륙 지역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복속시키는 수단이라고 생각했으며, 철도로 인해 착취당한다고 느꼈다. 내륙 지역의 주민들은 끊임없이 철도를 공격했고, 외국 소유 기업을 일관되게 보호하는 과두정부에 대한 불신과 경멸을 드러내었다(Wright, 1974, 91; 95-96). 심지어 철도의 수혜자들인 농장주들도 철도에 대해 반감을 지녔다. 철도의 가장 주요한 역할은 수확물의 빠른 수송이었지만 영국계 자본이 독점하다시피한 철도회사들은 수확기에 적절한 철도 차량을 배치하지 않았고, 운임도 높았기 때문이다(Wright, 1974, 59).

그러나 외국계 철도 회사들은 스스로 아르헨티나 경제 성장의 주체로서 자부심을 지녔고, 아르헨티나의 여론이나 비판은 무시하였다. 이는 결국 철도의 국유화 여론으로 이어졌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철도를 국가가 수용하여 더 낮은 요금과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엘리트계층은 국유화에 반대하였다. 표면적으로는 국가가 철도 사업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였지만, 외국 자본의 유입 중단을 두려워 하였기 때문이다. 엘리트계층은 철도 국유화를 방해하고 오히려 국가가 운영 중이던 철도를 영국계 자본에 추가로 매각하였다(Wright, 1974, 60-61).13) 이는 1890년 소위 베어링 사태라 불리는 아르헨티나의 경제 위기에서 기인하였다. 이는 후아레스(1876-1880) 대통령이 이미 충분한 철도망에 더하여 18,000㎞에 이르는 신규 철도 프로젝트를 승인함으로써 촉발된 경제 위기이다. 당시 신규 노선 대부분은 기존 노선과 경쟁하거나, 오로지 지가 상승을 위해서 계획되었다. 전국이 토지 투기 열풍에 휩싸였고 아르헨티나 경제는 급속히 악화되어 결국 1890년 화폐가치가 폭락하였다.14) 이에 아르헨티나 정부는 1910년까지 가장 중요한 노선인 중앙 아르헨티나 철도, 부에노스아이레스 남부 철도, 부에노스아이레스 태평양 철도, 서부 철도 노선을 영국 기업들에 매각하였다(Wright, 1974, 99). 주요 철도의 건설 이후 총공사비의 7%에 달하는 이윤을 해마다 수령하고 철도 관리 및 운영, 보수 등을 도맡았던 영국계 철도 회사들은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수익률이 높고 주요한 철도들을 모두 소유하게 되었다.

과두 엘리트 정치인들이 영국계 자본에게 철도를 매각하여 독과점을 오히려 심화시킴으로써 외국계 기업에 반대하는, 중산층 중심의 급진당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들은 노동자 계층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였으며, 경제적 민족주의를 특징으로 하였다. 즉, 외국 자본을 비판하고 과두 정권을 거부하는 대중적 정치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반외세, 반과두정치의 사회적 분위기 덕에 1916년 급진당의 이리고옌(Hipólito Yrigoyen, 1916-1922; 1928-1930) 대통령이 당선되었고 아르헨티나의 과두정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리고옌 대통령은 영국 소유의 철도 시대를 끝내고 정부가 공공시설을 지배하고 관리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리고옌 정부는 철도 노조의 노동쟁의에서도 친노동적인 입장을 취하는 등 영국계 철도에 대해 맞서는 모습으로 반외세적인 대중의 지지를 얻어냈다(Wright, 1974, 111-120). 그러나 아르헨티나 정부의 태도는 또 다른 외세의 등장으로 바뀌었다. 20세기 초반, 미국 자본과 산업이 라틴아메리카에서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으며, 아르헨티나에서도 미국 철도 회사들이 국영 철도 회사에 철도 장비를 공급하였다. 미국 자본의 확장을 두려워한 영국계 자본들은 영국 철도 회사의 주식 소유를 영국인과 아르헨티나인으로 한정하는 법령 개정을 이끌어 내었으며, 반영국 정서를 통해 지지를 이끌어내었던 이리고옌 대통령조차도 아르헨티나의 발전은 모두 영국계 철도 덕분이라며 반외세적 태도를 바꾸게 되었다(Wright, 1974, 131-133). 반외세를 정치적 자산으로 당선된 이리고옌 대통령은 또 다른 외세의 등장에 대해 기존의 영국 자본을 두둔하였다.

