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II. 일제강점기 경성의 녹지 인식
1. 조선 후기 한양의 녹지 유형과 황폐의 원인
2. 일제강점기 경성의 도시 녹지 진단
III. 일제강점기 경성 도시녹화의 실천
1. 계몽적 녹화 운동
2. 도시녹화 실천 기법
IV. 일제강점기 도시녹화 관련 산업
1. 총독부 주도의 종묘장과 묘포원을 통한 녹화재료 공급
2. 경성 내 수목의 민간 판매
V. 결론
I. 서론
녹화(綠化)의 사전적 의미는 ‘산이나 들 따위에 나무나 화초를 심어 푸르게 함’이다. 도시녹화(Urban Greening)는 ‘수목 따위를 이용하여 도시를 미화하거나 푸르게 가꾸는 일’을 말한다. 녹화의 일차원적 의미는 수목을 심는 행위이지만, 행위에 의한 결과는 황폐한 산림을 복구한 생태성 확보, 도시 미적 기능 증가, 녹색의 휴식제공이다.
현대에 와서 도시녹화 관련 연구는 다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옥상녹화를 포함한 대상지의 확장(나혜영・변병설, 2006), 지속가능한 도시를 위한 기법으로의 역할(변병설, 2005), 산림녹화까지의 포함(진종현, 2016)하는 추세이다. 조선의 개항 이후 타자의 시선에서 조선 산림의 황폐화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었다. 조선을 방문했던 이들의 기행문에는 수목이 사라진 민둥산이 서술되었고, 사진으로 찍혔다. 일제강점이 시작되자 조선 사람의 문제점으로 구체화되었고, 이를 해결하려는 방안으로 도시녹화가 제시되었다.
일제강점기 도시녹화의 실천은 단지 녹화를 위한 물리적 사업만이 아니라 수목에 대한 인식 환기와 전환을 위해서 계몽적 운동이 함께 진행되었다. 도시녹화가 실시된 물리적 공간은 산림지역과 도시지역으로 구분된다. 산림녹화는 황폐한 산의 복구와 재해 방지, 임산물에 의한 생산성 확보를 위해서 조림(造林)사업, 사방(砂防)사업을 실시했다. 도시녹화는 삭막한 도시환경 개선이라는 도시미화(都市美化)뿐만 아니라 도시민의 위생과 보건, 위락공간 확보를 내포한다. 또한, 근대도시를 표상하는 이미지를 확보하기 위한 시민계몽 차원의 운동으로 발전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일제강점기 경성에서 시행된 도시녹화 행위를 유형화하고, 사업 내용 분석을 통해서 도시녹화의 근대적 역할을 도출했다. 더불어 일제강점기 도시녹화가 대두된 사회적 배경과 일제의 의도, 확산을 위해 전개된 계몽 운동, 이와 맞물려 구축된 관련 산업을 분석했다.
일정 시기에 행해진 기법(技法)은 단순한 기술력을 보여주는 행위가 아니라 시대적 기준인 제도와 재료에 의해서 구축된다. 도시녹화 대상지와 실행 기법은 당시의 도시환경과 사회적 배경을 해석할 수 있는 준거이자 기존과 다른 관점이다. 이는 선행적으로 진행된 일제강점기 경성의 물리적 환경 분석과 다른 해석으로 의의가 있다.
II. 일제강점기 경성의 녹지 인식
1. 조선 후기 한양의 녹지 유형과 황폐의 원인
조선시대 한성 내사산(內四山)이 지방의 산과 다른 점은 왕조 번영 도모를 목적으로 지맥 보호와 보토(補土)를 행했다는 점이다. 조선 초기 산림정책은 산림 공유제를 천명했다. 국용 목재 확보와 산림 보호를 위하여 금산(禁山)과 봉산(封山)을 지정했다. 1392년에 종묘 전면의 소나무 벌목 금지, 1411년에 목멱산의 3,000명을 동원한 20일간의 소나무 식재, 1424년에는 예조가 공문을 내려 왕릉 제단 주변의 소나무 식재 지시 등이 행해졌다.
내사산으로 둘러싸인 한양도성 특성상 도성 내부의 녹지 유형은 18세기에 그려진 <<도성도(都城圖)>>로 확인된다. 경복궁, 창덕궁과 창경궁, 종묘, 경희궁, 사직단, 경모궁과 같이 조선왕조와 관련된 공간은 소나무 숲인 녹지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그러나 이는 담장으로 둘러싸인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녹지공간이었다(그림 1 참조).
한양은 수도라는 특성으로 내사산뿐만 아니라 왕실과 한성부의 중층적인 관리 범위가 있었다. 산림에 대한 관리적 차원의 범위는 ‘성저십리(城底十里)’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속대전(續大典)』, <<사산금표도(四山禁標圖)>>에서 확인되는데, 내사산을 연결하는 도성에서 도성 밖을 10리까지 경계로 한 것이다. 도성 밖 경계 원칙은 10리지만, 산 능선과 하천이 경계가 되어 10리가 넘는 곳도 있었다. 성저십리 보호는 내사산과 외사산의 금산제도와 도성 내 주요 지점의 민가 규제로 명시화되었다. 금산 범위는 성저십리와 거의 동일하며, 한성부 중심의 주요 행정기관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김현욱, 2003).
