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earch Article

국토지리학회지. 30 June 2023. 209-221
https://doi.org/10.22905/kaopqj.2023.57.2.8

ABSTRACT


MAIN

  • I. 서론

  • II. 전주읍성의 훼철과 공간 변화

  •   1. 조선시대 지도를 통해 본 전주읍성의 공간구성

  •   2. 일제강점기 읍성 훼철과 일본인 거류지

  • III. 일제강점기 전주에 이식된 종교공간, 전주신사

  •   1. 다가산과 전주신사의 입지

  •   2. 전주신사의 열격(列格)과 신축 이건

  • IV. 일제강점기 전주신사와 근대공원의 맥락성

  •   1. 일제강점기 전주의 근대공원: 다가공원과 길야산공원

  •   2. 조선시대 위락공간 활터와 전주신사 진입부의 충돌

  • V. 일제강점기 근대 도시문화의 매개

  •   1. 상징과 의례공간의 매개체와 차별의 도구, 다가교

  •   2. 일제강점기 전주 명소화의 매개체, 벚꽃

  • VI. 결론

I. 서론

공원(公園)은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녹색의 열린 공간으로 근대적 발명품이다(김해경, 2020). 우리나라 최초 공원은 1884년 일본과 청국 등 각국 조계지 공용으로 조성된 각국공원, 1897년 대한제국의 탑골공원 그리고 독립협회에 의해서 조성된 독립공원이 있다. 일제강점기 부산 용두산신사는 1899년 건립된 후 1915년과 1916년까지 용두산공원으로 조성되었고(정지영・강영조, 2006), 1911년 창건된 공주대신궁(公州大神宮) 주변은 앵산공원(고순영, 2022)이 되었으며, 평양신사는 모란대공원 내부에 위치하고(김해경, 2022), 왜성대공원은 경성신사(京城神社)로 변모(비온티노 유리안, 2016)했다. 일제강점기 새롭게 등장하거나 확산된 공간인 신사와 근대공원은 종교의 상징성과 위락적인 공공성을 지닌 공간 기능은 이질적이나 공간 구조 맥락은 중첩되어 있다.

전주에서 근대공원은 일제강점기에 도입된 신사와 상호관련성이 높다. 1916년 전주신사가 건립된 이후 다가산 일대는 다가공원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현재에도 근린공원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최진성(2006)의 전주신사 관련 연구는 일제강점기라는 식민지 특성을 부각시켜 지배와 피지배 관점의 해석으로 부정적인 의미가 강조되었으나, 실질적인 다가공원에 대한 서술은 간략했다. 전주의 공원 관련 연구는 근린공원을 주대상으로 하여 생태적 특성과 이용행태 분석이 주를 이룬다(이명우 외, 1989; 김창환 외, 2001; 김세천 외, 1992; 이창헌 외, 2013 등). 일제강점기 근대도시 전주의 변화는 전주읍성의 훼손과 멸실 과정, 일본인 거류지 중심부에 금융과 상업공간의 형성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김병희, 2015; 양미경, 2015; 박선희, 2003 등).

전주의 도시재생전략은 1900년대 초반에 형성된 도시한옥마을을 매개로 한 전통문화 재생산업이 대표적이다(윤정란 등, 2012). 일제강점기 각 지방에서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공간의 등장은 그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문화를 변모시키는 매개체 역할을 담당한다. 이때 근대도시문화의 확산은 단지 공간의 조성뿐만 아니라 공간의 접근성과 이용행태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전주신사와 근대공원인 다가공원은 일제강점기에 새롭게 등장한 공간으로 다른 지역과 차별성을 지닌 전주라는 도시의 문화적 재생전략으로 활용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전주에서 신사와 근대공원은 도시의 시대적 변화에서 등장했고, 공간적인 인접성과 이용으로 분리해서 해석할 수 없다. 이에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 이전 전주읍성의 도시구성과 훼철 과정, 일본인 거류민 증가와 전주신사의 건립, 조선시대 경승지의 공원적 이용, 신사와 공원의 새로운 이용에 따른 공간 충돌, 대규모 벚나무 식재를 통한 명소화를 분석했다. 이때 공간적 변화에 대한 신뢰성 확보를 위해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도상자료인 엽서와 사진, 평면적 공간구성이 확인되는 1918년에 측량된 1:10,000 지도를 비교한 정합성으로 검증했다. 이는 전주라는 도시에 영향을 미친 신사와 공원의 공간적 맥락에 대한 분석이며, 일제강점기에 구축된 공간의 객관성을 확보한 역사적 가치를 도출하는 과정으로 의의를 지닌다.

