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II. 일제강점기 평양의 근대공원 태동
1. 일제강점기 평양의 도시계획과 공원
2. 평양의 첫 근대공원, 서기산공원
3. 평양의 대표공원, 모란대공원
III. 일제강점기 평양 근대공원의 확장
1. 전쟁의 기억과 경제 발전 현시: 선교리 공원
2. 평양성의 진입부에서 공원으로: 대동문공원
3. 도시구조와 연계된 형태의 공원: 삼각공원, 류정공원
4. 공원이 되지 못한 명승: 자혜병원과 만수대
IV. 일제강점기 평양 근대공원이 구축한 특성과 도시문화
1. 일본 전적지 기억 장소의 공원화와 명소화
2. 근대의 현시와 조선 전통의 대상화
3. 일본인 공원과 조선인 공원의 차별
4. 사유화된 상업시설과 공원의 공간 충돌
V. 결론
I. 서론
일제강점기에 실행된 국토 관련 정책과 도시 관련 계획은 한반도 전역에 영향을 주었지만, 관련 연구는 남한 내 도시에 집중되어 있다. 평양은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 당시에는 주요 병참선로이자 전적지였다. 1905년 경의선이 신의주까지 개통한 이후 급격히 성장하였고, 경성・인천・부산 등에 비견되는 대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평양은 북성・내성・중성・외성으로 구성된 성곽도시에서 일제강점기 공업과 군사시설의 발달로 전통도시 구성요소는 훼철되기 시작했다. 더불어 기존과 다른 성격의 공간이 등장했고, 내성에는 조선인이, 평양역 주변 신시가지에는 일본인이 주로 거주하여 구분되었다.
근대 시기에 조성된 공간에서 공원(公園)은 계급과 성별에 차별없이 누구나 드나들 수 열린 공간(Open Space)이다. 영국에서 1830년 왕실정원을 개방하면서 시작된 공원은 1847년 버킨헤드 공원(Birkenhead Park)에서 시민 역할이 커졌다. 1858년 미국 센트럴 공원(Central Park)은 버킨헤드 공원의 영향으로 조성되었다. 1873년 일본 우에노공원(上野公園), 우리나라에서는 1888년 인천 조계지 내 각국공원이 들어섰다. 1897년 독립공원과 탑골공원으로 이어졌고, 일제강점이 시작되자 근대공원 조성은 증가했다. 근대공원 관련 선행연구를 살펴보면 탑골공원은 일제강점기 조성과 변화(김해경 등, 2013), 현대까지 이르는 외형 변천(박승진, 2003)이 대표적이다. 장충단공원은 일제강점기 형성과 시계열적 변화(김해경・최현임, 2013), 공원과 박문사의 건립(윤기엽, 2016), 남산과의 상관성(박희용, 2016)을 도출했다. 남산을 중심으로 한양공원(박희성, 2015), 신사와 동상 건립으로 인한 남산의 변화(김대호, 2015)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외에도 철도공원(김영민・조세호, 2020), 효창공원(김해경, 2010), 사직단공원(김서린 등, 2014), 훈련원공원(김해경・김영수, 2016), 중앙공원으로 변모한 덕수궁(김해경・오규성, 2015)처럼 관련 연구는 경성에 집중되었다. 지역에서는 부산의 용두산공원, 대구와 전주의 신사(神社)와 관련된 달성공원과 다가공원이 연구되었다.
평양 관련 연구는 조선시대 평양성의 공간구조 분석, 일제강점기 평양의 전반적인 변화 그리고 해방 이후 재건된 도시구조로 구분된다. 시기적으로 국내외 사회적 배경에서 북한에 관한 관심이 증가한 2010년대 이후에 집중되었다. 김선희(2021)는 일제강점기 근대도시로의 평양이미지를 분석했다. 김민아(2013)는 조선시대 평양성 공간구조를 평양성도와 평양부 지적원도 비교를 통해 개항 이후의 성곽 훼철 과정을 도출했고, 김성원(2016)은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현대까지 이르는 평양의 개괄적인 공간구조 변화를 분석했다. 형기주(1980)는 한국근대공원의 변화에서 일부 평양을 거론했고, 김하나(2017)는 1930년대 이후 쇠퇴한 공업도시 이미지, 박동민(2019)은 일제강점기 평양역의 변화, 안창모(2017)는 한국전쟁 이후 재건된 건축물 양상, 1937년 이후 1960년대까지 도시적 측면에서 평양의 공간변화(김태윤, 2022)가 분석되었다. 평양은 일제강점기 경성에 버금가는 근대도시였지만, 관련 연구는 일제강점기와 사회주의 체제 시기의 거시적 측면에서 분석한 평양 도시구조 변화가 주를 이루며, 이때 근대공원의 생성 및 역할은 제외되었다.
다만 2018년 평양 내 공원을 저술한 단행본에서는 일제강점기 조성 공원으로 서기산공원(1919년), 대동문공원(1922년), 모란대공원(1924년), 삼각공원(1928년)을 거론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공원 조성과 관련된 관보와 발간지도, 도상자료를 살펴본 결과 1930년대까지 실제로 조성된 공원은 모란대공원(140,000평), 서기산공원(30,000평), 삼각공원(300평), 선교리공원(800평), 대동문공원(1,300평), 류정공원(2,500평)처럼 6개소이다. 일제강점기 동안 공원 역할을 담당했던 만수대와 풍경궁도 있었다. 일제강점기 평양에는 다양한 배경과 특성을 지닌 근대공원이 조성되었고, 다양한 계층이 이용하면서 평양이란 도시의 근대 도시문화 향유의 장소 역할을 담당했다.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 평양이란 도시를 구축하는 다층적 요소 중 근대공원 층위의 분석을 위해 실제 조성된 6개 공원(<<동아일보>>1936.1.1)과 조성 후보지로 거론된 공간을 대상으로 했다. 평양 근대공원의 조성 배경, 공간구성요소, 이용행태 특성을 도출하기 위해 도상자료인 지도와 사진, 공원계획을 포함한 설계도서, 관광목적으로 작성된 관광안내도, 당시 잡지와 신문기사를 활용했다. 실증적인 구현 여부의 검증은 도면과 사진의 비교분석으로 정합성을 확인했다.
II. 일제강점기 평양의 근대공원 태동
1. 일제강점기 평양의 도시계획과 공원
평양은 조선 초기에 ‘단군과 기자의 고장’으로 표상되었고, 숙종 대 이후 상업의 발달로 도시적 면모를 갖추었다. 조선시대에 평안도는 관직 차별로 인해서 정계로 진출하지 못했지만, 문학과 예술과 함께 평양기생으로 명성을 구축했다.