조선시대 후기부터 한양도성의 인구 증가에 따른 산림황폐 문제가 등장한다. 18세기 후반 서유구(徐有榘, 1764-1845)는 활발한 온돌 보급으로 땔감의 사용이 증가하여 주변 산이 민둥산이 되어감을 지적했다(서유구 저, 임원경제연구소 옮김, 2016). 구들방의 아궁이를 ‘이 산 저 산 다 잡아먹고도 어흥 한다’는 속담으로 표현할 정도였다(최현배, 1962). 연료재 소비 증가 외에도 건축 용재, 선박 용재, 제염, 제철, 도자기 제조를 위한 산업용 연료재로 목재가 소요되어 산림의 지속성에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시선으로 조선인의 나태와 무기력의 근원을 온돌로 규정했다. 온돌 사용 증가로 산림이 황폐화되고, 이로 인한 다양한 문제가 야기된다고 설파한 온돌망국론(和田義睦, 1905)까지 확장되었다. 온돌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1930년대까지 지속되었다(<<조선일보>>1930.11.27).
『고종실록』1897년(고종 11년) 3월 3일 기사에서 영의정 이유원(李裕元, 1814-1886)은 상소를 통해 산림 황폐화의 원인과 문제점을 지적했다.
송금(松禁)은 국정(國政)의 하나입니다. 배를 만들거나 기둥이나 들보로 쓰는 데 소나무를 재료로 쓰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요즈음에는 심고 가꾼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도끼로 나무를 찍는 것이 날로 심하여 산에는 씻은 듯이 나무가 없어졌으니 이것은 다 법령이 해이해졌기 때문입니다. 우선 함부로 찍는 폐단을 금지하며 또한 빈 땅에 옮겨다 심고 기르며, 제도(諸島)나 봉산(封山)에는 들어가 살거나 농사짓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각 군문(軍門)에 분부하여 감히 태만하는 일이 없게 하며, 일체로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행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배와 건축 자재로 유용하게 활용되는 소나무를 심고 가꾸지 아니한 체 벌목을 일삼아 민둥산이 되었는데, 원인으로 법령의 해이함을 지적했다. 해결책으로 묘목의 생육환경 조성, 봉산 내 거주와 경작 금지를 철저하게 감시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조선시대 내내 산림 황폐화를 개선하기 위한 대대적인 식목은 진행되지 않았다.
2. 일제강점기 경성의 도시 녹지 진단
1894년 조선을 방문했던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은 여행기에서 한양에 대한 첫인상을 “도시는 거의 짚으로 된 낮은 갈색 지붕의 바다처럼 단조로우며, 나무가 없고, 확 트인 공간이 없다. 산에는 과수원과 가늘고 긴 소나무를 제외하면 나무가 없다(I.B 비숍 지음, 신복룡 역, 2019)”라고 표현했다. 산림에 대한 인식이 발전해있고, 수목이 풍부했던 서양 도시보다 한양의 민둥산은 강하게 인식된 것이다(그림 2 참조).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와 「대조선독립협회보」에 ‘城市多種樹木之益 有益之樹易地遷栽’처럼 수목은 다양한 유익함이 있기 식재의 필요성과 수목 활용을 통한 경제성을 부각시켰다(<<독립신문>>1896.8.11, <<대조선독립협회보>>1896.12.31). 이외에도 수목이 지닌 다양한 장점(<<태극학보>>, 1907)과 산림 연구의 필요성(<<대한흥학보>>, 1910)을 거론했으나 거시적 측면의 논의로 실질적인 실천에 이르지는 못했다.
1907년 『서우』에서 임학박사인 미치야 마코토(道家允之)가 쓴 논설 제목은 ‘한국의 임업’이다. 조선의 독산(禿山)은 경제와 안전에 피해를 주는 위험요소이기 때문에 조속한 식림이 필요하다고 했다. 산림 황폐는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서 당장에 필요한 철도 부설 목재가 일본보다 3배가 비싸기 때문에 근대화의 저해요소로 작용한다고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일제강점이 시작되자 경성 내 민둥산의 원인 분석과 대안 제시, 그리고 조선을 상징하는 특정 수목에 대한 부정적 의견이 등장했다. 대표적으로 소나무는 생장이 느리며, 하부에 다른 생물이 살 수 없고, 수십 년간 울창하게 자랐더라도 충해를 입으면 하루 만에 고사하는 특성을 지녔다고 했다. 조선인의 오래된 성정은 소나무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건강한 잡수(雜樹)를 천시하는 것이 조선 산림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는 단지 소나무가 지닌 생육적 특성만을 거론한 것이 아니라 일제의 시선으로 바라본 조선에 대한 비하적 감정을 투영하여 망국수(亡國樹)라 부르기 시작했다(<<매일신보>>1914.2.7). 조선 국토면적의 80% 이상인 산에는 적송이 주요 수종이며, 솔나무, 잣나무, 전나무가 다수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조선의 산에서 자라는 침엽수는 충해에 약한 공통점을 부각시켰다.