II. 전주읍성의 훼철과 공간 변화

1. 조선시대 지도를 통해 본 전주읍성의 공간구성

‘읍치(邑治)’는 조선시대 군현(郡縣)에서 중심행정 기능의 소재지이다(도도로키 히로시, 2005). 전주 읍치는 백제 말기인 555년(위덕왕 원년)에 ‘완산주(完山州)’가 설치된 것에서 기원한다. 통일신라시대에도 완산이라는 지명이 쓰이다가 757년에 ‘전주(全州)’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했다(전종한, 2020).

조선시대 전주부 지도는 읍성(邑城)의 구성요소를 검증할 수 있는 자료이다. 1872년 전주지도는 읍성 내 길의 구조가 확인된다. 풍남문(豊南門)에서 공북문(拱北門), 그리고 완동문(完東門)에서 패서문(沛西門)을 잇는 T자형 도로가 형성되어 있고, 각 방향 4대문은 외부와 연결된 입구였다(그림 1a 참조). 규장각 소장인 <지승(地乘)>에서 각 4대문은 옹성(甕城)이며, 4대문을 연결한 담장에는 망루가 조성되어 있다. 읍치 내 주요 관아는 내부 도로 교차점의 중심부에 분포한다. 객사인 풍패관(豊沛官)은 읍성 중앙 상부에 입지하여 높은 위계를 보여주며, 객사 전면에는 풍남문과 연결된 주작대로 형태의 넓은 도로가 형성되어 있다. 객사 남측으로는 주요 관아 시설이 자리하고 있는데, 선화당(宣化堂)이 있는 전라감영(全羅監營), 동헌(東軒)과 질청(秩廳)이 있는 전주부 관아가 위치한다. 경기전(慶基殿)과 조경묘(肇慶廟)는 읍성 동남쪽에 입지한다(그림 1b 참조). 18세기에 그려진 <전주지도>를 보면 읍성은 숲으로 둘러싸인 식생경관이 확인된다. 관아 후면부와 담장 경계 주변, 민가 사이에 활엽수림과 매화가 핀 모습을 묘사했다. 비교적 상세한 묘사를 보이나 읍성 주변 산세는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그림 1c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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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조선시대 후기 전주지도

다가산 일대의 지형은 1872년 지도에서 확인된다. 읍성 좌측으로 만경강에 다다르는 전주천이 묘사되어 있다. 전주천을 따라서 한벽루처럼 주변 풍광을 즐길 수 있는 루정과 읍성의 각 부분과 연계성을 보이는 다리가 묘사되어 있다. 풍남문과 연계된 홍예교 형태의 남천교(南川橋), 풍남문과 패서문이 연결된 목재다리 형태의 서천평교(西川平橋), 패서문과 연결된 징검다리 형태의 사마교(司馬橋)로 각 다리의 재료와 형태를 표현했다. 이때 전주신사가 들어선 다가산 일대는 사마교를 지나서 좌측에 활터인 다가정(多佳亭), 정면에는 화산서원(華山書院), 희현당(希顯堂), 우측부에는 사직단이 위치한다. 전주읍성을 둘러싼 산세는 대부분 명칭의 명기없이 산세만 묘사되어 있는데, 다가산은 명기되어 있어 전주읍성에서 경관적 가치와 중요도가 높음을 보여준다.

2. 일제강점기 읍성 훼철과 일본인 거류지

1890년대까지 우리나라 전국에 도성과 읍성이 약 140개가 있었고, 대한제국기 도시개조 계획에서도 존치되었으나 1905년부터 훼철이 진행되었다(김혜미, 2016). 전주읍성의 훼철 과정 기록은 당시 신문기사, 『전주부사(1907년)』와 『완산지(1911년)』에서 확인되며, 지도를 통해서 읍성의 멸실 여부가 확인된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시기에 읍성 일부 소실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1906년에는 읍성의 곳곳이 무너져 통행에 위험하나 정부는 보수할 여력이 없다거나, 전라북도 관찰사는 성벽 대신 새로운 길의 조성을 주장하여 구설에 오르고, 주민은 집터 확장을 위해 디딤돌 용도로 가져가는 경우도 있었다(≪제국신문≫1906.5.30, ≪대한매일신보≫1906.5.31). 이처럼 전주 읍성은 혼란스러운 대한제국기에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구조물로 정부 주도의 철거가 아닌 내부민들에 의한 훼철이 진행되었다.