게다가 1932년, 영국이 자유무역 대신 보호무역으로 정책으로 변경하면서 아르헨티나 경제가 위기에 직면하였다. 당시 아르헨티나 수출에서 곡물과 육류의 비중은 96%에 달하였고, 소고기의 경우 90% 이상을 영국에 수출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르헨티나 철도 주식은 수많은 영국 소액 투자자들의 주요 자산이었고, 당시 아르헨티나 이외에 영국의 쇠고기 수요를 충족시킬 대안도 없었다. 이에 1933년 양국은 기존의 무역 관행을 지속하는 로카-런시만 조약(the Roca-Runciman Pact)을 맺었다. 즉, 영국은 소고기 수입을 지속하고, 아르헨티나는 영국산 제품의 관세를 대폭 인하하며 영국산 석탄은 무관세 혜택을 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로카-런시만 조약은 아르헨티나 사회의 주요한 정치적 갈등을 다시 촉발시켰다. 당시 엘리트계층은 산업화에 반대하고 영국과의 동맹 유지를 주장했다. 그러나 대중과 중산층은 로카-런시만 조약으로 인해 아르헨티나가 농업 국가로 한정되는 것이라며 반대하였다. 특히 아르헨티나의 제조업계의 반대가 거셌다. 이에 중산층과 노동자 계층을 중심으로 사회 전반에 반영국적 정서가 확대되었으며, 반외세적 민족주의가 확산되었다(Wright, 1974, 141-148). 이러한 반영국 정서는 자동차 시대의 도래 및 페론 대통령 시대의 철도 노조 사건 등으로 이어졌다. 즉, 19세기 말 20세기 초반까지는 철도와 관련하여 영국 자본과 엘리트가 주요 역할자였다면, 로카-런시만 조약 이후에는 아르헨티나의 노동운동 및 정치적 상황이 철도와 관련하여 주요 역할자로 등장하게 된다. 이에 관한 연구는 후속 연구에서 지속하고자 한다.

V. 요약 및 결론

본고에서는 근대화 시기 아르헨티나의 철도 건설 및 운영 과정에서 유발된 사회 갈등 관계를 영국계 철도 자본과 엘리트계층을 중심으로 살펴 보았다. 일반적으로 철도는 근대화의 과정에서 산업 발달을 촉진하여 경제를 확장시키고 사회의 모빌리티를 증가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러한 면에서 아르헨티나의 철도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외국자본에 의해 건설된 철도는 라틴아메리카 대부분의 국가에서 정치, 경제, 사회적 갈등의 원인이 되었으며, 아르헨티나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본고에서 아르헨티나의 철도의 건설 과정에서 영국계 자본 및 엘리트계층의 역할과 상호간의 관계가 오늘날 아르헨티나 경제, 정치, 사회 갈등의 구조를 형성한 과정을 분석하고자 하였다.

19세기 중반까지 빈곤한 농업국이었던 아르헨티나는 철도 건설을 통해 주요 농산물 수출국으로 변화하며 근대국가로서 성장하였다. 아르헨티나는 국가 수립 방식을 두고 연방파와 통합파로 분열되어 있었으며, 영토면에서는 원주민들과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었다. 연방정부는 철도 건설을 통해 국토 발전과 정치적 통합을 지향하였고, 사막 작전을 통해 원주민의 토지를 확보하였으며, 새로운 교통 중심지인 로사리오를 철도로 연결함으로써 통합된 근대 국가를 건설하였다. 당시 철도 건설은 주로 외국 자본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특히 영국 자본은 해외 철도 투자에 적극적이었다. 아르헨티나는 영국계 상인들이 주도하고 연방정부가 지원함으로써 철도 자본을 유치하였다. 영국 자본은 가장 수익성 좋은 주요 노선들을 건설하여 높은 수익을 거두었다. 또한 아르헨티나 정부의 특혜 속에 독점적 지위를 누렸는데, 운영 및 보수 부문도 영국의 기술, 자본, 인력이 주도하였다. 이러한 영국 자본에 대한 특혜는 아르헨티나 엘리트계층과의 결탁에 의한 것이었다. 대토지 소유 및 목축업에 기반한 엘리트계층은 농축산물 수출로 막대한 이익을 누렸다. 따라서 그들은 농축산물의 수출과 외국 자본의 지속적인 유치를 위해 국내 제조업의 발전을 막고 공산품의 수입을 지향하였다.