일제는 조선에 자라는 나무를 빗대어 조선인의 국민성을 폄훼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조선인은 공익성 결핍으로 수목의 남벌과 도벌이 횡행하며, 단속해도 소용이 없다고 했다(<<동아일보>>1924.4.5). 민둥산으로 인해서 하절기 수해가 문제이지만 산림을 아끼는 애림사상(愛林思想)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조선일보>>1933.9.2).
조선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위해서는 소나무를 대체할 수목 식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수종 선정 조건에는 척박한 환경에서 잘 자라며, 빠른 생장 속도 그리고 성냥 재료와 철도 침목 사용처럼 활용도가 높아야 한다고 했다. 유망수종으로 백양목, 아까시, 포플러를 거론했다(卦場定吉, 1911). 1907년부터 경성식림묘포장에서 진행한 산림에 관한 연구결과에서 조선의 산림환경에 적합한 나무로 참나무와 개암나무, 유실 수확과 목재 활용이 좋은 밤나무를 제시했다.
이처럼 일제는 조선인의 소나무 애호를 주변 환경의 황폐를 부르는 원인으로 지적하며, 조선인의 성정과 결부시켜 비하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이때 경성식림묘포장과 같은 일제의 관공서에서 진행한 시험 결과를 객관적인 근거로 조선 산림 변화를 도모하는 수종으로 제시했다.
III. 일제강점기 경성 도시녹화의 실천
1. 계몽적 녹화 운동
1) 도시녹화의 요구도 확산
조선시대 한양의 녹지는 왕실과 양반처럼 특정 계급의 보호로 유지되었다. 1882년에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이 발표한 「치도규칙(治道規則)」은 도로 정비와 가가(假家) 금지를 통해서 도시 위생을 표방한 도시계획이었으나 녹지는 거론되지 않았다.
1876년 개항 후 외국을 경험한 조선 지식인을 중심으로 녹지와 공원의 중요성 인식이 생성되었다. 1881년 일본에 파견된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 중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의 『서유견문』과 일본, 중국, 미국에 유학했던 윤치호(尹致昊, 1865-1945)의 일기를 보면 녹지의 중요성과 공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에서 수목의 경제적 효용성과 도시적 기능을 홍보하며, 독립공원 조성으로 구체화했다. 그러나 독립협회 해체로 시민의 실질적인 공원 체험은 한정적이었다. 대한제국 시기 종로에 탑골공원이 조성되었으나 초기 모습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어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공원이었다.
일제강점이 시작되자 경성의 도시 녹지를 진단하고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이 제시되었다. 1907년 안전과 위생을 위하여 사방공사를 시행하고, 도로공사 설계도면에서 가로수가 등장하나 법제화로 인한 강제성은 없었다.
실질적인 도시녹화에 대한 중요성 인식 배경에는 도시미화 운동과 전원도시 이론의 확산 또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898년 영국의 하워드(E. Howard)가 발표한 전원도시(田園都市, garden city)는 일본에 수용되어 ‘花園都市’와 ‘花園農村’로 번역되었다. 농촌과 도시의 장점뿐만 아니라 교외주택지 개념으로 확산되어 녹음이 우거진 쾌적한 주택지를 의미했다(염복규, 2016). 이는 자족 기능을 갖춘 계획도시이지만, 쾌적한 주거지에서 녹음이 중요하게 작용했음이 확인된다. 더불어 19세기 미국에서 발생한 도시미화 운동은 일제를 통해서 도시미를 강조하는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1920년 청계천 남쪽의 일본인 거주지 확장을 목적으로 북촌 진출을 위해서 일종의 도시미화 운동을 벌이고, 시가지를 아름답게 정비하는 배경이 되었다(김경민, 2017). 이때 도시미화에 해당하는 도시녹화기법은 공원 조성과 가로수 식재가 포함되었다.
도시녹화 관련 사업이 법제화되기 전까지의 도시녹화 관련 노력은 도시녹화의 필요성을 인식시키는 계몽적 성격이었다. 도시녹화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는 공간 조성이 사업화되었으나, 일본인이 주로 거주하는 남산 일대와 조선총독부와 같은 일제의 권력상징 기관과 연결된 도로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한국의 근대 도시계획의 시작은 1934년 6월에 제정된 「조선시가지계획령」이라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도시녹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공원은 1940년의 ‘경성시가지계획공원결정안’으로 법적 지위를 확보했다. 이처럼 도시녹화에 대한 법적 근거는 1930년대에 이르러서야 제정되었다.
2) 전조선 녹화 운동
1900년대 초기에는 임업의 중요성에 관한 주장이 등장했고, 일제강점이 시작되자 산업과 연계시킨 수목 식재와 관리, 1920년대는 산업과 녹화에 적합한 수종의 배포과 대규모 식재를 유도했다. 이는 도시에서 나무를 단지 산업 자원이 아닌 경관적인 측면과 미학적인 측면을 고려한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보는 시선이 내재되어 있다. 적합 수종 선정은 도시 기능 향상과 함께 경제성과 활용성에 대한 평가를 전제로 했다. 식재의 임의성이 아닌 생육환경 조성을 피력하여 거시적 필요성에서 미시적 관리까지 확장하는 추세였다.