1907년 7월 24일 제3차 한일협약 체결 후 6일 만인 7월 30일에 내각령 제1호로 ‘성벽처리위원회’가 구성되어 성벽처리 업무를 담당했다. 위원회는 1908년 경성 서소문 부근 성벽 77간과 전라북도 남원부 성벽 60간, 전주 성벽 60간, 경성 남대문 부근 성벽 77간의 훼철을 결정했다(≪황성신문≫1909.7.9). 전주읍성은 1907년 개설된 전군도로와 연계된 패서문 일대와 풍남문 좌우 성벽이 통행 불편을 이유로 철거된 후 도로가 개설되었다(≪황성신문≫1909.9.12). 1910년대 지도를 보면 읍성 동측 부분의 성곽만 남아있는 것이 확인되며(그림 2a 참조), 이마저도 1910년과 1911년에 걸쳐 훼철되었다. 훼철된 돌들은 동북쪽 현무지 매립, 전주천 제방, 전동성당, 가옥 건축, 도로 확장 시 성토작업에 사용되었다. 특히 서쪽 성벽 약 163.6m를 훼철한 후에 나온 석재를 사용하여 전동성당을 건축했다. 1918년 지도를 보면 과거 읍성 인근에 석축이 대거 표시되었음이 확인된다(그림 2b 참조).

전주읍성의 훼철 시기는 일본인 거류민의 증가 시기와 유사하다. 1910년 10월 1일 지방관 관제 공포로 전주에 도청이 설치되었고, 같은 달 부령 제8호에 의해 도감을 폐하고 새로 면장을 배치했다. 1913년 12월 6일 전라북도 고시 제73호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었고, 1914년 조선총독부는 일본인이 다수 거주하는 경성, 평양, 인천, 부산, 성진, 청진, 신의주, 원산, 군산, 목포, 마산, 진남포를 개발하는 12부제를 선포했다. 이로 인해 전북의 개발은 군산 위주였고, 전통도시인 전주 개발은 억제되었다(김혜미, 2016). 전주는 부산, 인천, 군산, 목포 등 개항 도시보다는 늦은 시기에 일본인 거류민이 증가했는데, 서문 부근을 정비하여 일본인 거류지를 확보했다. 개항도시와 마찬가지로 도심지 도로 정비와 부설은 일본인 거류지 우선으로 진행되었다. 1911년 9월부터 1912년 10월까지 측구 복개, 암거 공사를 포함하여 12건의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전주시내 십자가로와 경무부, 재판소, 도청 등 관청의 전면이었다. 1912년에는 서문 일대의 일본인 거류지 가로가 정비되었다. 1914년 전주-이리간 경편철도가 개설되자 일본인 거류지는 북문 근처인 고사동 일대까지 확장되었다(김경남,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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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전주 읍성의 훼철

1930년대까지도 전주에서 일본인 거류지는 지방법원, 물산진열소, 부청, 자혜의원, 경찰서, 농공은행, 금융조합 등 관공서와 경제활동 중심지역이었다. 일본인은 다가정(多佳町)에서 대정1정목(大正一丁目)부터 7정목에 주로 거주했고, 조선인은 풍남문 주변과 완산정(完山町) 일대에 거주했다. 1930년대 후반 전주부의 인구밀도를 도상화하면 일본인과 조선인은 공간적인 이원화 형태를 보인다(그림 3a와 b 참조). 이는 도시계획의 실현과 공간정비에서도 일본인 거류지 일대가 우선 순위로 반영되어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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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조선인과 일본인 거주지 분포(출처: 『전주부사(1943)』과 박선희(2007) 연구를 바탕으로 재작성)

III. 일제강점기 전주에 이식된 종교공간, 전주신사

1. 다가산과 전주신사의 입지

전주신사는 1914년(대정 3년) 10월에 진좌제(鎭座祭)를 올렸고, 창립일은 1916년(대정 5년) 9월 29일이며, 제신(祭神)은 천조대신(天照大神), 명치천황(明治天皇), 국혼대신(国魂大神)이다. 전주신사의 입지 위치가 다가산으로 선정된 배경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조선총독부는 관공립 신사는 물론 민간 신사에 대해서도 1915년 8월 16일 조선총독부령 제82호로 <신사사원규칙>을 제정·발포하여, 모든 신사의 창립과 존폐는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기존 신사들도 총독의 인가를 받도록 하여 신사에 관공립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전주신사는 도에서 경비를 지원받는 ‘도공진사(道供進社)’ 위계였다.