아르헨티나에는 영국계 자본 외에도 유럽계 이민자들도 농업 노동력으로서 유입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엘리트들에게는 경쟁자로 배척받았고 대중들에게는 사회문제의 근원으로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영국계 철도 자본에 대한 엘리트계층의 비호는 지속되었으나, 부실한 철도 운영과 국부 유출로 인해 대중들의 반외세 정서가 확산되었다. 이러한 반외세 정서는 과두정치의 종식으로 이어졌으나, 미국이라는 새로운 외세가 등장하고 영국이 보호 무역 정책으로 선회하자 새로운 집권 세력은 계속해서 양국간의 우호적인 무역 관계가 지속되길 원했다. 그러나 이는 아르헨티나 사회가 새로운 갈등의 국면으로 접어드는 전환점이 되었다.

오늘날, 아르헨티나는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자원으로 경제적 잠재력이 매우 높은 국가이나, 부의 편중이 매우 심하고, 화폐의 변동성이 매우 크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포풀리즘과 군사독재, 과두정치 등 극단적인 정치행태가 반복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불안정성의 원인으로 계급 이익에 몰두한 엘리트계층과, 자유무역체제 내에서 아르헨티나를 식량기지로 삼은 영국 자본의 제국주의적 속성으로 들었다. 즉, 독립 이후 200여 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국가들은 식민지배 시대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구도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가능한 것은 엘리트 계층과 외국 자본이 스페인이나 포르투갈과 역사적 제국주의의 역할을 대신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철도는 외국 자본이 라틴아메리카에 진출하는 주요한 통로가 되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철도가 그러한 역할을 하였지만, 멕시코를 비롯한 산유국이나 자원 채굴 국가들에서는 광산 개발도 유사한 역할을 하였다.

자원 수출 중심 경제에서는 채굴을 담당하는 외국 자본, 즉 선진국 자본과 엘리트 세력이 결탁하여, 국가 부의 유출과 불평등한 부의 분배, 그리고 독재정권의 집권 등이 나타나게 된다. 즉, 식민시대 유럽의 제국주의를 대신하여, 엘리트 계층이 외국 자본과 결탁하여 자원을 채굴하여 수출하고, 그 과정에서 대다수의 국민은 저임금에 열악한 노동 환경에 시달리며, 이러한 과정을 유지하기 위하여 엘리트들에 의한 독재정치가 등장하게 된다. 철도는 경제 발전과 국토 개발의 기초적인 인프라이지만, 19세기 외국 자본에 의해 건설된 아르헨티나 철도는 외국 자본이 유입되어 국가의 이익보다는 외국 자본과 엘리트계층의 이익을 추구하는 주요 수단이 되었다. 특히 외국 자본과 엘리트계층의 결탁은 서로간의 이익을 최대화하였으나 아르헨티나 경제가 제조업 동인을 상실하고, 과도한 비용을 부담하며, 영국 경제에 종속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20세기 말, 자원수출경제로 인하여 나타나는 외국 자본과 엘리트의 결탁, 그리고 이들과 국민들 간의 갈등의 상황은 채굴주의라는 용어로 비판받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철도는 물리적으로 ‘자원’ 그 자체는 아니었지만, 철도를 통해 국가의 부가 유출되었고, 그 과정에서 엘리트계층과 외국 자본은 각자의 이익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아르헨티나의 철도의 도입과 발전, 전개, 쇠락의 과정은 아르헨티나 근대국가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현대국가로의 전환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이 중 영국의 자본과 관련된 일부 내용만을 다루었다. 특히 시대적으로는 로카-런시만 조약까지만을 다루었는데, 이는 1930년대 아르헨티나가 새로운 사회적 국면으로 진입했기 때문이다. 철도를 대체하는 새로운 교통 수단으로 자동차가 등장하고, 사회적으로는 철도 및 제조업의 노동자들이 새로운 세력으로 떠올랐으며, 새로운 사회 세력간의 갈등을 이용한 페론 대통령이 집권하였다. 이 과정에서도 철도는 아르헨티나 사회 갈등의 주요한 주제였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이 시기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는데, 페로니즘과 관련해서는 정치학 부문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고, 이 시기에는 철도와 관련된 역할자들이 훨씬 다양해지고 복잡해지기 때문에 외국계 자본의 역할만으로는 해석하기 어려운 상황들이 다수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본 연구의 한계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향후 연구과제로 남겨 두고자 한다.