수목 식재 행위를 녹화 운동이라고 한 배경을 보면 녹화에 대한 적극성이 확인된다. 단지 경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조선 전체에 해당하는 사항이었다. ‘전조선 녹화 운동’으로의 확장은 식림 문제를 일반 국민의 문제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녹화 운동’은 관보에 등장하는 공식적인 정책이 아닌 당시 미디어를 통한 홍보적인 성격이 강했다. 신문기사를 보면 수목 식재는 도시미화의 기본이며, 부민의 보건 향상에 도움을 준다고 강조했다(<<동아일보>>1931.3.31). 녹화운동은 조선 산야 전체에 확산하여 산림을 애호하기에 힘써야 하며(<<동아일보>>1934.6.10), 지역에서는 녹화 운동에 기여가 출중한 사람을 선별하여 표창했다(<<동아일보>>1934.4.6). 경성의 녹음 없는 건조한 환경을 녹음이 우거진 푸른 도시로 만들기 위해서 선봉적인 녹화 운동을 위한 지속적인 예산 투입이 필요하다고 했다(<<동아일보>>1934.7.17). 녹화 운동의 일환으로 일본인이 많이 사는 남촌에는 벚꽃, 북촌에는 홍엽수인 단풍을 식재하여 계층별 거류지를 명소화하는 기법으로 활용하기도 했다(<<동아일보>>1934.12.28).
1930년대 이후에는 경성이란 도시에서 홍보되고, 실현된 ‘녹화 운동’은 일제의 조선 임업에 대한 새로운 사명으로 거론하기도 했다. 이때 조선통치의 공적을 찬양하는 방법으로 ‘조선이 푸르러졌다’와 ‘조선이 좋아졌다’를 등치시켜 설명했다(<<조선일보>>1940.1.4).
이처럼 일제강점기에 등장한 녹화 운동은 수목에 대한 장점과 효용성을 부각시키는 계몽적 성격뿐만 아니라 일제의 공적을 칭송하는 업적으로 활용되었다.
3) 현시적(顯示的) 기념식수
특정 행사에서 권위 있는 인물의 수목 식재에 관한 기록은 1909년 4월 5일에 등장한다. 순종(純宗, 1874-1926)은 1894년 이후 행하지 않았던 선농단 남단의 동적전(東籍田)에서 농사를 권장하는 친경식(親耕式)을 행했다. 행사에는 뽕나무와 소나무, 전나무 등 여러 종류의 나무 심기가 포함되었다. 1910년 5월 5일 친경식의 수목식재는 당시 조선총독부 농상공부 기사(技師)였던 사이토 오토사쿠(齋藤音作)의 주청으로 진행했다(그림 3 참조).
기념식수의 정례화는 1911년부터 신무천황(神武天皇)의 제일(祭日)인 4월 3일에 시작되었다. 총독부 주관으로 키우치(木內) 농상공부장관, 야마가타(山縣) 정무총감을 비롯한 총독부 직원 백여 명이 부청 주변에 전나무(樅)와 단풍나무(楓) 300본을 식재하는 행사를 진행했다(<<매일신보>>1911.4.5). 1933년 발간한 『조선임업일지(朝鮮林業逸誌)』의 사이토 오토사쿠(齋藤音作, 1866-1936)가 쓴 ‘기념식수의 창설 유래’에서 이를 제1회로 규정했다. 조선총독부 농상공부는 지역을 경성으로 한정한 것이 아니라 기념식수 확산을 위해서 대구, 평양, 목포 소재 각 부청과 학교에 소나무와 밤나무 250만 본을 보냈다(<<매일신보>>1911.2.8). 그해 7월에는 조선 전도에서 4,652,447주를 심었으며, 함경남도가 식재율이 가장 높고, 강원도가 저조하다고 발표했다(<<매일신보>>1911.7.18). 이후 한해를 결산하는 겨울에는 ‘기념식수 성적’이라는 명목으로 각 지역별 식수 본수를 공개하여 경쟁을 통한 식수를 독려했다. 제10회인 1920년을 예로 들면 식수행사에 참여한 39만명이 적송 453만 본, 백양류 470만 본, 흑송 271만 본, 상수리나무 202만 본, 아까시 175만 본, 밤나무 129만 본, 낙엽송 33만 본, 기타 98만 본을 식재했다고 했다. 제1회와 비교할 경우 1,303만 본이 증가했고, 누적은 15,764만 본이라고 발표했다(<<조선일보>>1920.12.4).
기념식수는 일제가 주관하는 행사의 필수요소로 인식되었다. 장소는 부청과 같은 관공서에서 공원, 유휴부지, 민둥산으로 확산되었다. 1921년을 보면 경성식림묘포장, 훈련원공원에서 진행했다.