표 1.
연구 대상지
| 공원명 | 조성연도 | 면적(평) | 공원 위치 | |
| 1 | 서기산공원 | 1908년 | 30,000 | ![]() |
| 2 | 대동문공원 | 1922년 | 1,300 | |
| 3 | 모란대공원 | 1924년 | 140,000 | |
| 4 | 삼각공원 | 1929년 | 300 | |
| 5 | 선교리공원 | 1921년 | 800 | |
| 6 | 류정공원 | - | 2,500 | |
| 7 | 만수대 | - | - | |
| 8 | 풍경궁 | - | - |
평양성은 자연지형을 활용한 고구려의 군사 방어지로 축조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모란봉 중심의 가장 높은 지대인 북성, 만수대와 조선인이 주로 거주하는 내성, 안산까지 이어지는 중성 그리고 대동강과 보통강으로 둘린 평지에 축조된 외성으로 구성되었다. 평양성 훼철은 1899년 평양 개시와 풍경궁 건립으로 시작되었다. 외성과 중성 일대는 평양역 건설, 중성을 따라 철도와 도로가 부설되면서 내성 주작문(朱雀門), 중성 정양문(正陽門)과 함구문(含毬門)이 헐렸고, 대동문과 연광정은 존치했다. 1902년 <<평양시가전도>>에는 내성 원형이 표현되어 있고, 1906년 <<평양전도>>에는 대동강 변 성곽이 멸실되었으며, 1915년 지도에서는 서쪽 성곽이 표현되지 않았다. 평양성은 1906년에서 1915년까지 도시 내 기반시설 구축과 함께 멸실되었다.
일본인의 평양 거주는 1899년 개시를 통해 합법화되었으나 정착이 용이하지 않았다. 대한제국은 평양과 20km 정도 이격된 대동군 남곶면 석호정 일대 개방을 유도했다(박준형, 2013). 그러나 원거리를 이유로 평양성 외곽 영제교 일대를 요청했고, 주작문 외곽에 일본인 거주지를 형성했다. 1905년 평양 이사청이 설치되었고, 경의선이 개통되었다. 서기산과 창광산 사이에는 일본군 여단 사령부와 연대 본부를 포함한 병영이 구축되었다. 기존 평양성 성문을 경계로 남문통으로부터 대동문통 부근 구시가에는 조선인, 성 밖의 신시가지에는 일본인이 주로 거주했다.
평양성의 도로축은 평양 감영과 정양문까지 남북 도로, 대동문-정해문-보통문까지가 동서도로를 이룬다(김기혁, 2014). 일제강점이 시작되자 도로와 전차 노선이 구축되면서 도시구조가 재편되었다. 외성의 평양역, 중성의 도청과 부청, 북쪽 외곽의 서평양역 건설로 도시 구조는 북쪽으로 확장되었다. 전차는 평양역에서 서평양역 노선, 우편국전역에서 대동강 건너 선교리까지 연결되었다.
행정구역은 1923년까지 유지되었다가 1차 행정구역의 확장을 거쳐 1937년 2차 확장 후 1938년 확정되었다. 인구 40만 명을 목표로 대동군 임원면・서천면・용산면・고평원・대동강면 등 5개면 26개리를 병합하여 총면적 약 9천만㎡의 주거, 상업, 공장 구역을 계획했다.
평양은 1920년대부터 부 전체 면적대비 공원면적 비중이 10%로 당시 근대도시에 비하여 높았고(조선총독부, 1925), 1932년에는 향후 조성 예정 공원을 42개소로 추정했다(조선총독부, 1932). 1936년에는 조성된 공원 6개소와 향후 도심지내 소규모 공원을 10여 개 증설한다고 했다(<<동아일보>>1936.1.4). 1937년 발표된 시가지계획에는 소공원으로 동대원리 4개소, 신리 3개소, 율리 1개소와 광장은 선교리역전, 현인도교 앞, 제2인도교 예정지, 대안 부근, 동대원 2개소 계획되었다(<<동아일보>>1937.6.5). 이처럼 공원 조성 면적 확보, 당시 미디어인 신문기사를 통한 시민의 공원 요구 그리고 관에서 집행하는 공원 조성 계획의 등장은 근대공원을 도시 내 필수구성요소로 인식하였음을 보여준다.
1940년대 녹지조성은 소개지와 방공시설을 위한 공지 형성과 맥락이 닿아있다. 1937년 중일 전쟁 이후 비행기 폭격이 대두되었고, 경성과 평양에는 목조 건축물이 많아서 화재에 취약했다(손정목, 1990). 소개지로 형성된 공지에는 토막촌이 들어서서 미관과 위생 문제가 발생했다. 대책으로 1941년에는 소공원 20여 개를 설치하고, 각 공원에 방공호를 설치하여 전쟁에 대비하도록 했다(<<매일신보>>1941.4.1). 1940년대 평양의 공원은 전시체제의 시대상이 반영된 공간이었다.
1944년에 [조선총독부고시 제12호]로 평양시가지계획공원 59개소가 발표되면서, 비로소 평양 내 공원은 법적인 지위를 확보했다.
2. 평양의 첫 근대공원, 서기산공원
조선시대까지 평양성 중성에 해당하는 서기산 일대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청일전쟁 당시에 청군의 포병진지였으며(『개벽』1924.9.1), 일제강점이 시작되자 중심 시가지로 변모했고, 서기산 좌측에는 보병 제77연대, 고사포대 등 군부대의 연병장과 막사, 후면부에는 평안남도청, 부청, 부윤관사, 도청관사, 지사 관사가 입지했다.
서기산공원은 1908년 조성된 것으로 기록되기도 했으나, 미디어에 공원으로 등장하는 것은 1912년이다. 공원 조성 주체는 ‘평양명승구적보존회’이다(<<매일신보>>1916.5.3). 평양명승구적보존회의 회칙 제2조에 등장하는 대표적 공원은 모란대공원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서기산공원도 포함되었다. 평양명승구적보존회의 공원 설계 계획을 살펴보면 산 정상부에 광장을 도입하고, 공원의 중심부와 연결된 다양한 폭의 산책로를 도입했다.
