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1. 연구 배경과 목적
2. 관련 연구 동향
3. 연구 범위와 방법
II. 일제강점기 근대공원이 되지 못한 취운정
1. 왕실의 사회(射會) 장소에서 관인구락원(官人俱樂園)으로 변용된 취운정(翠雲亭)
2. 일제강점기 취운정의 공간 구성
3. 부지의 사유화에 따른 북부공원 조성 노력 소멸
III.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근대공원으로 변모한 삼청공원
1. 일제강점기 경성 남북의 공원 격차에 대한 이해관계
2. 삼청공원의 조성 과정
3. 삼청공원의 공간 특성과 이용행태
IV. 일제강점기 북부공원으로 본 근대공원 성립 조건
1. 북부공원의 성립과 해체에 대한 내재적 요인
2. 북부공원의 성립과 해체에 대한 외재적 요인
V. 결론
I. 서론
1. 연구 배경과 목적
공원 및 녹지는 근대도시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도시민에 있어서 보건과 휴양의 장소로서 없어서는 안 될 시설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보건・위생・방화・휴양・위락・운동을 위하여 녹화되고 시설된 곳이다(서울시, 1968). 근대화 과정에서 도시공원은 시민에 소중한 쉼터 역할을 수행하는 중요한 자산으로 인식되어 왔다. 개항 이후부터 해외 유학을 했던 지식인들은 공원의 효용성을 인지하고 있었고(우연주・배정한, 2011), 1897년 독립공원과 탑골공원의 조성으로 일부이기는 하지만 공원에 대한 경험이 존재했다(김해경, 2022). 공원의 효용성은 도시 위생과 환경에 영향을 준다고 인식하고 있었지만, 1895년에서 1903년까지 진행한 한성 도시 개조사업에서 적극적인 공원 조성은 없었다. 다만 기존의 좁고 불결한 도로들은 확장하여 위생적으로 정비했고, 도로를 점유한 건물은 법령을 근거로 철거하여 미적으로 개선했다(유치선・이수기, 2015).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에는 일본인 거류지 위주의 공간 구조가 정비되었다. 1920년대에도 공원은 도시계획의 중요 관점은 아니었다(김해경・박세린, 2023).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인 거류지와 인접한 경성 남부에는 다수의 공원이 조성되었다. 조선인이 주로 거주하는 경성 북부의 탑골공원은 규모가 작았고, 사직공원은 접근성이 불편하여 이용에 제약이 있었다. 이를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로 여기고, 취운정과 삼청동 계곡을 ‘북부공원’으로 통칭하며 지속적으로 공원 조성을 요구했다. 그 결과 삼청동 계곡만 1940년 3월 12일 자로 면적은 432,000㎡이며, 용도는 자연공원・보통공원・근린공원・아동공원인 제1호 법정공원이 되었다(서울시, 1968).
법적인 공원 지위를 확보하기 전부터 공원과 같은 이용을 보인 취운정과 삼청동 계곡은 지리적으로 인접하여 있어, 공원 조성 요구안에서 ‘북부공원’으로 통칭했다. 그러나 두 대상지의 시기별 공간구성과 이용행태, 공원 계획안과 조성 과정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보였다. 본 연구는 취운정과 삼청동 계곡을 대상으로 일제강점기 근대공원의 성립에 영향을 준 요인에 주목했다. 이는 근대공원이 동시대의 사회적 변화와 요구에 대응하면서 성립되었다는 실증적인 연구로서 의의를 지닌다.
2. 관련 연구 동향
일제강점기 경성 내 공원 연구는 크게 경성의 도시계획에서 공원의 역할, 개별 근대공원의 변천 과정에 집중한 연구로 구분할 수 있다. 염복규(2009)는 일제강점기 1920년대까지는 간선도로망 위주의 정비가 진행되었고, 1934년 경성시가지계획에서 공원계획이 등장했음을 밝혔다. 김영민・조세호(2019)는 1930년과 1934년 경성시가지계획안에 공원녹지계획이 포함된 후 1940년 법적인 공원계획안이 수립되었으나 대부분 실행되지 못했음을 도출했다. 경성의 각 개별공원은 남산공원, 탑골공원, 효창공원, 사직공원, 장충단공원, 아동공원인 앵정공원, 훈련원공원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박희성, 2015; 김해경, 2010: 김서린 등, 2014; 김해경・최현임, 2013; 안상민・石田潤一, 2014; 김해경・김영수, 2016). 각 공원의 상세한 공간구성과 변천이 분석되었지만, 취운정과 삼청공원은 간략하게 언급될 뿐 취운정의 공원 기능 소멸 과정과 삼청공원의 지속성 확보에 대한 분석은 진행되지 않았다.