다가산 정상에 위치한 전주신사는 진입부 구조로 공간입지의 특성을 유추할 수 있다. 전주신사의 시작은 다가교를 지나서부터 진입이 형성된다. 전주신사와의 거리는 조선인이 거주하는 완산정과 가까우나 실질적으로 일본인이 주로 거주하는 다가정의 다가교를 통해서이다(그림 4a 참조). 이는 주변 거주자인 조선인보다 일본인 거류지를 배려한 진입이다. 더불어 종교적 장치뿐만 아니라 타지에서 생활하는 일본인의 휴식과 위락을 위한 공간이 필요했다. 다가산 일대는 일본인이 주로 거주하는 다가정 일대에서 근접거리이며, 전주천과 주변 산이 조화로운 경관적으로 우수한 장소로 근대공원의 구성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구릉지에 입지한 신사는 조거(도리이, 鳥居)를 지나 돌계단(石段)으로 진입하는 구조이다. 일반적으로 신사에서 조거는 신사임을 알려주는 지표 역할을 한다. 신사의 안과 밖의 경계에 놓여있어 조거 안쪽은 신성성을 지닌 신사 영역임을 표식한다. 전주신사는 다가정이 입지한 평지에 조거를 세우고, 참도 끝부분에 다가정이 위치한다. 다가산 좌측으로 형성된 참도를 통해서 정상에 다다르면 다시 조거로 중심공간임을 인지시키며, 숲으로 위요된 부분에 배전과 본전이 입지한다. 배전 앞은 정상부이지만 평평하게 정지되어있다. 다가산 정상에 있는 조거는 전주읍내 어느 곳에서도 조망이 되는 시각적 명료성이 높았다(그림 4b 참조). 다가산 일대에서 볼 수 있는 풍광은 1925년에 작성된 ‘전라북도답사기(全羅北道踏査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가산은 전주 시가의 서방에 있으니, 다가천의 청류(淸流)에 면해있고, 북쪽 능선은 노거수 사이에 다가정이 있고, 조망이 좋아서 산 정상에 오르면 전주의 전경이 발 아래 놓인다고 묘사했다(『개벽』제64호, 1925). 이처럼 다가산 정상에 입지한 전주신사에서 바라본 조망은 전주시가를 부감(俯瞰)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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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다가산과 전주신사의 공간 구성

신사 경내가 시작되는 첫 조거가 놓인 부분은 명확한 시기를 알 수 없지만 점진적인 변화가 진행되었다. 초기 진입부 형태는 조거 우측에 ‘全州神社’를 새긴 사호표(社号標)가 있었다. 조거를 통해서 진입하면 정면에 사무소로 사용된 다가정 정자가 있다. 사무소까지 진입하는 부분에는 활엽수 노거수가 우거져 있다(그림 5a 참조). 조거 양쪽에 등롱(燈籠) 2기가 들어섰고, 조거와 마찬가지로 ‘奉’과 ‘獻’이 한 글자씩 새겨져 있다(그림 5b 참조). 그 다음의 변화는 참도를 포장하고, 신사의 경계부에 울타리를 설치하였다(그림 5c 참조). 이처럼 전주신사 진입부는 신사의 상징성을 구축하는 시설물과 경내를 구분짓는 경계를 두어 위계 장치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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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전주신사 진입부 변화(출처: 일제강점기 엽서)

2. 전주신사의 열격(列格)과 신축 이건

다가산 정상의 전주신사는 1940년 신무천황(神武天皇) 즉위 2600년 기념으로 화산정(華山町) 산-1번지에 신축이 진행되었다(国立公文書館, A03010213400). 1937년(소화 12년) 전주신사봉찬회(全州神社贊會編)가 결성되었고, 1939년에는 ‘기원이천육백년기념행사(紀元二千六百年記念行事)’ 일환으로 ‘전북도사전주신사어조영(全北道社全州神社御造營)’의 건설비용은 십오만 원이 책정되었다. 이에 각남융(角南隆, 타카시 스나미, 1887-1980) 기사(技師)와 도지사 이하 도관계자 십여 명이 전주천 좌안 산악 일대를 답사했다(≪부산일보≫1939.3.31). 6월 25일에는 160만 전라북도민의 열성적인 기부금으로 조성된다고 발표했다(≪부산일보≫1939.6.25). 입찰을 통해서 중촌조(中村組)가 낙찰받아 1940년 2월 14일 기공식을 진행했다(≪부산일보≫1940.2.14).

이건 신축된 전주신사가 들어선 지형을 살펴보면 길야산(화산) 기슭으로 대규모 토공작업이 필요했다. 전주신사 기초공사에는 전라북도 도민의 봉사라는 명목으로 노동력이 투입되었다. 1938년에는 전북도청근로보국대 350여명이 황국신민서사사(皇國臣民誓詞) 제창을 진행한 후 구루마를 끌고 시가를 행진하며 다가산 전주신사에 참배하고, 제1차 작업으로 전주천의 모래 채취 작업을 했다(≪매일신보≫1938.8.17). 1939년에는 도사(道社)로 불리는 도민이 하루 평균 오백 명이 투입되어 지반평탄화 작업에 동원되었다(≪매일신보≫1939.10.22).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경제공황 이후 부족한 공사비용은 자발성으로 포장된 조선인 노동자의 인력으로 대체되었다. 인력으로 진행하는 지반공사로 공사 기간은 지체되었다. 신축된 전주신사 부지는 대규모 토공사로 인해 신사영역 주변에 경사지가 발생했다. 각남융 기사는 기념식수를 제안했고, 산앵(山櫻, 산벚나무) 오천 본, 앵(櫻 , 벚나무) 이백 본, 은행나무 기백 본, 버드나무 이백 본, 전나무(노송나무, 檜) 백 본 등 약 6,000본의 식수를 계획했다. 실질적인 공사기간은 1939년에서 1943년까지 진행되었고, 1944년 5월에 관폐대사(官幣大社) 다음으로 격이 높은 국폐소사(國幣小社)로 승격되었다(靑井哲人, 2005).