당시 지도에서 공원 서쪽과 남쪽은 도로가 경계이며, 북쪽과 서쪽은 관공서와 일본인 거주지에 면해 있다. 보병 77연대와 인접한 경사 산책로를 통해서 진입하면 표고 34.7m로 표기된 가장 높은 정상부에 도달한다. 이곳에는 청일전쟁을 기념하는 충혼비(朝鮮総督府鉄道局, 1934)가 시각적인 중심역할을 한다. 충혼비는 1918년 2월 다시 관민단체와 은행, 회사에서 일천 원을 모금하여 비석과 함께 제반시설을 조성했다. 형태는 정방형 석축 위에 계단을 통하여 진입하며, 철제 휀스로 외곽을 둘렀고, 곧게 자라는 전나무(Abies holophylla Maxim.)를 주변에 식재했다. 충혼비 앞에서는 전사자를 위한 초혼제(招魂祭)를 거행했다. 주변 관공서와 일본인 거주지와 연계된 산책로를 통해서 이용이 활발한 만큼 편의시설이 점차 증가했다. 야간 이용을 위해 전등시설과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까지 완비되었고, 주요 산책로는 녹음을 주는 수목, 곳곳에 우거진 소나무와 초화류로 장식했다(<<동아일보>>1921.9.14). 야간에는 청춘남녀가 정상부 평지의 벤치에 앉아서 평양 신시가지와 보통문 일대를 조망하는 데이트를 즐겼다.
공원 전면에는 공회당과 철도호텔이 들어섰다. 일제강점기 공회당은 공연과 전람회가 진행되는 대표적인 문화시설이었다. 1915년에 공원 진입 구릉지에 어대례(御大禮) 기념하기 위해 계획된 후 1917년 1월 설계 착수, 3월에 입찰, 4월에 부지 허가, 1920년 5월에 상량식, 6월 8일 준공했다(<<매일신보>>1917.3.3). 공회당 건설비는 25,000원이었으며, 조선인이 포함된 평양상업회의소가 운영을 담당했다. 대부분의 시설 사용은 공연과 강연, 물산전람회의 장소였으며, 주로 일본인 대상이었다. 1923년 5월 평양 내부를 연결하는 전차가 개통되자 서기산공원에서 개회식, 공회당은 전등으로 장식하여 축사 장소로 활용했다(<<동아일보>>1923.5.2). 1923년 11월이 대동강 인도교 개통 행사 또한 공회당에서 진행했다(<<조선일보>>1923.11.9). 1922년에는 공회당 우측부에는 평양 철도호텔이 개관했다. 철도호텔은 1917년 7월에 계획이 등장하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1920년 평양역 대개축과 함께 구체화되어(<<매일신보>>1920.8.30), 1922년 완성되었다.
공회당과 철도호텔을 포함한 다양한 설비의 구축은 평양 방문 시 하절기 유람 필수코스(『별건곤』1923.8.1)로 홍보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3. 평양의 대표공원, 모란대공원
1912년에 발표된 평양 도시계획의 주요사업은 시가계획, 방수와 배수 설비, 모란대공원 축조 였다(<<매일신보>>1912.2.14). 모란대 일대 29,000여 평을 수용 후 서양식 공원으로 조성하고자 했고, 그해 9월 15일에는 평양거류민단이 경영하는 평양 유일의 공원으로 묘사되었다(<<매일신보>>1912.9.15). 모란대공원 조성 배경에는 서기산공원처럼 ‘평양명승구적보존회’의 역할이 지대(최혜정, 2007)했다. 보존회는 1914년 6월 평양 제일의 공원 조성을 위해 외국 공원 설계가인 독일인 건축기사 게오르크 데 라란데(George de Lalande, 1872-1914)에게 설계를 촉탁했다. 그는 1915년 세 차례의 답사 후 조감도와 공사 비용을 발표했다. 전체 약 팔십만 원의 예산에서 여관 건설비를 비롯한 공원부지 매입, 동물원 조성, 폭포와 분수 설치, 활동사진관 건설, 휴게소와 요리점, 도서관, 식물원, 기념탑과 기념비 조성을 포함했다(<<매일신보>>1914.6.26). 이 설계안은 1930년대 임학박사인 혼다 세이로쿠(本多静六, 1866-1952)에게 재의뢰할때까지 지속적으로 홍보되었다.
1915년 만선철도의 평양 진출과 전차개통은 내외국인의 관광객 증가를 통한 경제 부흥 효과를 계산했다(<<매일신보>>1915.12.22). 모란대공원은 역사적 건축물과 대동강을 비롯한 자연 풍광을 지닌 평양 방문객이 들려야 할 명소 역할이었다. 이때 진행된 정비에는 모란대공원 내 루정을 비롯한 건조물은 보존 대상이라기 보다 향유를 우선시하는 전망대 역할을 부가했다. 이러한 정비는 평양 내 공원 중 대표성을 확보하여 평양부에서 관리하기로 결정되었다(<<매일신보>>1916.11.25).
각 공간구성을 살펴보면 1910년경 능라도에 수원지와 모란봉에 배수지가 입지했고, 이를 연결해주는 벽라교(碧羅橋)가 건설되었다. 대동강 변 북성의 남문인 전금문(轉錦門)으로 진입하면 좌측에 득월루(得月樓)가 있고, 계단을 통해서 오르면 부벽루에 다다른다. 부벽루 전면에는 영명사 8각 5층 석탑이 있다. 그 좌측으로는 영명사 부도탑과 영명사 대웅전이 위치한다. 영명사는 1894년 청일전쟁으로 인해 득월루 후면에 있던 본전이 전소되어 그 당시 암자였던 칠성암으로 이전하여 재건한 것이다. 영명사와 부벽루 사이에는 1930년 어목다옥(御牧茶屋)으로 불리는 요정이 들어섰다. 건물의 외형은 조선 전통 양식이지만, 전면은 일본식 정원으로 조성했다. 모란봉의 가장 높은 지점에는 숙종 대 건설한 최승대가 있었는데 청일전쟁 당시 소실되었다. 1927년 8월 30일에 대동강과 주변 경관을 조망을 위해 단청을 한 조선양식으로 중건되었다(<<동아일보>>1927.4.4). 북문인 현무문 전면의 평양 시내를 조망하기 좋은 높은 지점에 ‘乙密臺’ 현판이 걸린 사허정(四虛亭)이 있다(<<동아일보>>1925.10.31). 을밀대 좌측 능선 하부에는 기자릉이 있고, 기림리 일대를 지나면 칠성문과 1911년 창건된 평양신사가 있다. 평양박물관은 관광사업의 일환으로 1925년에 제안되었으나, 1928년까지 욱정(旭町)의 도서관 3층을 대여하여 진열실로 활용하고 있었다. 도서관 이용자가 증가하자 보존회에서는 1932년 9월에 을밀대 인근에 평양박물관을 건립했다. 1933년 부립박물관으로 승격되었고, 평양부청에서 운영을 담당했다.