3. 연구 범위와 방법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 취운정과 삼청동 계곡 일대의 공간적 변화와 특징을 살펴보고 식민지라는 특수한 사회적 배경에서 근대공원 성립에 대한 일련의 과정을 분석했다. 공간적 변화를 확인하기 위하여 1912년 지적도를 통해서 소유주를 확인하였으며, 거시적인 변화는 1915년, 1932년, 1942년 지도를 통해서 변화를 확인했다. 더불어 당시 사회적 배경은 신문기사와 잡지의 내용분석을 통해서 전반적인 공원에 대한 인식을 도출했다. 일제강점기 발간된 엽서와 도면과 같은 도상자료는 공간적 변화의 정합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활용했다. 이를 통해서 각 대상지의 공간적 특성과 이용행태, 경성 남북의 공원 격차에 대한 이해관계, 근대공원의 성립조건에 영향을 준 요인을 도출했다.
II. 일제강점기 근대공원이 되지 못한 취운정
1. 왕실의 사회(射會) 장소에서 관인구락원(官人俱樂園)으로 변용된 취운정(翠雲亭)
취운정에서 ‘亭’은 정자를 지칭하는 일반적 명칭이나, 김세민(2016)의 연구에서 정자가 아닌 일대의 지명이라고 밝혔다. 취운정으로 통칭하는 일대에서 삼청동 측은 백록동으로, 창덕궁 측은 취운정으로 구분했다(≪대한매일신보≫1910.4.24).
1900년 이전 취운정의 쓰임은 왕실이 종묘에서 태화궁으로 행행(行幸)할 때 거둥(擧動)하는 동선이었고, 1884년 갑신정변 때 김옥균과 심상훈의 회의 장소였으며, 유길준이 『서유견문』을 탈고한 곳이었다(≪동아일보≫1928.8.5). 당시로부터 80여 년 전 순종의 장인인 표정(杓庭) 민태호(閔台鎬)가 취운정 정자, 사모정 정자, 백락동 정자를 지었고, 대원군 첩인 백락동마님이 잠시 머물렀다고 했다(≪동아일보≫1924.6.28). 이는 취운정 일대가 거주 및 휴식이 가능한 공간 구성임을 보여준다.
1908년에는 의친왕궁(義親王宮)의 기지로 취운정 일대가 하사되었는데(≪대한매일신보≫1908.4.28), 실질적인 이용은 왕실의 활터였다. 조선시대 활쏘기는 육례(六藝) 중 하나이며, 임금과 종친이 갖춰야 할 덕목이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민간 활터가 활성화되어 편사(便射)라는 세시풍속이 등장할 정도였다(조성균・곽정현, 2016). 1908년 6월부터 흥선대원군 손자인 영선군 이준용이 취운정에서 활쏘기 연습(≪대한매일신보≫1908.6.23)을 했으며, 의친왕 이강은 취운정에서 활을 쏘다가 지나가는 아이에게 상해를 입히기도 했다(≪대한매일신보≫1908.6.24). 이후에도 활쏘기 장소로의 이용은 자주 등장했다(≪대한매일신보≫1908.7.1, ≪대한매일신보≫1908.7.7, ≪대한매일신보≫1908.8.5)(그림 1c 참조).
1909년에는 관인구락원의 이용을 목적으로 건물 신축이 결정되었고, 비용은 20,000원이 계상되었다. 구락원 설립 발기인은 완흥군 이재면과 총리대신 이완용, 내무대신 박제순, 중추원의장 김윤식이었다(≪대한매일신보≫1909.6.1). 1915년으로 추정되는 북촌 일대 사진을 보면 주변의 일반 가옥보다 규모가 큰 저택이 확인된다(그림 2b 참조). 가회동 33번지는 1931년 동일은행을 창설한 민대식 자작, 가회동 31번지는 이재완 후작, 가회동 11번지는 한창수 남작, 가회동 95번지는 한상룡 남작의 주거지로 일부는 발기인에 속한다. 1910년도에는 경복궁 내 진전(眞殿)을 매득(買得)하여 궁궐 재목을 가옥 신축에 활용했다는 기사 내용(≪대한매일신보≫1910.7.5)으로 그들의 당시 권력이 유추된다.
건물공사 과정은 건물지를 표식하기 위해 표목을 설치했고(≪대한매일신보≫1909.5.20), 취운정 내부에 살고 있었던 기존 주민 50여 명을 이주시켰다(≪황성신문≫1909.5.25). 1909년 9월에는 건물 공사에 착수했고(≪황성신문≫1909.9.30), 10월부터 연회를 설행했다는 것으로 공간 구성 완비가 확인된다(≪대한매일신보≫1909.10.26). 관인구락원은 한성구락원으로도 불렸으며, 왕실 일원의 상견례, 신문사 임원들의 청요연(請邀宴), 장관과 외국 고등관의 원유회(園遊會), 일본인 친위대 사단장 환송회, 대신들의 유람장소, 총리대신 비밀회동 장소이자, 대한제국 관료들의 다화회(茶話會), 오찬회(午饌會), 만찬회(晩饌會), 만각회(晩覺會), 음악회, 파노회(披露會) 공간으로 이용되었다.