1951년 항공사진을 보면 전주신사의 이건 신축한 당시 지형이 실질적으로 확인된다. 그림 6a는 1918년 지형도와 1951년 항공사진을 매핑한 자료이다. 1937년 신축된 다가교 위치는 기존 다가공원과 새롭게 이건된 전주신사에 대한 접근성을 고려한 지점임을 보여준다. 신축 전주신사는 기존 다가산 정상부에 입지한 배전과 본전과는 달리 길야산 일대의 정지작업을 통해서 평평하게 만들었고, 주변 산 능선에 의해서 위요된 모습이다. 길야산 능선을 활용하였기 때문에 그림 6d처럼 진입부에서 배전까지 다다르기 위해서는 표고 차이로 인한 직선형 계단을 조성했다. 기존 다가산에 조성된 신사가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했다면, 신축한 신사는 지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강한 축이 형성된 것으로 차이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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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길야산에 신축한 전주신사

IV. 일제강점기 전주신사와 근대공원의 맥락성

1. 일제강점기 전주의 근대공원: 다가공원과 길야산공원

전주신사는 근대공원과 밀접한 공간적 맥락성을 보인다. 전주신사는 ‘전주신사병전주공원건설위원(全州神社並全州公園建設委員)’을 조직(靑井哲人, 2005)하여, 1915년 공원 설계 계획을 발표했다. 1915년 가을의 총통 즉위(卽位) 기념사업 일환으로 다가산 전주신사 경내에 공원 건설 논의가 있었는데, 경비 문제로 구체화되지는 못했다(≪매일신보≫1915.3.3). 1916년 전주신사가 조선총독부로부터 허가를 받은 후 다가산 일대는 다가공원이라 불렸다. 도시계획시설로 법적인 지위를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실질적인 이용은 공원과 같았음을 의미한다. 길야산을 공원으로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 진행되기도 했지만, 1930년대 까지 전주에서 유원지와 오락장으로 활용되는 곳은 다가공원과 오목대였다(≪동아일보≫ 1934.10.29).

1927년 발간된 『조선의 보고, 전라북도 발전사』를 보면 전주신사와 다가공원의 공간적 맥락과 구성이 묘사되어 있다. 전주신사 본전과 배전이 있는 공간은 노송(老松)이 풍치있게 둘러싸여 있었다. 신사 전면에는 매화숲을 조성했고, 다가산 전체에는 벚나무를 식재하여 봄에는 매화와 벚꽃으로 봄을 알리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고 했다. 다가교는 새롭게 조성하여 전면에 대조거를 설치해서 전주신사의 진입부임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며, 조거를 지나면 활엽림이 울창했다. 1920년 중반에는 전주천변이 보이는 정상부에 인공폭포와 잉어를 키우는 못을 만들고 중심에 분수를 도입했다. 분수가 있는 못은 하절기 일몰 전후에 방문객에게 인기가 좋다고 설명했다. 가을에는 단풍나무와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의 대비, 풀벌레소리로 공감각적 풍취를 자아내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겨울에는 나뭇가지 위 흰눈이 아름다운 사계절 이용가능한 공원이었다.

전주신사가 있는 산정상에 조영된 못과 분수는 사진으로 확인된다. 살펴본 결과 일본식 들여쌓기로 호안을 구축하고, 일본정원의 구성요소인 유락형(有樂形) 등롱으로 장식했으며, 중심부는 석재 구조물 사이에 분수를 설치했다(그림 7a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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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일제강점기 전주의 근대공원

1931년 지도를 보면 다가공원뿐만 아니라 신흥학교 후면부 길야산공원에 사설로 만들어진 길야산신사가 있다. 1940년에 기공식이 있었던 전주신사의 입지도 길야산공원이다. 일제강점기 전주에서는 다가공원과 인접한 길야산공원이 근대공원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들은 전주천으로 읍성 중심부와 이격되어 있으나 다가교로 접근을 할 수 있었다. 더불어 지리적 위치로 보면 일본인 거류지와 인접한 입지이다. 이처럼 전주신사는 초기 장소와 이건 장소가 근대공원으로 이용된 특성을 지녔다. 전주에서 신사는 위엄있는 폐쇄적인 공간조성 기법이 아닌 방문객의 위락적 이용을 부가하기 위한 못과 분수 조영 등 장식성을 고려한 공간조성이 특징이다.