공원 이용은 비교적 활발했으나, 고적 보존은 미흡했다. 1934년 전금문, 1935년 5월 18일에는 응벽정이 붕괴되었고, 대동문과 연광정이 붕괴할 위기에 처했다고 전했다(<<동아일보>>1935.6.2). 이에 일제조사를 실시하여 대동문, 연광정, 을밀대, 보통문 등에 예산을 책정했으나 집행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1936년 11월에는 능라도와 선교리 일대 비행장의 군사기밀 문제로 모란대공원 높은 지대에서 촬영을 금지시켰다(<<조선일보>>1936.11.20).
모란대공원은 평양의 대표 명소로 이용되었지만, 조선의 역사성을 알리는 건조물의 보수 정비는 미흡했으며, 1930년대 이르러서는 군사기밀을 문제로 이용행태에 제약을 받는 공원이 되었다.
III. 일제강점기 평양 근대공원의 확장
1. 전쟁의 기억과 경제 발전 현시: 선교리 공원
1910년대 후반 평양 내 상공업이 발달하자 남쪽 기림리와 대동강 우측 선교리까지 행정 구역이 확장되었다. 선교리 일대에는 1919년 대일본 제당주식회사 평양공장, 조선전기흥업처럼 대규모 공장들이 들어섰고, 시가지 확장 계획 일환으로 대동강 대안지구개발(對岸地區開發)이 촉진되었다(<<동아일보>>1921.2.24). 1918년 평양상업회의소는 대동강 인도교 건설을 청원한 후 1923년 11월 30일에 인도교가 축조되었다(오미일, 2007). 평양상업회의소 성격은 평양 내 일본인 위주의 조직으로 조선인에 대한 배려가 아닌 일본인의 경제력 확보가 우선이었다. 대동강 인도교는 일본 군사 밀집 지역, 관공서, 일본인 거주지역과 공업지대인 선교리를 연결시켰다. 배와 임시다리인 부교(浮橋)를 사용하여 대동강을 건너다가 도보와 차량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되어 선교리로의 접근성이 용이해졌다.
선교리 일대에 대규모 공장 입지 전 모습은 대동강 변에 버드나무(Salix pierotii Miq.)가 자라는 한적한 농촌 풍광이었다. 1921년 조성된 선교리공원 위치는 대동강 인도교와 전기흥업회사 사이 강변이며, 전흥사택과도 인접해 있다. 공원의 중심이 되는 초기 충혼비는 청일전쟁 당시 선교리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 가첨석을 갖춘 비석 형태로 제작되었다. 기존 비석 후면에 신규로 축조된 충혼비는 오벨리스크형으로 서기산공원의 충혼비와 유사한 형태이다. 석단 위에 철제 휀스와 철제문을 달았고, 비석에는 전쟁 당시 혼성여단 장군 이하 144명의 죽음을 기념하는 내용을 새겼다. 대동강 변 평지에는 휴식을 위한 사각정자를 도입했고, 곧게 자라는 양버들(Populus nigra L.)을 열식(列植)했다. 사각정자는 휴식을 취할 때 대동강 인도교와 충혼비가 함께 조망되는 위치이다.
2. 평양성의 진입부에서 공원으로: 대동문공원
대동문은 6세기 중엽에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훼손되어 1635년에 다시 세웠다. 16세기 후반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징비록(懲毖錄)』에서는 대동문 옆 연광정에서 조선군과 일본군이 교전했다고 적고 있다. <<평안감사향연도>>의 ‘연광정연회도’를 보면 연광정 전면에 연못이 있고, 대동문은 중층 누각으로 대동강 변에서 드나드는 사람들이 묘사되어 있다.
일본의 관점에서 대동문은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군대에 포위되었을 때 고루에 올라가서 전쟁의 퇴로를 살펴본 장소였으며, 연광정은 그가 명나라 심유경(沈惟敬, 1526-1597)과 강화 교섭을 했던 장소였다(朝鮮総督府鉄道局. 1934). 이는 평양성의 훼철과정에서 존치된 배경으로 작용했다.
1915년에는 ‘대동문유보지’가 등장하는데(<<매일신보>>1915.12.22), 유보(遊步)란 일본어로 ‘산책(散歩, さんぽ)’이란 의미로 유보지는 공원보다 위계가 낮은 공간(조세호・김영민, 2019)으로 여겼다. 이는 대동문 일대가 공원 구성요건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평양부민이 산책을 즐길만한 공간으로 해석된다. 기사 내용은 대동문은 오래된 건물로 임진왜란 당시 선교리 전장이 보이며, 문루에 오르면 평양 시가와 대동강이 조망되는 지점이지만, 단점은 협소한 면적과 조선인 거주지와 밀접하여 일본인의 접근성이 좋지 않다고 했다. 1915년 지도를 보면 주변 일대에 있던 대동관은 제일보통학교와 간이상업학교, 애련당 자리는 조선은행 지점으로, 대동문 권역에는 전화교환소가 표기되어 있어 일제강점 이후 변화를 보여준다.
1921년 8월에는 대동문 일대 국유지 이천여 평에 무질서하게 들어선 창고를 철폐하고, 1922년 봄에 잠겨 있는 대동문과 연광정을 공개하는 공원 조성계획을 발표한다(<<동아일보>>1921.8.25). 그러나 공원 조성을 위한 실질적인 공사는 1924년 4월에 진행되었다. 대공문공원 조성 관련 설계도면을 보면 기존 창고가 늘어서 있는 부지(853.49평)는 화단으로 바꾸고, 평의자는 대동강변을 바라보도록 배치했다. 연광정 부지(189.12평)와 체신국 소관지(426.8평)는 별다른 장식을 하지 않았다. 화단에는 송(松), 앵(櫻), 류(柳)로 표기한 윤엽수와 침엽수를 식재하고, 잔디로 포장했다.
화단의 점경물 역할을 하는 흥복사지 탑의 원위치는 평천리였다. 1925년에는 철도관사 앞으로 이전이 논의되다가 대동문공원으로 확정되었다. 화단에 탑을 장식하는 기법은 16세기 이후 일본에서 유행한 다정(茶庭)양식에서 산사의 정취를 느끼도록 탑과 석등의 배치가 유행한 이후 일본 정원양식의 주류가 되었다. 화단의 흥복사지탑은 일본 정원 양식의 반영으로 해석된다.