1940년에는 4월 첫 주일을 애림주간으로 설정했다. 식민지 30년 동안 조선에 심은 나무는 속성수 위주로 5억6천만 본을 심었다고 평가했다. 수목은 식재 후 관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국유림은 영림서가 주체가 되어 식재 이유와 수목 관리 교육을 실시했고, 학교와 관공서에는 수목 견본원(見本園)을 조성했다(<<조선일보>>1940.4.3).
이처럼 기념식수는 1911년 신무천황 제일을 기념하는 행사로 정례화되었으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각 지역에는 유료로 수목을 송부하고 실적을 공개하여 독려했다. 기념식수 장소는 관공서가 아닌 주변 공간으로 확산되었고, 경성시민이 참여하여 수목의 효용성을 현시적으로 체험하는 보편적인 행사로 자리잡았다.
2. 도시녹화 실천 기법
1) 안전을 위한 사방공사(砂防工事)
사방공사는 산 중턱이나 계곡에서 산사태, 토양의 침식작용 등을 방지하기 위해 실시하는 공사를 말한다. 1907년에 백운동인 창의문 서쪽 국유림에 첫 공사를 실시했다.
1914년에는 삼각산의 사방공사를 위해서 경성식림묘포에서 식림 견습을 한 인부를 투입했다(<<매일신보>>1914.5.6). 사방공사에서 토목적인 중요성뿐만 아니라 수목 식재에도 전문기술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1922년에는 임업시험장 발족 후 사방 조림과 파종에 관한 시험에 착수했다. 높은 옹벽에서 시행되는 수목 식재는 위험도가 높기 때문에 안전성과 시공 용이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임업시험장에서는 1926년에서 1932년까지 조림수종의 산지별 식재 시험을 통해서 각 지역의 식재 수목 정착율을 높이고자 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사방공사의 필요성은 증가했고, 공사 효과를 정책 홍보에 활용했다. 1907년 백운동 사방공사는 12년이 지난 모습과 초기 공사 모습의 비교 사진으로 식민지 통치의 선정(善政)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장치가 되었다(그림 4 참조). 주교정(舟橋町) 일대는 청계천 범람으로 인한 상시 침수지역으나, 주변 민둥산의 사방공사를 통해서 식재를 통한 풍치 향상, 모래바람 방지를 통한 위생 향상을 홍보했다. 더불어 청계천 내 토사의 유입이 방지되어 준설하는 비용까지 절감했다고 했다.
1930년대에 사방공사는 산림녹화와 궁민구제(窮民救濟)를 목적으로 내세웠다. 1931년 농업공황 여파로 경제적으로 몰락한 농민을 사방공사에 투입하여 실업 구제와 궁핍 해결을 목적으로 했다. 이는 저임금 노동력을 사용하면서도 경제적 구제를 도모한다는 이중적 면모였다.
조선총독부는 법적 근거 없는 사방 사업의 추진 과정에서 지장이 발생하자, 1933년 8월 [조선사방사업(재령 제17호)]과 1934년 2월에 [조선사방사업 시행규칙]을 공포하고, 사방공사 10년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토지 소유자는 국가가 시행하는 사방공사를 거부할 수 없는 강제성이 있었고, 사방공사를 통한 이익 발생 시 공사비용 부담, 사방공사에 포함된 보안림에서의 임산물 채취는 금지되었다(<<조선일보>>1936.6.21). 이는 예산 부족과 함께 토지 소유주의 불만 증가로 사방공사 활성화의 저해요인으로 작용했다.
2) 녹지의 장점을 경험하는 근대공원
우리나라는 개항기인 1880년대 해외 유학파 지식인들을 통해서 도시 내 공원의 공리적 기능과 사회적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실질적인 첫 공원은 1884년 ‘public garden’이라 표기된 각국공원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영문표기에서 알 수 있듯이 인천 조계지 내 각 영사관이 공유한 공공정원(公共庭園) 개념이었다. 1897년에는 남산 아래 일본인 거류지 부근에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 공사를 진행했고, 주변을 왜성대공원이라 불렀다. 종로 원각사지십층석탑이 있는 부지는 민가를 헐고 담장을 둘러서 공원 조성을 알렸고, 서대문 밖에서는 독립협회가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구축했다. 각 공간은 공원으로 명명되었지만, 실질적인 공원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 조성은 미미했다. 1907년 탑골공원에 다양한 수목과 휴게시설이 도입되면서 비로소 공원의 경험이 시작되었다.