2. 조선시대 위락공간 활터와 전주신사 진입부의 충돌

조선시대 활쏘기는 양반들의 교육과목인 육례(六藝) 중 하나이며, 한양을 비롯한 지역에도 정자와 함께 활터가 조성되었다. 전주에서 활터는 기록을 찾아보면 1712년 4칸의 천양정(穿楊亭)을 지었고, 과녁을 북서쪽 황학대(黃鶴臺) 아래에 세워 북쪽으로 활을 쏘는 형태였다. 9년 뒤 홍수로 유실되자 1722년 김삼민(金三敏) 소유 부지에 정자를 짓고, 다가정(多佳亭)이라 불렀다. 1830년 다가정 서쪽에 천양정을 재건했고, 기존 다가정은 젊은이들의 활터로 사용했다. 1906년에 다가정 구내에 양영학교(養英學校)를 설립하였으나 1918년에 천양정에 통합되어 폐지되었다.

1918년 지도를 보면 전주신사 진입부에는 건물이 있는데, 기존 서술에 의하면 북쪽으로 활을 쏘는 다가정은 凹자형이며, 천양정은 자 형태로 차이를 보인다. 전주신사 건립 후 다가정 정자는 신사 사무소로 이용되었다. 다가교 상부에 다가정으로 명기되어 있으며, 이쪽에 과녘을 두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1916년 전주신사가 다가산 정상에 들어서자 전주신사를 진입하는 동선과 북쪽으로 활을 쏘는 다가정의 용도는 충돌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 후반 신문기사를 보면 다가정의 형태 묘사는 등장하지 않으며, 다가천 주변에 교목이 울창하여 경관적으로 아름다운 공간으로 묘사했다(≪동아일보≫ 1928.7.28). 1930년대 신문기사에 등장하는 다가정은 활터의 이미지보다 다가천 주변에 활엽수가 자라는 서정성이 강조된 사진으로 등장한다(그림 8d 참조). 이는 기존 활터의 이미지에서 다가천변에 식생이 잘 자라는 곳으로 하절기 전주시민의 휴식처로 변모했음을 보여준다.

다가정이란 명칭은 정자인 건물 자체보다 활터를 의미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다가정 전면에 과녁이 있었던 공간은 1920년대 후반부터 광장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과거 전주읍성은 인구밀도가 높았고, 대규모 인원이 모일 만한 장소가 부족했다. 활터였던 다가정 일대는 평평한 공간으로 광장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신궁 진산제(眞産祭)를 위한 요배식(遙拜式)을 거행하기 위해서 광장으로 불린 다가정에 전주관민이 집합했다(≪매일신보≫1925.10.13). 1934년에는 다가산 일대만을 유일한 공원지로 불렀으며, 건물인 다가정을 개수하여(≪매일신보≫1934.9.16), 전주시민의 공원 이용의 편의성을 높혔다.

일제강점기 다가산은 전주신사의 등장으로 조선시대 양반계급이 주로 이용하던 활터의 공간 기능이 변모했다. 천양정은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다가정은 전주신사 진입부와 공간적 충돌이 일어나는 지점으로 활터라는 공간 기능을 상실했다. 활터로 이용된 평평한 지대는 광장으로 불리면서 전주관민의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었다. 이처럼 전주신사 초기에는 종교적인 신사, 전통 위락공간인 활터, 근대공간인 공원이 공존했으나 활터 기능은 사라지고 행사장소인 광장 역할이 부가된 다층적인 이용행태를 보이는 공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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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다가교와 다가정

V. 일제강점기 근대 도시문화의 매개

1. 상징과 의례공간의 매개체와 차별의 도구, 다가교

조선시대 다가교는 읍성 밖 전주천을 건너 다가정, 화산서당, 희현당, 사직단으로 연결되는 통로였다. 1872년 지도를 보면 징검다리 형태로 묘사되었으며, 1912년 사진에는 목재로 만든 단순한 형태였다(그림 9a와 b 참조). 1916년에는 홍수로 유실되었고(≪부산일보≫1916.9.13), 1920년 6월 26일에 전주 부호 박기순(朴基順)의 기부금 일만여 원으로 다시 만들었다. 1935년 8월에는 경비 구천 원을 사용하여 전주천 상부로 100여 m 이동한 위치에 건립했고, 전주시 상공회의소 조합원들이 대궁교(大宮橋)로 명명하여 초도식(初渡式)을 거행했다(≪경성일보≫ 1935.7.27). 1936년에는 홍수로 대궁교(다가교)뿐만 아니라 경성-목포선을 연결하는 완산교, 순창으로 향하는 도로와 연결된 전주교가 유실되었고(≪동아일보≫ 1936.8.16), 반파된 다리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다가교는 전주-부안을 연결하는 교통 요지임이 중요시되어 다른 교각 보다 먼저인 1937년 8월 30일 콘크리트 구조로 건립했다(≪동아일보≫1937.8.30).