종로에 있던 종각은 1924년 이건 계획이 결정되고(<<조선일보>>1924.4.6), 1927년 2월 평양부청의 시가 정리 명목으로 대동문공원으로 이전했다(<<동아일보>>1927.2.19).
조선시대 평안감사가 부임하면 연회를 개최하던 공간인 연광정과 대동문 일대는 1920년대 공원으로 조성되면서 성격이 다른 건물의 이건 장소가 되었다. 공간 맥락이 다른 이건된 조선 유적은 원위치를 떠나면서 제 기능을 상실하고, 공원 내 볼거리인 점경물로 활용된 것이다.
3. 도시구조와 연계된 형태의 공원: 삼각공원, 류정공원
1) 삼각공원
삼각공원은 도로계획으로 발생한 부지 형태에서 유래했다. 대화정통과 육로문진(陸路門津)을 통해서 진입 시 생성된 교통 결절점인 삼각형 부지가 명칭에 반영되었다. 삼각공원의 본격적인 조성은 1929년 3월의 평양부의회 신규사업 예산 배정에서 찾을 수 있다. 본정통(本町通)에서 신창리(新倉理)까지 이어지는 도로를 확장하면서 경찰서 앞 각지(角地)에는 중앙에 분수를 설치한 노상공원을 계획했다(<<조선일보>>1929.3.12). 삼각공원은 삼각가로공원으로도 불리며 오백평 가량 부지에 4,500원의 경비를 계상했다. 1929년 4월에 공사를 시작해서 6월에 완공했다(<<조선일보>>1929.5.26). 그해 9월 공원 안에는 부역 확장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웠고, 1931년 4월에는 전등 1개를 증설했다.
삼각공원이 신문기사에 등장할 때에는 ‘근대적 설비’ 갖춘 공원으로 묘사되었다. 기존 공원과 다르게 도로변에 위치하며 분수를 도입한 형태로 휴게 기능보다는 평양이란 도시의 근대도시적 풍모와 미적인 측면을 고려한 공원이기 때문이다.
2) 류정공원
류정공원의 조성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경의선이 평양역에 다다르고, 평양역에서 대동교 세관출장소까지 연결된 철로 주변에는 내화연와공장, 철공소, 전등회사, 면업상회 등 다양한 공장들이 입지했다. 1926년 지도를 보면 철로 옆 대동강 변을 따라 선형의 ‘류정소공원’이 명기되어 있다.
<<기성전도>>에는 류정공원 위치인 대동강변에 호습성인 버드나무 거목이 표현되어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에서도 류정(柳町)이란 명칭으로 반영되었다. 일본인이 다수 거주하는 평양역 주변 공장지대에 휴식을 위한 목적으로 수변공원 형태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32년에는 아동유원지가 고려되어 소규모이지만, 아동공원으로의 변모 계획이 있었다(<<매일신보>>1932.9.14). 이처럼 류정공원은 기존의 도심지에 위치한 평양 부내 타 공원과 달리 주변 경관과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독특한 성격의 공원이었다.
4. 공원이 되지 못한 명승: 자혜병원과 만수대
1) 풍경궁과 자혜병원
1915년 풍경궁은 대동문처럼 유보지로 등장한다. 풍경궁은 1902년 기존 관청이 입지한 평양성 내성이 아닌 기자궁지와 기자정, 기자정전 등이 있었던 외성에 건립되었다. 풍경궁 좌향은 정남향으로 황궁 정문인 황건문, 정전인 태극전과 태극문, 그리고 편전인 지덕전이 일직선 축 위에 배치되고 중화전은 중심축 우측에 입지했다(우동선 등, 2008). 1904년 풍경궁 일대가 일본의 한국주차군 군용지에 포함되었다. 풍경궁 군대가 1907년 8월 6일 해산되고, 1908년 4월 태극전과 중화전에 있었던 황제와 황태자의 화상은 경운궁 정관헌으로 옮겼다. 1912년에는 전면에 평양공소원을 승계한 평양복심법원과 지방법원이 들어섰다. 후면 서기산 능선과 연결된 구릉지로 좌측 평지에는 연못이 조성되었고, 주변에 백화원(百花園)이 들어섰다(<<동아일보>>1921.4.6). 1920년대에는 좌측 평지에 철도관사가 들어섰다.
풍경궁은 1914년 자혜병원의 병동으로 사용되었지만, 1915년에는 ‘자혜병원 전(前) 유보지’로 등장하여 유보지란 명칭으로 공원 기능은 갖추고 있었다(<<매일신보>>1915.12.22). 1925년 자혜병원을 도(道)로 이관하면서 대대적인 증축과 개축이 진행되었지만, 1932년까지 풍경궁의 외관이나 배치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1934년 11월에는 평양도립병원 신관 완공으로 구관인 풍경궁은 낡았기 때문에 개축하자는 의견이 등장하고, 완전 철거가 결정되어 태극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멸실되었다. 남겨진 태극전도 불명확한 시기에 멸실되었다. 풍경궁 정문이었던 황건문은 1925년 8월 일본 불교계에 매각되어 서울로 이축되어 조계사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1902년에 서경에 세운 궁궐로 축조된 풍경궁은 대한제국의 몰락과 함께 궁으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체 방치되었다. 방치된 궁궐 일대는 인근 주민의 유보지로 활용되었다가 지방 서민들을 위한 자혜병원의 구축으로 궁궐 기억은 사라졌고, 유보지로의 변용도 일단락되었다.
2) 만수대
1894년 청일전쟁으로 만수대 일대 구릉지와 산림은 황폐해졌지만, 능선에는 전사한 일본군을 위한 충혼비를 건립했다. 만수대 일대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은 이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여, 1902년 평안도 관찰사가 이전을 요구했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만수대 구릉지 일대는 1908년에는 천도교 주최 행사 시 13,000여 명이 운집한 넓은 부지였다. 1909년 1월 31일 순종은 서울에서 평안도로 임시 특별열차를 이용하여 서순행(西巡幸)했다. 평양 도착 후 행재소에서 정숙(停宿)하고(『순종실록 3권』1909.1.27), 2월 1일에 평원당(平遠堂)에서 지역 관료와 민인 등 100여 명과 만수대에 올라가 평양 일대를 관람했다. 이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순종의 행행기념비(幸行紀念碑)를 세웠다. 1910년대 만수대는 일본군 전사자를 추모 충혼비와 순종 행행비가 공존하는 공간이 되었다.