Acknowledgements

이 논문은 2023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23S1A5C2A02095568).

[2] 1) 소위 아르헨티나의 황금기라 일컫는 1880-1916년의 기간 동안 아르헨티나 철도망의 총 노선 길이도 2,233㎞에서 35,800㎞로 16배 증가하였고 동 기간 아르헨티나의 인구는 3배, 경제 규모는 9배 성장하였으며,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15.4%를 기록하였다.

[3] 2) 바나나 공화국(Banana Republic)이란 미국의 소설가 O. 헨리(O. Henry)가 󰡔양배추와 왕󰡕(Cabbages and Kings, 1904)이라는 소설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로,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고, 국가 경제가 바나나를 비롯한 한 두가지 농산물의 수출에 절대적으로 의존적이며, 부패한 독재자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나라를 비하하기 위해 사용한다. 중앙아메리카의 엘살바도르, 그레나다, 니카라과, 과테말라, 온두라스 등과 남아메리카의 과테말라, 콜롬비아 등이 이에 속한다. 이 지역에서는 철도 자본이 건설한 농기업이 정치, 경제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미국계 농기업의 내정 간섭은 과테말라 내전(1960-1996)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바나나 공화국이라는 용어는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신식민주의를 상징하는 용어이기도 하다(김희순, 2018).

[4] 3) 이는 식민시절 라플라타 부왕령 지역에서는 금・은이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에는 해적과 밀수꾼들이 활약하였고, 영국 등 스페인과 비우호적인 국가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양모 등 공산품을 판매하고 육류와 가죽을 구매하였다. 리오델라플라타 유역의 항구에서는 밀수업이 정규 교역량과 비슷할 정도로 대규모로 이루어졌고, 밀수업을 담당하는 끄리오요들, 즉 밀수업자들이 성장하였다. 한편 이 지역은 해안 지역에서 목축업을 하고 이의 수출을 통해 이윤을 얻는 목장주들이 경제력을 얻었다. 목장주들은 가죽을 수출하기 위해 자유무역을 선호했지만, 밀수업자들은 자유무역이 이루어질 경우 밀수업의 이윤이 하락하기에 자유무역을 반대하였다(조영실, 2011, 298).

[5] 4)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자원의 수출을 위해 상당히 철도 도입을 서둘렀다. 1837년 사탕수수 수출을 위해 쿠바의 아바나-베후칼(Bejucal) 간 철도(37㎞)가 개통된 이후 1840년대까지 멕시코, 자메이카 등의 중앙아메리카 및 카리브해 지역 농작물 수출을 위한 철도 시스템들이 구축되었고, 1850년대에는 페루와 칠레, 브라질 등이 광물과 커피 수출을 위해 철도 개통을 시작하였다.

[6] 5) 1820년 아르헨티나 정부는 팜파 원주민 집단 지도자 16명과 ‘미라플로레스평화조약(Tratado de Paz de Miraflores)’을 맺고 원주민 영토와의 경계를 정하고, 양측의 충돌을 막고자 하였다. 그러나 경계 지역의 원주민이 백인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1821-1823년 원주민 토벌을 위한 군사 작전이 실시되었다. 이후 팜파와 파타고니아 원주민 토벌 작전은 19세기 아르헨티나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했다(박수경, 2025, 120).