1910년 재동의 한 인물이 구락원을 방문하려고 하자, 수직(守直)이 막아섰는데(≪대한매일신보≫1910.4.24), 이는 왕족과 귀족 중심 이용으로 일반인 입장을 제약했다. 그해 5월에는 취운정 내부 관람을 위한 입장권을 발매하기도 했다(≪대한매일신보≫1910.5.4). 이는 취운정의 출입과 이용에서 제약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2. 일제강점기 취운정의 공간 구성
일제강점이 시작된 후 지형도와 지적도, 신문 기사의 사진을 통해서 취운정 일대의 초기 지형과 건물 일부의 형태가 확인된다. 1912년의 토지대장을 보면 가회동 1번지 2,097㎡, 2번지 127㎡, 3번지 1,348㎡는 소유주가 박영효이다(그림 3a 참조).
1915년 지도에서 가회동 1번지・2번지・3번지는 철책으로 둘러싸여 일정 영역을 형성하며, 진입부는 담장과 진입문을 구축했다. 철책 안은 타원형 동선이 순환하며, 능선 정상부에는 사모정과 좌측 산책로에는 제법 규모가 큰 건물이 있다. 지형도 기호에서 주변 산림은 침엽수, 진입부는 활엽수이다(그림 2a 참조).
취운정 내부 건물은 정확한 규격과 형태는 찾을 수 없지만, 그림 1c의 활터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 좌측에 양옥 건물이 등장한다. 기단부가 화강석과 벽돌을 조적한 외장에 테라스의 난간이 있는 건물이다. 1914년 국유림 경계도를 보면 취운정 일대에는 국유림이 없다. 좌측 건물의 평면이 묘사되어 있으며, ‘취운정’으로 표기되어 있다(그림 3b 참조). 이는 취운정 일대 뿐만 아니라 양옥 건물 자체를 취운정으로 불렀음을 반증한다. 시기별 각 지도를 보면 중심부 최상단 높은 지점에 사모정이 입지한다(그림 4 참조). 사모정 좌측에 대형목이 녹음을 형성하고, 마루가 있어 방문객의 휴식을 유도하며, 높은 지대의 입지로 주변 조망이 가능하게 했다(그림 3c 참조).
1920년에 취운정 양옥은 조선총독부 소유에서 조선귀족회로 이전되었고, 그해 11월 5일 윤익선의 ‘경성도서관’으로 변모했다. 야마구치 세이(山口 精)가 운영하던 경성도서관의 장서를 구입하고 기증받아서 취운정 건물을 도서관으로 구축한 것이다(그림 4a 참조). 경성도서관은 1920년 11월 27일 다양한 계층의 축하를 받으면서 개관했으나 곧 경영난에 빠졌다. 1922년 9월 탑골공원의 좌측에 위치한 이범승의 경성도서관에 흡수되어 ‘경성도서관 취운정 분관’이 되었다. 결국 1923년 7월 1일 폐관했고, 소장하던 1만여 권의 장서는 1924년 4월 간도 동흥중학교로 옮겼다(송승섭, 2020). 경성도서관의 역할이 끝나자, 일대는 일본인 노구치 시타가우(野口遵), 1929년에는 윤치장을 비롯한 해평 윤씨 등에게 매각되어 토지분할이 진행되었다(그림 4c 참조).
취운정 입구 약수터에는 ‘淸麟洞天’이라는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다(≪동아일보≫1924.6.28, 그림 2c와 그림 5b 참조). 바위글씨가 누구의 글씨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동천이란 명명은 그 장소를 이상향이자 선경(仙景)으로 여겼을 만큼(이혁종, 2009) 경치가 뛰어난 공간임을 보여주는 지표였다.
3. 부지의 사유화에 따른 북부공원 조성 노력 소멸
1921년에는 경성도서관의 이전 계획과 함께 경성부에서는 취운정의 공원 조성을 위한 조사를 실시했다(≪동아일보≫1921.12.27). 당시 경성 북부에는 탑골공원만 있었고, 효창원과 사직단의 공원 조성이 결정되었다. 취운정은 경성부 소유 대지의 대부가 확정되어야 공원으로 조성한다고 밝혔다(≪동아일보≫1921.10.27). 1922년에는 취운정은 풍광과 자연 조건이 좋아서 많은 공원설비가 필요하지 않다고 역설했다. 더불어 공원이 부족한 북부 거주자의 산보와 휴식의 장소였다. 기사에 등장하는 구체적인 이용행태는 젊은 학생들의 조기 운동장, 웅변 또는 성악을 익히는 곳, 복중 더위를 피하는 장소, 북부 일대 중노년의 피서를 겸한 장기와 바둑을 두는 오락장, 계곡은 부인들의 세탁장이었다. 활발한 이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925년에는 맹현(孟峴) 부지의 돌을 채석하기 위한 폭파 허가를 발표하자 조선인들의 극심한 반대가 있었다(≪동아일보≫1925.10.28).