1920년대 신문기사에는 평양의 공원을 모란대, 서기산, 만수대를 예로 들었으나 모란대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예산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공원이 부족하다고 했다(<<매일신보>>1920.5.6). 만수대 주변은 기념식수 행사로 소나무 2,000본을 식재했으나(<<동아일보>>1921.4.6), 여전히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동아일보>>1921.9.14) 조선인들의 휴게시설 없는 산보지였다.
1928년에는 만수대 일대 공원 조성 예산이 부의회를 통과했다. 모란대공원에 인접한 관유지 8,673평을 부에 대부하여 제반 설비를 완료한 후 보건상 이상적인 공원을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1929년까지 공원은 조성되지 못했고, 순종의 행행기념비는 퇴락해졌다(<<조선일보>>1929.1.2). 공원 조성 계획은 반복하여 등장하지만, 공원 조성 공사는 없었다. 1935년에 다시 공원 조성 기사가 등장하지만(<<조선일보>>1935.11.5), 1937년 8월 평남도청 공사가 시작되었다(<<조선일보>>1937.8.5). 공사를 진행하는 동안 고구려 건물 유구로 기단과 초석이 발굴되었다. 귀중한 유적이라고 미디어에 등장하나 도형과 사진을 찍어서 참고자료를 남긴 후 공사진행을 결정했다. 평남도청은 1937년 10월 기공 이래 2년이라는 공사과정을 거쳐 1939년 12월 23일 낙성식을 진행했다.
만수대 부지는 평안도청이 들어서자 관광서와 학교가 연달아 들어섰다. 도립상업학교, 고등보통학교, 만수보교, 상수보교를 비롯해서 1931년에는 인정도서관이 들어섰다. 만수대는 경사지 녹지대를 제외한 대부분이 건물이 들어서면서 공원 기능은 사라졌다.
IV. 일제강점기 평양 근대공원이 구축한 특성과 도시문화
1. 일본 전적지 기억 장소의 공원화와 명소화
조선시대 풍류의 도시였던 평양에 대한 인식은 일제강점기가 되자 러일전쟁과 청일전쟁의 장소 기억이 부각된다. 전쟁의 기억은 임진왜란까지 소환되어, 일본군 관련 장소는 처절하지만, 승리를 위해 헌신했던 영웅 서사로 묘사했다. 임진왜란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1555-1600)와 청일전쟁의 히라다 주키치(原田重吉, 1868-1938)가 등장하며, 그들의 영웅서사는 엽서를 통해서 확산되고, 서사의 장소를 공원 안에서 실제화하고 구체화하였다.
평양 내 도로와 전차 개통으로 평양성이 훼철되었는데, 이때 대동문, 칠성문, 현무문처럼 전쟁 기억이 내포된 전통건조물은 존치되었다. 대동문 일대는 연광정, 이건된 종각, 이전된 흥복사탑을 포함한 대동문공원으로 변모한다. 다양한 조선의 유적을 포함한 모란봉 일대는 공원으로 일본 관련 전쟁 기억의 장소인 현무문, 칠성문 중심의 대대적인 정비와 수리, 안내판을 통해서 서사장소를 방문객에게 인식시켰다.
1930년대 철도 발달에서 평양은 관광의 대상이 되어 평양 내 명승을 안내하는 관광지도와 관광안내도가 제작되었다. 요시다 하츠사브로(吉田初三郞)가 그린 「平安南道」를 보면 대동강으로 둘러싸인 평양을 중심으로 그렸으며, 각소구적안내(各所舊蹟案內)에는 모란대공원 내 평양신사, 을밀대, 모란대, 현무문, 부벽루, 기자릉, 영명사, 요정, 청류벽, 칠성문과 이외에도 서기산공원, 대동문공원, 선교리공원을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외의 팜플렛과 관광도서를 보면 『平壤の名勝』에는 서기산공원, 모란대공원, 대동문공원이 엽서의 장면으로 표현되어 있다. 『平壤名勝八景』과 『觀光の平壤』모란대공원과 대동문공원, 선교리공원이 등장한다. 1930년대 유행했던 『조선여행안내서』에서는 전승지를 적극적으로 홍보했다(朝鮮総督府鉄道局, 1934). 대동문과 연광정은 고니시 유키나가, 을밀대・모란대・현무문・칠성문 등이 청일전쟁 전적지로 서술했다. 을밀대에는 청일전쟁의 총탄 흔적이 남아있으며, 모란대는 청군의 포병대가 입지해 있었고, 현무문은 하라다 주키치의 일화가 내재된 장소였다(최인택, 2019). 선교리 일대는 용감하게 싸운 일본군 전사자를 추모하기 위한 충혼비가 있는 곳으로 서술했다.
이처럼 기록된 전쟁의 기억은 엽서를 통해서 확산되고 각인되었으며, 가보고 싶은 장소로 여겨졌고, 교통의 발달로 평양 방문의 직접 기제로 작용했다. 지도와 책으로 읽고 엽서로 보았던 평면적인 전승지 경험이 공원으로 조성되면서 휴식을 취하면서 일본의 전적지를 공감각적으로 경관 체험하는 장소가 되었다. 이때 조선의 공간과 건물을 대하는 태도는 기존 유적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대상이 아닌 향유하고 활용하는 대상으로 변모했다.
2. 근대의 현시와 조선 전통의 대상화
공원은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형식의 공간으로, 모든 사람이 성별과 계급에 상관없이 쉽게 드나들며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다. 새롭게 선보이는 공원의 조성과정은 기존과 달랐다. 유명한 전문가의 참여와 청사진 도면을 통한 현재 상황의 실측과 변모할 모습을 기록을 통해서 남겼으며, 입찰이란 제도를 통해서 공사를 진행했다.
모란대공원은 1914년 평양명승구적보존회에서 독일인 건축가인 게오르그 데 라란데에게 설계를 의뢰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독일로 임학 관련 유학을 보냈고, 그 당시 임학은 독일이 선진국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조선총독부와 조선호텔을 설계한 전문가인 독일인 게오르그가 선정된 것이다. 그는 조감도를 통해서 각 공간의 구성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설계안을 도출했다. 대동문공원은 조성 전 모습을 현장조사와 실측을 통해서 도면으로 남겼고, 각 부지에 대한 설명과 함께 향후 이건할 종각 주변에 대한 공간구성을 실측된 도면으로 표현했다. 비록 공원으로 조성되지는 못했지만 풍경궁 일대 고적과 자혜병원의 등장, 만수대 일대 발굴 관련 내용 등이 정확한 측량에 의한 도면으로 작도되었다. 이처럼 공원과 관련된 공간 변화는 기존과 다른 설계라는 계획과 전문인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조성되었다.