대궁교의 위치 변경은 다가공원과 신축 이건된 전주신사로의 접근성을 고려한 위치임을 확인할 수 있다(그림 9c 참조). 다가교를 지나면 다가공원과 이건된 전주신사를 함께 접근할 수 있는 중심부에 위치하여 방문에 용이한 지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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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전주천 다가교의 변천

일제강점기 전주의 인구가 증가하자 전주천 주변까지 인구밀도가 높아졌다. 해마다 홍수로 인해서 전주천 범람이 문제가 되었고, 호안정비가 요구되었다. 1925년 조선인이 밀집한 거류지인 대화정, 서정, 완산정 일대에 홍수 피해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주신사 주변의 미화를 명목으로 다가교 일대의 호안만 정비되었다(≪조선일보≫1925.1.27)(그림 10b 참조). 1928년에도 홍수로 주변이 범람했지만, 조선인이 주로 거주하는 완산정 일대는 호안 정비가 진행되지 않았다(≪동아일보≫ 1928.9.16). 조선인 거주지의 호안이 정비되지 않자, 박기순의 기부로 만든 다가교 때문에 범람했다는 원망 기사까지 등장했다(≪조선일보≫1929.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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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0.

전주천 다가교 호안 정비(출처: 일제강점기 엽서)

1930년대 신문기사를 보면 다가교를 기준으로 조선인 거주지의 호안정비 미 실시는 차별이라고 규정했다(≪동아일보≫1930.11.11). 조선인 거주지는 전주천의 잦은 범람으로 우기때마다 니해화(泥海化)가 진행되기 때문에 호안 공사의 절실함을 촉구했으나 예산 부족을 이유로 진행하지 않았다(≪조선일보≫1934.1.2). 1937년 전주천의 확장공사에서 조선인이 주로 거주하는 완산정, 서정, 본정, 다가정 일대 177가구를 철거하여 조선인의 주거난과 주거 환경은 더욱 악화되었다(≪조선일보≫ 1937.8.24).

일제강점기 동안 다가교는 대궁교라 불리면서 다가공원과 전주신사로의 접근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콘크리트 구조로 건립되었다. 기존 신사와 이건된 신사의 중간 지점에 입지하여 의례공간과 위락공간으로의 접근성은 확보했으나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이 진행되는 공간적인 기점으로 작용했다.

2. 일제강점기 전주 명소화의 매개체, 벚꽃

전통적인 전주의 명승지는 ‘전주팔경’ 또는 ‘완산팔경’으로 불리며 죽림야우(竹林夜雨), 덕진채련(德津採蓮), 동포귀범(東浦歸帆), 인봉토월(麟峯吐月), 한벽청연(寒碧晴烟), 남고모종(南固暮鍾), 위봉수폭(威鳳垂瀑), 비정낙안(飛亭落雁)이다(정훈, 2013). 일제강점기에도 완산팔경이라고 했지만, 다가산 일대의 활쏘는 모습인 다가사후(多佳射侯)가 포함된 9개소이다(≪동아일보≫1926.8.3).

일제강점기에는 철도 교통의 발달로 각 지역의 명승지를 홍보하여 관광자원화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다양한 형태의 관광지도가 활성화되었고, 신문기사 등 미디어를 통해서 명소를 홍보했으며, 지역내 명소를 기념 스탬프로 제작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스탬프 수집’이라는 대중적 취미가 발생할 정도로 유행했다(김경리, 2019). 스탬프 도안에는 자연풍광, 산업 발전상, 지역 명소, 지역 특산품이 주로 등장했다. 스탬프 도안은 각 지역의 관광을 통한 정체성을 보여주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전주의 스탬프 도안을 보면 당시 일제에 의해 규정된 전주를 상징하는 명소를 학인할 수 있다. 전주우편국에서 1933년 7월 20일 발간된 도안을 보면 원형의 테두리 안에 상부에는 한벽루, 하부에는 전주천, 신설된 다가교, 전주신사의 조거가 표현되어 있다. 이는 전주신사와 다가교 일대가 전주를 상징하는 구조물로 선택되어 전주 명소를 방문자에게 인식시키는 역할을 한다(그림 11a 참조).

일제강점기 전북에 대한 기행문을 보면 전주의 도시 이미지가 확인된다. 1925년 『개벽』 잡지의 ‘전라북도답사기’에는 전주 서부를 관통하는 다가천의 맑은 물과 다가산과 길야산을 봄철의 벚꽃 명소로 서술했다.