경성부는 조선인의 불만이 제기될 때마다 측량과 조사를 한다고 발표했고, 산보를 위한 산책로, 휴식의자, 정구장 같은 운동공간을 설치한다고 했다(≪동아일보≫1922.1.17). 그러나 1920년대 후반이 될 때까지 공원 조성계획에 대한 별다른 내용은 등장하지 않는다.
공원 조성 의지와 실천이 가시화되지 않자, 1926년에는 윤익선과 조철희를 중심으로 가회동 취운정을 공원으로 만들고자 기성회를 조직했다(≪동아일보≫1926.2.23). 기성회 명칭은 ‘북부공원기성회’였다. 북촌에서 가까운 공간에 공원 조성 촉구를 요구하며, 부당국에 진정하기로 했다. 당시 주소유주인 조선귀족회와 협상이 결렬될 경우 시민대회를 열어 운동으로 확산시킬 계획을 세웠다(≪조선일보≫1926.2.25). 이들의 반대를 예상하여 3월에는 경성부 내무과장이 일대를 시찰했고(≪조선일보≫1926.3.21), 일부 국유지의 공원 불하가 가능하다고 발표했다(≪매일신보≫1926.3.24).
공원화 계획은 지속적으로 발표되었지만, 실질적인 공원 조성의 실천은 없었다. 1927년에 삼청동 일대의 공원계획이 결정되자, 그다음 해 자금이 부족했던 조선귀족회는 취운정 부지를 평당 8원, 전체 약 100,000원 금액으로 일본인에게 팔았다(≪동아일보≫1928.8.6). 결국 1928년에 취운정 부지는 일부 터의 개인 사유화와 매각으로 기존에 구축된 부지의 영역성은 깨지고, 북부공원 조성 계획은 멸실되었다.
III.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근대공원으로 변모한 삼청공원
1. 일제강점기 경성 남북의 공원 격차에 대한 이해관계
1920년대 경성 남부는 규모가 크고 녹음이 풍부한 남산공원과 장충단공원으로 일본인의 편의와 휴식을 도모했다. 1928년 『경성부도시계획조사서』에서 당시 공원과 공원 예정지역을 보면 공원을 표시하는 초록색 공간이 남부에 집중되어 있음이 확인된다(그림 6 참조). 북부에 있는 공원 중 탑골공원은 3.1운동 이후 변소 등 시설물이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으며(≪조선일보≫1926.11.12), 사직공원은 교통이 불편하고, 창경원은 입장료와 야간 이용 금지(≪동아일보≫1929.6.27)로 공원 이용의 불편을 당시 미디어를 활용하여 표출했다. 공원 부족에 대한 대응으로 조선의 왕실공간인 종묘(≪동아일보≫1929.6.28)와 덕수궁 등을 공원으로 개방하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조선일보≫1931.5.17). 경성부는 부족한 공원 혜택을 해소하기 위해서 삼청동 일대 국유림 약 20여만 평을 공원 후보지로 발표하면서, 탑골공원은 폐지할 예정이라는 모순된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동아일보≫1927.11.9).
조선인 거주지의 공원 부족은 잡지의 논설에도 자주 등장했다. 1926년 잡지 내용은 기사를 보면 남부와 북부의 공원 혜택의 차이, 취운정과 삼청동의 공원 가능성과 장점, 공원 개방의 필요성을 서술하고 있다(≪개벽≫(68).1926.4.1).
북부공원 설치 문제, 조선의 수도로 30만 시민이 산다는 경성에는 공원 명색이 그래도 4-5개소가 있다. 남에 즉, 일본인 중심 지대에는 남산공원, 장충단공원, 용산의 효창원공원을 합하여 3개소가 있고,서에는 사직단공원(미성품)이 있고, 중앙에는 손바닥만한 「빠고다」공원이 있슬 뿐이고(기미년 이후 반신불수 격으로 있다가 그 폐지설 전한다). 조선인이 절대 다수로 거주하는 북부 일대에는 공원라고는 명색부터 없다. 공원 그것으로 하여 우리가 더 잘 살 것도 없고 더 못 살 것도 없지만 그래도 같은 값이면 조선인촌에도 공원을 하나 둠이 어떨까. 차에 동감한 북부의 인사들은 공원 설치 의견을 발하여 경성부 당국에 진정하는 동시에 널리 여론을 환기하는 중에 있다. 삼청동의 천연공원이나 취운정의 자연미는 인조 이상으로 많은 이에게 많은 위안을 주어 왔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오인의 낙지(樂地)로 알겠느냐. 아니다. 국유림이요 귀족의 소유이다. 불원한 장래에 족적을 접근치 못하게 될 듯도 하다. 이 기회에 있어 그것을 만인 공락지(公樂地)인 공원화를 시킬 것은 재언할 필요도 없다. 귀족들에게 묻는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 취운정을 만인공망의 공원지로 개방함이 어떠한가. 부당국에게 질문한다. 북부인민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 봄이 어떠한가. 실상은 공원 그것이 그닥 시급한 문제는 아니겠지. 그러나 같은 값이면 북부에도 공원 하나 두는 것도 좋겠단 말이다.