전문인이 참여하여 설계한 공원은 신문물과 신기술의 전시장처럼 활용되기도 했다. 공원에서 이뤄지는 전람회와 박람회 행사뿐만 아니라 방문객의 볼거리와 편의를 위한 시설물에 도입했다. 공원에 전등 도입은 야간활동을 가능하게 했고, 기존과 다른 이용 패턴을 보이도록 만드는 역할을 했다. 수경관 중에서 분수를 도입한 것은 동력에 의해서 물의 흐름을 바꾸고 청량감을 주는 요소이자 신기술이었다.
이처럼 공원이 신기술의 전시장처럼 활용되는 과정에서 조선 전통을 보여주는 요소의 용도 변용이 있었다. 조선의 중요 공간이 공원으로의 변모 과정을 보면 관방유적인 대동문 주변은 공원이 되었고, 연광정은 보수되지 않은 체 목재 휀스를 두른 점경물이 되었다. 평양성 내 종각과 종은 도로계획에 방해되는 요소로 여겨져 대동문공원으로 이건했다. 모란대 일대의 가장 높은 지점에 있었다가 멸실된 최승대를 공원 조성 후 조선식으로 재건하여 전망대로 이용했다. 조선시대 사찰의 탑이 공원의 점경물로 활용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영명사 8각 5층탑은 요정 전면에 연못이 만들어지면서 정원요소로 이용되었고, 흥복사지탑은 평천리에 있다가 대동문공원으로 옮긴 후 화단 점경물로 변모했다. 평양박물관 전정에도 탑으로 장식되었다. 이처럼 조선의 정체성을 지닌 전통건물과 탑은 원래의 성격은 고려되지 않고 무시되었다. 공원 이용자에게 보여지거나 조망하는 행위가 주가 되는 사물로 대상화되어 점경물로 변모했다.
서기산공원과 선교리공원, 그리고 대동강 변에 조성된 류정공원은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주목받지 못했던 공간이었다. 일제강점이 시작되자 일본인의 관점에서 공간의 중요성이 부가되고, 장식과 정비를 통해서 근대를 현시해주는 공원으로 변모한 것이다.
3. 일본인 공원과 조선인 공원의 차별
일본인 주거지는 평양역 주변으로 발달하였고, 서기산 주변에는 일본군 관련 시설과 관청이 입지했다. 대동강 우안 선교리역 근처에는 전기흥업과 제당회사 등 대규모 공장지대가 있었다. 군시설이 밀집해 있는 서기산 일대는 제일 먼저 공원으로 조성되어, 공회당과 같은 문화시설, 일본 전적 기념비, 야간 이용이 가능한 편의시설까지 완비되었다. 평양역 전면의 기자정은 녹지로 구성된 교통섬으로 조성했고, 삼각공원도 유사한 기능이나 수경시설인 분수를 도입했다. 공장지대의 대동강변에는 규모가 작은 청일전쟁 전적비가 있는 공간을 휴게시설인 사각정자를 도입하여 산보와 휴식이 가능한 공간으로 조성했다.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한 삼각공원과 일본인 거류지와 가까운 류정공원처럼 작은 공간조차 일본인의 편의성이 우선시 되어 조성되었다.
그러나 조선인 거주지와 가까운 만수대 일대는 공원 조성계획이 있었으나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학교부지가 되었으며, 조선의 역사가 깃든 모란대 일대는 임진왜란과 청일전쟁의 기표가 되는 건물만 보수되고 정비되어 차이를 보였다.
공원을 대하는 태도에는 대상지의 선택과 조성, 정비, 사물의 장식화 과정에도 포함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지닌 공간의 맥락과 상관없이 일본인의 관점으로 공원 대상지를 선정하고 예산을 투입하여 공원으로 조성했다. 일본전승 관련 유적 중 기념비는 서기산공원과 선교리공원처럼 가장 높은 지점에 기단을 쌓아 조성하거나 주변에 휀스를 설치하여 보호했다. 기념비 주변 장식화는 시각적 효과로 인해서 공원 이용자들에게 더 중요한 공간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작용을 했다. 이에 반해서 조선의 전통건물은 제대로 보수되지 않은 체, 방치되거나 용도가 변경되었다. 비록 도면이란 기록으로 남기기는 했지만 풍경궁은 자혜병원으로 변용되면서 기존 조선과 관련된 역사를 사라졌다. 만수대 일대도 건축물 신축과정에서 고구려 건물가 발굴되었으나 제거되었다.
1921년 신문기사를 보면 차별적 시선과 부당함을 표현하기도 했다. 서기산공원은 쉴 수 있는 의자와 야간에도 이용할 수 있는 전등을 설치했다고 했다. 주변이 일인이 다수 거주하기 때문에 밤에도 일본인을 쉽게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당시 통칭은 ‘서기산공원’이 아닌 ‘일본인 공원’이라고 불렀다. 그와 달리 조선인 거주지와 가까운 만수대는 이용행태는 산보를 통한 공원처럼 이용되지만 전등조차 없는 곳으로 차별을 표현했다.
이는 일제강점기라는 특수성으로 공공성을 지닌 대표적 도시계획시설인 공원조차도 조성 과정과 설비 지원, 예산 집행과 이용에도 차별의 시선이 내재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4. 사유화된 상업시설과 공원의 공간 충돌
공원은 경계를 갖춘 공공의 공간이다. 근대도시에서 상업시설은 필요한 요소이며, 일제강점기 다양한 유형의 상업시설이 등장했고, 공원 내외부에 입지하기도 했다.
1930년대가 되자 평양 모란대공원에는 요정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가장 유명한 장소는 부벽루 근처에 있는 요정 어목다옥이다. 당시 신문기사에는 단지 부벽루뿐만 아니라, 을밀대 아래, 민충단(愍忠壇) 옆에 요정이 있어서 풍기문란의 문제점이 지적(<<동아일보>>1930.9.12)되었다. 1936년 신문기사에서는 사찰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요정에서 풍겨 나오는 노랫소리, 술, 고기굽는 냄새 때문에 사찰로써 존엄을 유지할 수 없음을 지적했다. 불합리한 배치로 인해서 요정을 이전하도록 요구하기도 했다(<<조선일보>>1936.11.20).