일제강점기 경성의 위상만큼 공원 조성 주체의 대상지 선정과 공간구축 과정에 변화가 생겼다. 첫째 유형은 경관이 수려하고 녹음이 풍부한 조선의 전통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공원이다. 대한제국군인 추모 공간이었던 장충단(奬忠壇), 조선시대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사직단(社稷壇), 조선 군사의 시험과 무예의 연마장소였던 훈련원(訓鍊院), 정조의 아들인 문효세자(文孝世子)와 의빈 성씨 묘역이었던 효창원(孝昌園)이 공원이 되었다(그림 5 참조). 둘째 유형은 일본 거류민이 주축이 된 신사(神社)와 짝을 이루는 공원이다. 개항 이후 증가한 일본 거류민이 터전을 이루고 모여 사는 장소에 신사를 조성한 후 주변에 휴게시설과 다양한 수목을 식재한 공원이다. 부산 용두산 신사의 용두산공원에서 시작하여 인천 신사와 동공원을 거쳐 경성신사까지 공원으로 변모했다. 셋째 유형은 조선시대 위엄과 정치의 공간이었던 궁궐이다. 궁궐에 벚나무를 대량 식재하고, 놀이 시설과 편의 시설을 즐길 수 있으며, 동물원과 같은 볼거리를 만들어 테마파크처럼 개방한 창경원이 된 창경궁, 중앙공원으로 변모한 덕수궁이 해당한다. 넷째 유형은 조선의 병참 기지화와 도시계획 적용으로 새롭게 도입한 유형의 공원이다. 용산역과 철도 관사에 인접한 운동장을 갖춘 철도공원, 작지만 최초로 아동을 위한 앵정공원이다. 1930년대에는 경성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공원 조성이 도시계획의 필수조건이 되었다. 조선 내 도시 또한 서구처럼 봉건제도의 붕괴, 심각한 주택난, 벌어진 빈부격차, 위생 개념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공원은 공공성을 표방하여 경성시민 누구든지 제약없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었다. 공원에서는 기념식수 행사뿐만 아니라 도시녹화의 실질적이며 복합적인 효용성을 직접 경험하는 공간 역할을 담당했다.
3) 녹지를 선적으로 연결하는 가로수
1903년 조선의 도로 개수와 조성의 주도는 일본이었다. 1904년 러일전쟁의 승리 이후 근대도로 개설을 구체화했으며, 1905년 통감부 조사에는 도로 경계 표시와 통행인에게 그늘 제공을 위한 가로수 식재를 권장했다. 1906년 통감부 설치 후 도로 건설과 연차 계획 수립은 그해 4월 내부(內部)에 치도국(治道局), 각도에는 치도공작소(治道工事所)를 설치했다. 1907년부터 도로공사에 착수했고, 설계도에 가로수 식재가 등장하나 실질적인 법적 기준은 없었다. 1917년 『도로요람』에서 구체적 식재 기준을 제시했지만, 법적기준은 1938년 「조선도로령」에서 ‘도로의 유지’ 부분에서 ‘병수(並樹)의 식재’가 등장한다.
가로수 식재 목적 중 하나는 ‘경성의 풍치를 돕기 위함’이며, 가로수가 도시미화와 부민 위생 향상에 필수조건임을 거론했다(<<매일신보>>1917.4.17). 더불어 보행자 녹음 제공, 보행자의 미적 쾌감 부여, 경성의 녹화 영역 확장을 담당한다고 했다(<<동아일보>>1934.2.6).
일제강점기 시구 개수와 개정은 경성의 도로망 구축 과정으로 도로 확폭과 포장 등 근대적인 도로공사에서 가로수를 식재했다. 이때 가로수는 도심지라는 환경에 적합한 생존력, 통행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수형, 차량 이동을 방해하지 않는 지하고 등 다양한 조건이 제시되었다. 경성에서는 중요 도로에서 가로수 식재를 장려했고, 광화문통・동대문・삼각지・원정(元町)・훈련원 등처럼 일본인 거주지와 근접한 지역에 가로수를 우선적으로 식재했다(<<동아일보>>1934.5.9).
도심지인 경성 내 가로수는 너무 수령이 어린 나무 식재, 경성 부민 관심 부족, 개인 이익을 위한 절도, 어린이 장난으로 생존율이 낮았다. 생존율 향상을 위해서 활착을 위한 물리적 장치 활용, 훼손 시 벌금 부과, 시민 보호와 협력의 필요성, 대체 수종 보식 등을 진행했다.
초기에는 아까시, 양버즘나무, 포플러, 향나무를 가로수로 식재했으나, 고사율이 높아지자 1930년대에는 주로 양버즘나무로 대체했다. 다양한 수종보다는 경성 도심지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에 관리와 생장의 용이성이 선정 기준이 된 것이다. 가로수는 경성의 도시녹화 유형에서 선적인 부분을 담당하며, 근대성과 계절감을 나타내는 요소로 인식되었다.
4) 도시 구조적 소규모 녹화
1930년대 이후에는 대규모 부지가 아닌 도시의 구조물과 연계된 소규모 공간에도 도시녹화를 진행했다. 「조선일보」1934년 4월 21일 기사는 ‘도시의 녹화공작(綠化工作)’이란 제목이다. 경성 광화문통 교차점에서 총독부 정문 앞까지 전차와 자동차 600m 길 중앙, 원정1정목 입구 만초천 주변 작은 부지, 삼각지 버스 정류장, 경성 내 주요 관공서와 중요 지점을 연결하는 도로변에 수목을 심어서 녹음을 부여하는 녹화공작을 진행한다고 했다. 도로와 인접한 가로공원 형태의 수원(樹園)과 유보장(遊步場) 또한 수목을 식재하여 녹음을 지닌 공간 역할을 지녔다.