[7] 6) 이에 따르면 국회는 “국가의 번영, 모든 지역의 발전과 복지, 그리고 국민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수행할 권한을 가지며, 이를 위해 일반 교육과 대학 교육의 계획을 수립하고, 산업 진흥을 촉진하며, 이민, 철도 및 항행 가능한 운하 건설, 공공 토지의 개척, 새로운 산업의 도입 및 정착, 외국 자본의 도입을 법으로 보호하고,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시적인 특권과 보상 부여를 통해” 규정하고 있다(Wright, 1974, 16).

[8] 7) 예를 들어 1825년 이리호 노선의 경우 50주 이하의 소액 주주 3천여 명이 주식의 3/4 이상을 소유하고 있었다. 미국 기업들은 이러한 상황을 잘 이용하였다(Jenks, 1951, 379).

[9] 8) 금페소(peso oro sellado)는 1875년부터 금본위제에 의해 제작된 아르헨티나 화폐단위로, 페소푸에르테(peso fuerte)라고도 한다. 시기에 따라 다르나 금 1.5g에서 1.612g이 포함되었다.

[10] 9) 이러한 결과 1947년 영국 자본이 아르헨티나 정부에 철도 자본을 모두 매각할 당시의 대금 1억 5천만 파운드는 평가 기준이나 시장 평가에 기반한 것이 아니었으며, 이는 과대 평가되었다(Jenks, 1951, 386-387). 결과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에 육류 및 밀을 판매한 대금을 아르헨티나 정부는 영국계 자본이 소유하던 철도를 국유화하는데 대부분 소진하였으며, 이는 아르헨티나의 해외 자금의 대부분이었다. 50년 이상 신규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은 철도 부문에 대한 대규모 외환 지불로 인해 이후 아르헨티나 화폐 및 경제가 세계 자본 시장에서 불안정한 지위를 지니기 시작했다.

[11] 10) 1520-1522년 스페인에서 발생한 코무네로스(도시민)의 반란 이후 스페인 및 스페인 식민지는 상업이나 제조업의 발전보다는 토지 소유에 기반한 지대추구적 사회로 변화하였다. 당시 코무네로스의 반란은 도시민들이 왕정에 대해 경제적, 정치적 자율권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에 스페인 왕정은 코무네로스들을 진압하고 이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는 대신 왕정을 지지한 지주들에게는 토지세를 부과하지 않는 방식으로 포상을 하였다. 이후 스페인 사회에서는 대토지 소유주가 정치, 사회적으로도 높은 지위를 갖게 되었으며, 이는 식민지의 발전 방향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2] 11) 과두제 구성원들은 아르헨티나 사회의 최상위 계층으로, 교육 수준이 높고, 부유하며, 혼인 및 혈연 관계로 얽힌, 보수적인 집단이었고, 유럽 및 북미 사회를 추종하였다(Ashworth, 1978: 손혜현, 2025, 282에서 재인용).

[13] 12) 이민자의 유입은 1880년을 기점으로 연평균 1만 명 미만에서 연평균 6만4천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민이 절정을 이룬 1900년대 초반에는 연평균 11만 2천 명이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였고 가장 많은 인구가 이주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으로, 연간 20만 명 이상이 이주하였다. 이주민의 80~90%는 이탈리아와 스페인 출신이었으며, 러시아와 폴란드 출신의 유태인들도 포그롬 등의 억압을 피해 이주하였다(Rapport, 2013, 55: 손혜현, 2025, 286에서 재인용).

[14] 13) 그러나 실제로 국가는 철도 건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으며, 1886년에는 1,800㎞마일의 철도를 직접 소유하기도 했다(Wright, 1974, 60-61).

[15] 14) 일당 체제로 견제 세력이 없던 아르헨티나 정부는 상환 능력을 초과하는 해외 차관을 계약하였고, 부족한 금보유량에도 불구하고 지폐를 마구 찍어냈다. 또한 국내 경제에는 무분별한 투기로 토지 가격이 급등하였고, 수출농들은 수출대금은 파운드화로 받고 현지 비용은 아르헨티나 지폐로 지불했다. 이로 인해 1884년에서 1890년 사이 페소화 가치가 금 온스당 100에서 350으로 급락하였고, 해외 자본 시장에서 아르헨티나의 채권 및 채무 가치는 급락하였다(Wright, 1974, 62-63). 이는 오늘날에도 반복되는 아르헨티나 경제 상황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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