1930년대 경성에서는 일본인의 남부와 조선인의 북부의 식재 계획에서도 구분을 두었다. 경성부 사회과에서는 공원의 식수 5개년 계획으로 효창원・사직공원・남산공원・탑동공원・삼청동공원에 수목 36,000주를 계획했다. 남부의 장충단공원과 남산공원에는 벚나무, 효창공원과 탑동공원에는 자작나무(백단, 白椴)와 오리나무(한노기, 榛の木), 삼청공원에는 단풍나무(홍엽수, 紅葉樹)를 계획했다(≪동아일보≫1935.3.9). 계획된 수목을 살펴보면 사계절이 뚜렷한 경성에서 나무가 지닌 꽃과 잎, 수피의 색채와 특성으로 경성 남부와 북부를 구분했다.
1924년에서 1938년까지 경성부 지출을 보면 공원에 대한 주목도가 확인된다. 1924년에는 탑골공원에 예산을 집행하지 않았고, 장충단・사직단・효창공원・남산공원에 집중했다. 1929년에는 탑골공원에 500원, 1933년에는 장충단공원에 20,255원, 1935년에 이르러서야 삼청공원에 5,844원을 집행했다.
1936년 3월 21일 기사를 보면 경기도 산림과에서 조선신궁을 비롯한 유원지와 공원에 새장 300개 설치를 계획했다. 카나리아를 비롯한 각종 새의 아름다운 소리를 방문객과 이용객에게 들려주기 위함이었다. 남산공원・장충단공원・사직공원・효창원의 나뭇가지에 새장을 걸고 공원 감시인이 키우도록 했다. 그러나 북부 유일의 유원지인 삼청공원에는 새장을 걸지 않아서 주민의 불평이 있었다(≪조선중앙일보≫1936.6.19).
살펴본 바와 같이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거주지인 북부에는 공원이 부족하다는 인식이 만연했지만, 실질적인 공원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실천은 부족했다. 더군다나 경성부의 예산 집행 금액과 실질적인 구성요소 제공에도 차이를 보였고, 수목 식재 계획조차 일본인 거주지와 조선인 거주지 구분의 매개체로 활용했다.
2. 삼청공원의 조성 과정
1920년대 경성부의 도시계획 지도를 보면 삼청동이 공원으로 지정된 배경이 일부 확인된다. 경복궁과 경희궁 일대는 관유지이며, 사직단은 부유지, 창덕궁과 창경원은 이왕직 소유지이며 삼청동 계곡이 있는 부지는 국유임야이다(그림 7 참조).
경성의 조선인 거주지에서 공원 부족의 대안으로 등장하는 명칭은 ‘북부’공원이다. 조선시대부터 유래한 행정명인 ‘북부’는 일대를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1928년 8월에 경성부 내무과에서는 삼청동 일대 100,000평을 대공원으로 계획하여 무상대여 받기 위한 설계안을 총독부에 보고했다. 설계안을 보면 자동차가 삼청동 입구와 취운정에도 통행이 가능하도록 도로를 조성하며, 삼청동에는 회유도로와 휴게시설인 정자, 조명 등을 계획한 삽도를 첨부했다. 삽도를 보면 세균검사실 후면부에는 동덕여학교 청원지, 취운정 우측부에는 중앙학교 청원지가 입지하여 공원부지의 일체성을 저해하고 있다(그림 5a 참조). 그러나 1920년 쯤에는 동덕여학교와 중앙학교가 불하 청원의 해결이 불투명하여 공원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으로 예상했다. 경성부에서는 선행된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공원을 허가하고 구체적인 설계를 진행한다고 발표했다.
1928년 10월에는 사직단 69,000평, 남산 84,000평, 탑동 2,500평, 효창원 28,000평, 삼청동 111,000평을 확보하고 있어 일본 각 도시보다 공원 면적이 넓은 유원(遊園)도시라고 했다(≪동아일보≫1928.10.5). 그러나 이는 접근성 불편과 산지라는 지형 특성을 무시한 수치로 조선총독부가 진행한 공원 행정의 당위성을 위해서 면적만을 지표로 삼은 결과였다.
삼청동이 공원의 적지로 선정된 배경은 1931년 신문기사를 통해서 확인된다. 예로부터 산청(山淸), 기청(氣淸), 수청(水淸)으로 불렸던 삼청동은 인구가 조밀한 경성 시가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이었다(≪동아일보≫1931.1.17). 삼청동 일대는 대부분이 국유림으로 1931년 1월에 불하원을 총독부에 제출했고, 허가가 나오면 약 5,000원의 예산으로 공사를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1932년에 이르러서야 당초 계획보다 감소한 국유지 50,000평을 삼청동 부립공원 예산으로 계상했다(≪동아일보≫1932.12.11). 1933년 4월에는 17,000원으로 기공식을 진행했다(≪조선일보≫1933.2.28). 그해 10월이 되도록 총독부의 허가는 없었고(≪동아일보≫1933.10.26), 1934년 5월이 되어서야 공원이 완성되었다.