전주신사 조영 후 다가산과 길야산 일대의 벚나무 경관식재가 꾸준히 증가했다. 1919년에는 송본철삼(松本哲三, 마쓰모토 테쓰조)가 만든 길야산에 개인 신사를 만들었고, 주변에는 대규모 벚나무를 계획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길야산 정상부에는 ‘동향원사(東鄕元師)’가 글씨를 쓰고 전라북도도지가 배서를 한 ‘全州吉野山千本櫻植樹紀念碑’를 새긴 기념비를 세웠다(그림 11b 참조). 다가산의 벚꽃도 유명했지만, 길야산인 화산내 벚나무의 대규모 식재로 인해서 ‘호남 길야’으로 명명되었다고 전한다(우츠기 하츠자부로 저(1927), 임경택 역(2021)). ‘길야(吉野)’라는 명칭은 벚꽃인 염정길야(染井吉野, 소메이 요시노) 품종의 한문 이름으로 화산이 길야산으로 바뀐 이유는 벚꽃이 영향을 주었다. 매년 벚꽃 개화시기가 되면 전주에서는 대표적 벚꽃 명소로 다가산과 길야산을 거론했고(≪조선일보≫1935.4.11), 벚꽃 피는 시기의 관앵회와 원유회가 근대도시문화로 자리잡았다(그림 11c 참조). 길야산이란 명칭은 1962년까지 등장했다(≪경향신문≫ 1962.5.15).

이처럼 일제강점기 다가공원과 길야산공원은 전주신사와 함께 공존했으며, 대규모 벚나무 식재로 전주의 신규 명소로 이미지가 확산되는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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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1.

전주 명소 스탬프와 길야산 벚꽃

VI. 결론

지금까지 근대공원 관련 연구는 경성, 평양, 부산 등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으며, 일제강점기에 도입된 신사와의 공간적 상호관련성이 높음에도 이에 대한 연구는 부진하다. 특히, 일제강점기 근대공원으로 조성되었고, 현재에도 근린공원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공원은 일제강점기에 대한 감정적인 대처로 신사에 대한 기억이 대부분 지워져 있다.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 전주에 도입된 전주신사와 다가공원을 대상으로 신사와 공원의 공간 맥락성, 근대공원으로의 역할, 조선시대 전통과 일제강점기 근대의 충돌 지점, 일제강점기 구축된 공간에 의한 지방도시의 명소화 과정을 분석했다. 이에 분석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전주읍성의 훼철에는 대한제국기 지방 행정력의 부재도 영향을 주었으며, 일본인 거류민의 정착을 확정지었다. 일제강점기 새롭게 등장한 관청을 중심으로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되었고, 그 외곽지역에 조선인이 거주하여 이원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둘째, 전주부내 일본인이 증가하자 일본인의 종교적 장치가 도입되었고, 다가산 정상에 1916년 전주신사가 건립되었다. 이때 전주신사의 입지 선정에 영향을 준 요인은 일본인 거류지와 근접거리이며, 경관적 가치가 우수하여 공원적 이용이 가능한 지역으로 선정되었다.

셋째, 전주신사가 다가산 일대에 들어서고 근대공원으로 이용되자 기존 활터로 사용된 지점은 신사로의 진입과 활터로의 역할이 충돌했다. 이때 활터로의 역할은 유명무실해졌고, 과녁이 있었던 넓은 부지는 전주관민이 모여서 대규모 행사를 할 수 있는 광장 역할을 담당했으며, 일시적으로나마 광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넷째, 전주천에 도입된 다가교는 다가공원과 이건 신축된 전주신사로 접근성을 고려하여 1937년 상부로 이건된 위치에 구축되었다. 다가교를 중심의 호안정비가 요구되었고, 이때 조선인 거류지와 일본인 거류지가 구분되어 정비가 진행되었다. 이때 다가교는 상징과 의례공간의 매개체와 차별의 준거로 활용되었다.

다섯째,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서 구축된 전주신사뿐만 아니라 사설로 만들어진 길야산신사 주변은 ‘다가공원’과 ‘길야산공원’으로 불렸다. 이때 공원적 이용을 위해서 벚나무가 대규모로 식재되었고, 봄철 계절 명소로 부각되었다. 일제강점기 벚꽃 식재는 전주라는 지역을 명소로 부각시키는 도구 역할을 담당했다.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 지방의 근대공원 등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신사와 공원의 공간 맥락성을 도출했다. 공간적 맥락을 검증하기 위해서 매핑을 통한 정확한 위치를 추론했고, 이는 객관적인 공간 해석의 바탕이 되었음에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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