상업시설인 요정의 입지는 공공의 성격을 지닌 공원의 각 공간에 사유화를 형성한다. 모란대공원 내 요정은 모란대공원을 요정의 정원처럼 활용했다. 평양 대동문공원 인근에는 기생양성소(기생학교)가 입지하여 당시 기생 관련 관광엽서에서 대동문과 일대 공원이 배경으로도 활용되었다. 요정과 기생의 허용은 공원의 공공성을 왜곡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중 모란대공원은 관광안내서에 예능과 교양 그리고 미모를 겸비한 조선 기생을 만날 수 있는 최고의 관광지로 설명되었다. 문화와 관련된 잡지에는 “공원의 꽃은 꽃으로만 감상하되, 자신의 어깨에 장식하려고 해서는 안된다(八代牛子, 1940)”라는 문장으로 공원의 중요한 요소로 기생을 부각시켰다.
서기산공원에는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문화시설인 공회당이 건립되었다. 이후 상품진열관으로 변모되어 일제의 정당성을 전시하는 관제행사를 진행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어, 공원이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 아니라 일제의 이데올로기를 확장하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상업시설에 인접한 공원은 상업시설의 연계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대동강 변 대동문공원의 연광정과 인접하여 평양기생학교에 입지했다. 일제강점기 평양의 관광 홍보에서 기생은 평양의 이미지와 함께 소비되었다. 이때 대동문공원 또한 평양기생의 사진에 등장하는 뒷배경 이미지로 활용되었다.
공원은 공공공간임에도 불구하고 허용된 상업화를 통해서 기생과 함께 풍광을 향유할 수 있으며, 공원 내 각 공간은 요정의 사유화된 정원으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당시에도 일반 부민의 위안 장소인 공원이 요정의 사유화와 상업화가 된 것에 대한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V. 결론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 평양이란 도시를 구축하는 다층적 요소 중 근대공원을 중심으로 분석했다. 1930년대까지 실제 조성된 6개 공원과 조성 후보지로 거론된 공간을 대상으로 관련 도상 자료와 작성된 설계도서를 통해서 입지 특성, 조성과정, 공간구성요소, 이용 및 활용 유형을 도출했다. 이는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거시적 관점의 평양 관련 연구와 달리 도시계획 시설 중 공원을 중심으로 한 연구로 분석 결과는 아래와 같다.
첫째, 1930년대까지 평양이란 도시에 공원의 이름으로 존재했던 공간은 첫 근대공원인 서기산공원, 도시의 대표성을 지닌 모란대공원, 전쟁의 기억이 공원 조성의 기제가 되었던 선교리공원, 평양성의 진입부에서 공원으로 변모한 대동문공원, 도로 교통섬 역할의 삼각공원, 대동강변 선형의 류정공원이다. 공원보다 하위 개념인 유보지로 불렸던 풍경궁은 자혜병원으로 변모했고, 평양성 내성에서 장수의 장대였던 만수대 또한 조선인의 산책지로 활용되었으나 관공서와 학교 입지로 공원이 되지 못했다.
둘째, 평양의 근대공원에서 일본과 관련된 전쟁 기억은 정비를 통해서 재생되었고, 근대공원 공간구성의 중심역할을 담당했다. 그중에서도 서기산공원과 선교리공원처럼 일본군 전사자 기념비는 기단 위에 비를 세우고, 주변을 휀스와 침엽수로 장식했다. 일제강점기 평양내 전통건물은 방치되거나 멸실되었는데, 모란대공원의 현무문과 칠성문, 대동문공원의 대동문은 일본군 관련 영웅 서사로 보수되고 정비되었다. 이들 전승 관련 공간은 엽서를 통한 학습적 기억이 아닌 공원을 실제로 방문하게 만드는 기제로 작용했다. 전쟁의 기억을 내포한 장소인 공원을 방문할 경우 지면을 통한 평면적 체험이 아닌 공간을 공감각적으로 체험하도록 구축되었다. 공원의 방문은 관광을 통한 평양의 경제적 부흥을 위한 노력에 일환임이 기저에 있었다.
셋째, 공원의 계획과 조성과정에는 기존에 없었던 방식과 기법이 도입되었다. 모란대공원에는 당시의 공학과 임업의 선진국이었던 독인 출신의 게오르그 데 라란데에게 설계를 의뢰했다. 조감도를 통해서 실현예정 공원의 이상적인 모습을 시각적으로 도출했다. 공원에 도입된 시설물은 파고라, 의자, 분수, 전등 등 기존에 없었던 종류였다. 기타 다른 공원 조성에는 측량을 통한 실측 내용을 청사진 도면으로 구체화하였다. 이처럼 공원조성에는 근대를 보여주는 현시의 장소이자, 조선의 전통구조물을 점경물로 만드는 대상화가 진행되었다.
넷째, 공원이란 공간의 발생 배경과 특성상 계급에 상관없이 누구나 향유하는 공공성과 평등성이 내포한 공간이다. 그러나 평양에 조성된 공원은 일본인 공원에 대한 풍부한 예산 지원과 조선인이 주로 이용하는 공간에는 예산 미집행이라는 구분이 있었다. 소규모이지만 일본인 거류지와 인접해 있는 주변 환경의 특성을 반영한 삼각공원과 류정공원이 조성되었다. 조선인 거주지에 인접하거나 주로 이용하는 만수대는 결국 공원이 못하고, 관공서 부지로 변모했다. 관공서 신축지 발굴된 고구려 유적은 보존되지 못하고 제거해버렸다. 이처럼 예산 집행, 건물 보수, 역사적 지층의 존치여부에는 차별이 있는 시기였다.
다섯째, 경계를 갖춘 공공의 공간인 공원에는 다양한 유형의 상업시설이 등장했고, 공원 내외부에 입지했다. 모란대공원 내부에 요정이 들어서면서 공원 내 시설물은 요정의 일부 시설처럼 사유화되었다. 모란대공원 내 요정 전면 석탑은 일본식 정원을 조성하였고, 공원 내 건물을 요정 내 정원의 점경물처럼 활용했다. 대동문공원과 인접해 있는 기생학교는 대동문 일대를 배경으로 한 사진에 자주 등장했다. 기생 관련 엽서들은 공원과 조선의 전통구조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평양의 공원과 기생의 이미지를 병치시켰다. 서기산공원의 공회당은 일제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전람회와 박람회 장소로 활용되었다. 공원은 공공공간임에도 불구하고 허용된 상업화와 이용의 관제화를 통해서 기생과 함께 풍광을 향유하거나 일제 이데올로기 확장의 장소였다. 그러나 당시에도 일반 부민의 위안 장소인 공원이 상업화와 관제화에 대한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 평양에 조성된 근대공원을 중심으로 평양에 부여된 도시적 성격을 재해석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음에 의의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