3. 삼청공원의 공간 특성과 이용행태
삼청공원의 공간구성 중 큰 특징은 계곡에 수영장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1931년 기사를 보면 팔판동의 김용설(金容楔)과 삼청동의 사이조 쿠라조오(齋藏倉藏) 등 15명이 ‘뻬비, 풀(Baby pool)’을 설치하고자 경성부에 계획서를 제출했고, 허가가 났다. 삼청천의 지류를 막고 상부에 저수지 2개소를 만들어 총면적 1,110평, 길이 50m, 폭 13m, 수심 6척의 유영장(遊泳場)이었다 (≪동아일보≫1931.7.19). 그러나 풀장 주변의 주민들은 원성을 자아냈다. 수영장이 상류에 위치하여 하류에서는 빨래터를 잃게 되었고, 장마철에는 풀장이 빈번하게 파손되는 문제 때문이었다(≪조선일보≫1931.9.7).
수영장 위치는 그림 8의 사진과 지도를 보면 계곡이 모이는 합류처를 막아서 만든 Y자형이다. 1935년에는 풀장 주변에 대규모 광고판을 설치하여 주변 풍광을 해친다는 기사가 등장한다(≪동아일보≫1935.7.19). 광고판 설치는 영리 목적으로 풀장 이용자들이 매우 많아서 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공공 목적에 걸맞지 않은 시설임을 명기했다.
기사에 등장하는 삼청공원의 이용행태는 사주쟁이, 배부른 남녀의 밀회장소, 유산한 사람들의 산보소로 묘사했다. 이는 경성 북부의 공원에는 근대 도시문화를 보여주는 행태보다는 산속 외진 곳의 부정적인 공간으로의 인식을 보여준다.
삼청공원은 삼림형 공원으로 풀장 조성 외에 큰 변화가 없었다. 1929년 삼청공원 공간계획도를 살펴보면 풀장으로 사용된 장소는 ‘池’로 표현되었고, 각 2간의 산책로가 순환로를 형성하고 있다. 각 산책로에는 사각정자가 표기되어 있고, 정구장을 포함한 운동장을 계획했다(그림 9b 참조). 1930년 9월에는 삼청공원을 대산림공원으로 중앙에 운동장, 테니스 코트를 두며 산책로에는 소나무와 단풍나무 식재를 계획했다(≪매일신보≫1930.9.1). 이외에도 경성부 직원들이 매년 4월 3일에 신무천황 제일을 기념한 식수행사를 진행했다(≪조선신문≫1935.4.8).
1915년 지도에서 1934년 지도까지 보이는 변화는 한양도성 암문과 연결되는 소로 외에 별다른 사항이 없었다. 1931년에는 개인에 의해서 삼청동 일대에 산상도로인 삼간통 350간 연장의 신작로가 계획되었다. 1937년에 삼청공원에서 세균검사실, 사가정 의학전문학교까지 이르는 폭 7m, 길이 780m인 주유도로 부설을 결정했다(≪동아일보≫1937.6.13). 1942년 지도를 보면 풀장 주변과 과거 취운정이 있었던 지역을 가로질러 가회동을 지나 제동으로 이어진 도로와 연결되어 순환도로를 구축했다(그림 9c 참조).
1940년이 되자 1943년까지 4개년 계획으로 천연공원에 인공을 가미하여 부민의 보건 증진과 관광을 위한 공원 정비를 계획했다. 7,500원의 예산으로 산보로, 임간광장, 교량, 걸상, 표찰 등을 세우기로 했다(≪매일신보≫1940.2.1). 이후 삼청공원의 시설 설치보다는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도로계획과 버스를 운행한다는 내용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삼청동 계곡이 지닌 자연 요소를 활용했을 뿐 운동 공간과 같은 적극적인 공간 도입은 부족했다.
IV. 일제강점기 북부공원으로 본 근대공원 성립 조건
선행연구에 의하면 1876년 개항을 기점으로 공원에 대한 인식이 생성되었으며, 외국의 근대 문물을 시찰한 후 기록으로 남겼던 수신사의 『수신사기록』, 해외 유학생들의 견문 기록 중 유길준의 『서유견문』과 윤치호의 『윤치호일기』에서 공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음을 확인했다(우연주・배정한, 2011). 일제강점이 시작되자 경성 남부의 일본인 거주지 부근에 공원이 집중되었고, 공원 격차를 차별로 인식하는 조선인의 불만이 표출되었다. 이때 북부공원으로 거론된 취운정과 삼청동 일대가 공원의 성립과 해체 과정에 다층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이를 내재적 요인과 외재적 요인으로 구분하여 분석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북부공원의 성립과 해체에 대한 내재적 요인
일제강점기에 취운정과 삼청동 일대가 공원으로 변모하기 위해서 작용한 내재적 요인을 살펴보면 각 대지의 소유자와 입지특성, 그리고 영역을 표시하는 공간기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취운정의 경우 1912년 일부 부지의 소유자는 박영효였다. 이에 반해 삼청동계곡은 국유임야였다. 공원 조성 예정지로 거론되는 대상지에서 개인 소유자가 있다는 것은 공원 조성비용과 기간에서 밀접한 상관성을 보인다. 일제강점기 동안 북부의 조선인 거주지에는 경성부의 예산 집행이 저조했다. 공공을 위한 명목성을 지녔더라도 사유지의 매입은 공원 조성의 초기 비용을 상승시킨다. 이때 식민지 시기이기는 하나 소유주의 의지에 따라서 매매 시기가 정해질 때는 조성 기간에도 영향을 준다.