이때 소규모 녹지대는 도심지 내 녹화기능 함양에는 효과가 미미하였지만, 도시미관과 관련된 경관적 측면을 담당했다. 더불어 교통로의 결절점(結節點)에 조성되어 안전지대 역할도 부가되었다(<<동아일보>>1934.7.17). 이처럼 일제강점기는 소규모 공간까지 녹화를 진행한 시도는 도시녹화에 대한 보편성을 획득한 지표였다고 볼 수 있다.
IV. 일제강점기 도시녹화 관련 산업
1. 총독부 주도의 종묘장과 묘포원을 통한 녹화재료 공급
일제강점기 경성의 도시녹화를 위해서는 다량의 묘목이 요구되었다. 이때 수목 공급은 묘포장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통감부 설치 이후 1907년에 수원, 평양, 대구에 각 1개소씩 3개소의 묘포장을 조성하고 묘목을 생산하여 무상배급 형식으로 조림을 장려하였다. 일제강점 이후 각 도에는 1만 정보 내외의 국유림을 양여하여 도모범림(道模範林)을 경영하게 하고, 각급 학교에는 기본 재산 형성과 생도들의 식수실습을 위하여 실습림을 경영하도록 권장했다. 1930년대에서도 지속적으로 양묘강습회를 개최했다(<<경성일보>>1930.6.28). 양묘장이 확장되었지만, 생산된 묘목은 무료 배포가 아니었다. 경성식림묘포에서 생산된 묘목이 각 학교, 관공서 등에 유상으로 배부하는 기사가 자주 등장했다.
묘포장은 단지 수목을 키우기 위한 예비장소 역할만 한 것이 아니었다. 수목의 산업적 가치를 시험을 통해 확인하는 역할도 했다. 실례로 향후 연료로 사용할 수 있는 효율성을 파악하기 위해서 제탄(製炭)시험을 실시했다. 1912년 제탄시험에 거론된 나무는 아까시와 포플러였다(<<매일신보>>1912.12.6). 당시 종자확보는 중요한 필요조건이었는데, 경기도 장관은 관저의 상수리나무 열매를 채종하여 묘포장에 기증하는 각개 각층의 노력이 있었다(<<매일신보>>1914.1.16).
이처럼 묘목 제공과 수목 관련 교육 역할로 묘포장은 중요했지만, 1920년대까지 경기도에는 3개소에 불과했다. 당시 행정구역으로 보면 청운동, 금정(錦町), 고양부 숭인면 안암리에 있었다(<<동아일보>>1920.5.20, 그림 6 참조). 대규모 부지에 식재된 ‘씨나무’로 불린 묘목은 경성의 명물로 불렸으며, 다량은 북만주에 수출하기도 했다(<<조선일보>>1937.11.8).
묘포장에서 재배하는 수종은 가로수와 같은 공적인 장소의 식재가 목적이었다. 일본과 조선에서 자라는 수종뿐만 아니라 서양에서 가로수로 활용되는 양버즘나무와 포플러류를 묘목으로 길렀는데, 척박한 토양과 비옥한 토양에 자라는 생육특성을 고려했다. 더불어 조선산앵(朝鮮山櫻)도 다수를 길렀는데, 정원용으로 팔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때 수목 배포 신청은 경성부 권업계(勸業係)가 담당했다(<<동아일보>>1931.12.2).
1930년에 수원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이 생기자 경성식림묘포는 도립상업학교와 제2고등보통학교로, 효창원 앞 금정의 도묘장은 철도관사로 변모하여 숭인면 종묘장만 유지되었다.
2. 경성 내 수목의 민간 판매
종자 개발과 수종 갱신은 총독부 주도의 종묘장과 묘포장을 통해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경성시민에 대한 직접적인 혜택은 아니며, 총독부 주관 행사와 관공서 관련 공사의 재료 제공 위주였다. 일제강점기 민간의 묘목과 화훼판매는 화원과 농원에서 담당했다.
1915년 지도를 보면 용산 둔지산 구릉지에 용산농원(龍山農園), 국전농원(菊田農園), 대서농원(大西農園)이 있었으나, 1922년 지도에서는 일본 군부대가 되었다. 1920년대 신문기사에서 민간 묘목 판매소를 수원 부국원(富國園), 경성부 남대문통(南大門通), 농림상회(農林商會), 경성부 외 뚝도 구차미농장(久次未農場)을 거론했다. 그러나 부국원을 제외하고는 경성 시내에는 직접 생산자는 없고 황금이정목 종묘회사에서 외지에서 구입한 것을 판매한다고 했다 (<<조선일보>>1937.2.4). 1920년에는 왕십리역 앞 경성화원(京城花園)에 ‘조선원예협회(朝鮮園藝協會)’가 조직되었다(<<매일신보>>1920.4.3). 자작인 마츠 다이라(松平直平), 남작인 한창수(韓昌洙), 의학박사인 코조오 켄지(古城憲治), 한상룡(韓相龍)가 주축이 되었다. 경성원예협회는 교육과 신문기사를 통해서 조선 내지의 일본인과 조선인에게 원예 취미를 보급하기 위한 꽃, 채소, 약초 재배법을 알려줬다.