각 공간의 입지특성은 북악산 자락 맹현 능선의 취운정과 삼청동 계곡으로 구분된다. 취운정 일대는 능선으로 위요된 형태이며, 능선을 따라서 산책로가 형성되어 있다. 능선 좌측부에는 도서관으로 이용된 양옥건물이 있고, 그 전면은 활터로 이용되었다. 가장 높은 지점에는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사모정이 있고, 입구의 약수터에는 ‘청린동천’이라는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어 풍광의 우수함을 보여준다. 삼청동 계곡은 산책을 위한 별다른 동선이 없었고, 한양도성 암문을 통해 성북동과 연결된 실용적인 동선만 있었다. 당시 근대공원에 대한 인식은 여가・휴식・위생과 보건을 위한 공간으로 경관을 도보로 향유하는 산책로, 휴식을 위한 의자와 정자 그리고 운동공간을 요구했다. 북부공원이 등장할 시기의 취운정은 산책로와 사모정 등 공원에서 휴게시설에 해당하는 시설물이 있었고, 삼청동천은 자연형태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공간 영역성(Territoriality)을 보면 취운정에는 구조물인 진입문을 통해서 입장할 수 있었다. 현대에서 통용되는 ‘게이티드 커뮤니티(Gated Community)’ 역할이다. 이는 현대 주거단지 입구에 게이트와 이를 통제하는 게이트 컨트롤 시스템, 그리고 단지 주변의 담장으로 폐쇄적인 영역성을 제공하는 커뮤니티(김석경, 2007)를 말한다. 취운정은 진입문과 주변에 둘러진 철책 경계가 게이티드 커뮤니티 역할로 특정 계급만 드나들 수 있거나 입장에 제약이 있음을 알려주는 가시적인 역할을 했다. 이와 달리 삼청동계곡은 누구나 쉽게 드나들 수 있으며, 특별한 경계가 없기 때문에 일정한 영역성을 확보하거나 진입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이처럼 각 부지가 지닌 내재적 요인 중 취운정은 공원 이용이 가능한 시설물이 구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 소유지와 진입문의 제약이 공원으로 발전하지 못한 부정적인 요인이었다. 이에 반해 삼청동 계곡은 경계가 없고 국유지가 대부분인 부지 특성으로 공원시설이 부족하지만,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삼청공원이 성립하게 되었다.
2. 북부공원의 성립과 해체에 대한 외재적 요인
일제강점기 취운정과 삼청동 일대가 공원으로 변모하기 위해서 작용한 외재적 요인을 살펴보면 접근성과 이용행태, 그리고 관의 조성의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접근성은 일제강점기에 등장한 교통수단의 정차장으로 확인할 수 있다. 광화문통에 전차가 도입된 것은 1916년 총독부의 신청사 건설공사를 위해서이며, 1920년에 이르러서 창경원선, 광화문통 노선이 개통되었다. 1928년 버스사업에 대한 계획안을 공개한 후 그해 4월에 경성부 버스가 운행되었다(최인영, 2014). 교통수단을 활용한 접근성에서 취운정은 부영버스의 제동정류장에서 정차하며, 삼청동 계곡은 전차와 부영버스의 의전병원 입구 정류장에서 정차한 후 삼청동천과 병렬로 배치된 길을 통해서 접근한다. 각 부지의 주진입부에서 취운정은 조선귀족회 고관대작의 주거지를 지나야 하며, 삼청공원은 경복궁 우측 길을 통해서 도보로 접근한다(그림 10 참조).
법적인 공원이 발효되기 전 이용행태를 보면 취운정은 특정 계급의 유희인 원유회, 다화회, 음악회, 고관대작의 환송회 장소였다. 특정인이 입구에서 입장을 제한하거나 일정 기간동안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유료공간이었다. 부지의 활터 이용은 안전상으로도 접근에 부정적인 요소였다. 삼청동 계곡의 이용은 대부분 계곡 능선을 따라서 산보와 휴식을 취하는 행태였다. 1931년 계곡을 막아서 풀장을 조성하여 여름철 이용이 매우 활발했지만, 산속의 외진 곳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공존했다.
경성부의 조성 의지에서 취운정 일대는 지속적인 공원 설치에 대한 조사와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는 경성 북부에 사는 조선인들의 민원 해결을 위한 조치였을 뿐 실질적인 공원 조성 노력에 대한 실천은 부족했다. 삼청공원 또한 예산 배정이 부족했지만, 1930년에 대삼림공원으로 계획되었고, 1931년 회유도로와 풀장을 개설 후 1934년에 이르러서야 공원이 완성되었다. 이는 삼청공원에 특별한 공원시설을 도입하지 않았지만, 공원이 된 면적은 경성의 공원 비중을 높이는 역할이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의 공원 혜택으로 홍보하여 식민지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이처럼 경성 내 교통수단을 통한 접근성이 좋은 취운정은 공원이 되지 못했고, 삼청동 계곡은 공원으로 발전했다. 삼청공원으로 조성된 후 새로운 접근성을 위한 교통 발달의 촉진제 역할을 담당했다. 취운정의 조선귀족회 등과 같은 특정 계급을 위한 이용행태는 공원 조성의 저해요인으로 작용했으며, 전면에 입지한 그들의 주거지 또한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요인이 되었다. 이에 비해 삼청동은 교통은 불편했지만, 별다른 제약 없음이 다양한 계층의 이용을 촉진시켰다. 공원 이용은 휴식과 산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취운정에서 진행된 행사들은 조선귀족회처럼 특정 계층의 이용이었다. 근대공원의 성립과 해체에서 공공성과 대중성으로 대표되는 공원 특성상 공간의 제한적 이용과 개방성을 확보하지 못했을 경우가 부정적인 외재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V. 결론
일제강점기 취운정과 삼청동 계곡 일대는 ‘북부공원’이라는 명칭으로 통칭하며 공원 조성을 위한 노력을 진행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라는 사회적 배경에서 취운정은 근대공원이 되지 못했고, 삼청동 계곡은 1940년 제1호 법적 공원의 지위를 확보했다. 이에 본 연구에서 취운정과 삼청동 계곡의 공간적 변화와 특징을 살펴보고, 당시의 시대상이 반영된 공원 조성 과정을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취운정은 정자만이 아닌 일대를 포함하는 지명이었다. 취운정 일대가 의친왕궁 기지로 하사되면서 왕실과 관련된 활터 장소로 이용되었다. 1909년에 관인구락원으로 이용하기 위한 건물 확장공사가 있었고, 이후 일반인 출입은 제한되며 고관대작의 위락공간으로 이용되었다.
둘째, 1920년에는 취운정 내 양옥건물이 경성도서관으로 이용되었다. 도서관 폐관 후 공원화와 관련된 계획과 조사가 발표되었다. 북부공원기성회를 조직하여 공원 조성 노력을 진행했으나 1928년 부지가 매각되면서 공원화 계획은 멸실되었다.
셋째, 1920년 이후 경성에서 일본인 거류민이 많은 남쪽에는 공원을 쉽게 접할 수 있으며, 조선인 거류민이 많은 북쪽에는 공원이 부족하다는 불만이 표출되었다. 공원 내 식재 계획과 공원 이용 편리성을 증진하는 시설물 지원에도 남쪽과 북쪽을 구분하여 지원했다.
넷째, 삼청동 계곡은 삼림형 공원으로 1929년 발표하였고, 1934년 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계곡을 따라 풀장을 조성한 것이 가장 큰 공간적 특징으로 경성부의 남부와 비교할 경우 적은 예산이 지원되었다. 그러나 1940년 경성부도시계획에 의한 제1호 공원으로 법적인 지위를 확보했다.
다섯째, 일제강점기 근대공원 성립에 영향을 준 내재적 요인을 살펴보면 소유자, 입지특성, 영역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취운정은 개인 사유지가 많았고, 공원 시설물이 갖춰져 있었으나, 일반인 출입의 제약이 존재했다. 삼청동 계곡은 국유임야이며, 공원 시설물은 부족했고, 누구나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었다.
여섯째, 일제강점기 근대공원 성립에 영향을 준 외재적 요인을 살펴보면 접근성, 이용행태, 관의 조성의지로 구분된다. 취운정은 부영버스로 접근이 용이했지만, 왕실과 관료의 위락공간으로 이용되었고, 공원을 위한 조사 및 계획이 지속적으로 발표되었으나 실질적인 공원 조성 노력은 없었다. 삼청동 계곡은 전차와 부영버스 정류장에서 내린 후 도보로 이동하는 불편이 있으며, 여름철 풀장과 산보지로 이용률이 높았다. 삼청동 계곡은 예산 확보와 식수계획 발표와 같은 공원 조성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으며 총독부 소유지를 대부받아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본 연구는 근대공원의 발생 배경에 대한 역사적 연원을 살펴본 것으로 일제강점기 근대공원의 조성 노력에 다양한 층위가 작용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의의를 지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