경성에서 비교적 넓은 부지에서 수목과 화훼류 판매로 대표적인 곳은 ‘백화원(百花園)’이다. 백화원은 동사원정 49번지 일대 구릉지에 위치했다. 유리온실과 일정 부지에 초화류를 식재하여 계절을 보여주는 기사의 장소로 등장했다(그림 7 참조).
화원을 통해 경성에서 수요되는 화훼는 전문기술이 필요한 분야로 당시 경성에는 두세 개의 전문원예원이 있었다. 화훼를 키우는 원예는 교외 농가 부업으로 각광받았는데, 판매처는 백화점과 야시장이며, 공급처는 왕십리, 뚝섬, 마포, 은평면이었다. 유망한 화훼류는 금잔화(金盞花), 미녀류자(美女柳子), 적백합(赤百合), 시차초(矢車草), 제충국(除虫菊), 베라 채(蔡) 등이었다(<<조선일보>>1932.5.13).
1930년대부터는 적정한 식목 시기에 맞춰서 일주일간 나무 시장이 형성되었다. 4월 초 신무천황 기념식수일 주간에 도시 미관 향상과 보건을 내세워 나무 시장을 홍보했다. 경성묘목조합, 경성부, 조선산림회가 후원한 나무시장은 삼월오복점(三越吳腹店) 뒤, 본정(本町) 전차 종점, 광화문 기념비 앞, 길야정(吉野町) 입구, 용산 연병장 전차 종점 등 5개소이다(<<조선일보>>1931.3.31). 나무시장은 광화문 기념비를 제외하고, 대부분 일본인 거주지와 인접한 곳에 형성되었다.
일제강점기 경성에서 민간의 수목 판매는 화원을 통해서 이루어졌으며, 1920년에는 협회를 구축하여 조직적인 활동을 진행했다. 화훼는 농가 부업을 주목받기 시작했고, 화원은 백화원을 제외하고 경성 외곽에 입지했다. 가정용 묘목은 기념식수일에 맞춰서 형성된 일시적인 수목시장에서 구매할 수 있었다.
V. 결론
조선시대에서 일제강점 초기에 산림 황폐화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었다. 1900년대 초 사진에 등장하는 한성 주변의 산은 대부분 민둥산으로 찍혔다. 일제강점이 시작되자 조선의 산림에 대한 평가가 시작되고, 일제에 의해서 이를 해결하려는 방안들이 제시되었다. 이에 일제강점기 경성에서 실행된 도시녹화의 분석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시대 산림의 보호와 관련된 정책은 조선왕실 관련 공간과 내사산을 중심으로 한 성저십리를 경계로 집중되어 있었다. 조선 후기 온돌의 발달로 인한 땔감 사용 증가는 산림 황폐화의 원인이 되었고, 1890년대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 시선에는 민둥산이 강하게 각인되었다.
둘째, 일제강점이 시작되자 조선의 산림에 대한 원인 분석과 진단이 진행되었다. 민둥산의 원인은 조선인 특유의 소나무 위주의 애호 사상, 공익심 결핍에 의한 수목 남벌과 도벌, 수목에 대한 애림사상 부족이라고 했다. 일제에 의해서 조선인의 상징처럼 된 소나무를 망국수라 부르는 비하도 시작되었다.
셋째, 조선인의 수목에 대한 인식 향상을 위해서 계몽적인 녹화 운동을 실시했고, 도시에서의 수목 필요성, 생태적 역할, 산업 소재로의 중요성을 확산시켰다. 녹화 운동을 식민지 정책의 효과로 홍보했으며, 매해 겨울에는 식재 실적 공표와 기여자를 선정한 후 포상하여 독려했다.
넷째, 1911년부터 신무천황 제일인 4월 3일은 기념식수일로 지정하였다. 경성부청 주변에서 시작한 기념식수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일제가 주최하는 행사의 중요한 기점 행사로 작용했다. 이는 일제의 식민지 효용성을 보여주는 현시적 효과를 지닌 행사였다.
다섯째, 경성의 도시녹화를 위해서는 훼손된 산지에 대한 사방 식림 공사, 녹지를 유지한 곳에 근대공원 조성, 경성의 중요도로변의 가로수 식재, 소규모 공간의 녹지대 조성으로 실체화되었다.
여섯째, 도시녹화를 위해서 필요한 묘목은 총독부 주도의 종묘장을 통해서 진행되었다. 경성에는 청운동, 금정, 숭인면 안암리에 묘포장이 있었으며, 유료로 배포되었다. 민간 묘목 판매는 백화원이 대표적이며, 경성의 계절을 알리는 지표 장소로 활용되었다.
현대도시 문제점 중 미세먼지 저감과 열섬 현상 완화 등 기후변화에 대응 방안으로 도시녹화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도시 내 건조하고 삭막한 환경 개선을 위한 다양한 공법이 시도되고 있으며, 기술력 향상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이 진행되고 있다. 도시녹화는 현대라는 시간성만을 내포하고 있다고 가정되나, 실질적인 용어와 기법에 대한 강구는 일제강점기에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