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II. 영주십경의 내용과 기본 구조
III. 조선시대 제주를 ‘보는 방식’의 발전 혹은 진화: 「영주십경시」, 『탐라십경도』, 『탐라순력도』
1. 『탐라십경도』에서 「영주십경시」까지: 연속성
2. 『탐라십경도』와 「영주십경시」: 변화
IV. 일제강점기 제주경관에 대한 새로운 시선의 형성과 전통적인 자연관의 변화
1. 구로이타의 제주낙원론
2. 지크프리트 겐테의 근대적 심미안
3. 고토 분지로의 지질학적 관점
V. 결론
I. 서론
영주십경은 제주를 대표하는 10여개의 경관을 의미한다. 영주십경에 대한 연구들은 그동안 상당수 있었지만 문화지리학에서는 많이 다루어지지 않았다. 지역마다 ㅇㅇ팔경 등의 형태로 지역의 대표경관을 선정하려는 시도는 현대의 관광정책에서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는데 이러한 노력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자연의 아름다운 경관(요소)에 대해 가졌던 관심에서 비롯된다. 영주십경 역시 다르지 않아서 18세기 초반의 『탐라십경(도)』 혹은 『탐라순력도』를 영주십경의 출발점이나 원형으로 간주하여 연구대상으로 삼는 시도가 있어왔다. 이러한 연구들은 영주십경이 가지고 있는 문화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데 공헌했다. 그러나, 현대의 제주관광에서-특히 20세기 후반-상당히 중요한 키워드로 역할했던 영주십경이 갖고 있는 문화적, 경관적 의미에 대한 문화지리학적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 연구는 영주십경에 대해 몇 가지 중요한 지점에서 문화지리학적 탐구를 시도하고자 한다. 첫째, 현대관광에서 빈번하게 활용되어온 영주십경의 키워드를 ‘근대이전의 전통적 제주관’이라는 동질성의 담론으로 이해하기보다는, 18세기초반 『탐라십경(도)』에서부터 19세기 중반 이한우의 「영주십경시」에 이르기까지 제주경관에 대한 변화하는 관점 즉, 보는 방식(a way of seeing)의 역사적 형성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따라서 본 연구의 구체적인 연구목적은 다음과 같다. 본 연구는 첫째, 19세기말과 일제강점기에 영주십경의 문화적 중요성이 약화되고 제주를 바라보는 새로운 개발주의적, 제국주의적, 과학적, 미학적 시각이 출현하는 과정을 탐구한다. 이는 영주십경의 전통이 자연스럽게 현대의 관광문화로 이어졌다기보다는 제주(땅)에 대한 새로운 근대적 관점의 형성과 함께 상당한 부침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새로운 근대적 관점 속에서 영주십경의 상징적 지위는 약화되고 재해석되었다. 둘째, 조선시대에 영주십경은 17세기 초반의 탐라십경에서 연원했으나, 경승지에 대한 찬미에 머물지 않고 점차 제주의 자연과 문화를 전체적으로 대표하는 상징경관의 지위로 진화하는 과정을 탐구한다, 즉, 영주십경은 소상팔경과 같은 외부자의 관점에서 경승지에 주로 초점을 두었던 초기의 탐라십경의 관점에서 벗어나 상당한 시간에 걸친 변화과정 속에서 19세기 유학자들이 제주의 자연과 문화를 전체적으로 보는 새로운 방식(a new way of seeing)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II. 영주십경의 내용과 기본 구조
영주십경은 제주를 대표하는 10곳의 경관을 말한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영주십경은 제주의 유학자 이한우(1818~1881)가 시적이미지로서 제주의 10개의 풍경을 선택한 「영주십경시」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왔다. 그림 1에서 알 수 있듯이,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의 다수의 관광안내서에서 영주십경은 제주의 매력을 마케팅하는 주요수단으로 강조되고 있다.1) 이는 1960년대와 70년대의 관광에서 영주십경이 그다지 강조되지 않았던 것과도 비교되는 모습이다.

그림. 1
영주십경과 영주십이경(출처 : 제주도, 1992. 04,; 제주도, 1992, 05) (주 : 11경과 12경은 이원조와 이한우의 영주십경에 포함되지 않으나 후일 영주십일경, 영주십이경으로 거론되었기에 참고를 위해 추가하였음)
「영주십경시」의 전체 구조는 크게 두 가지-자연경관과 문화경관-로 구분된다(표 2 참조). 자연경관은 자연의 순환적 사이클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제기되고 있다. 변하지 않는 자연의 영원성을 상징하는 방식으로 자연의 법칙성, 고정성을 강조하는 유교적 자연관을 보여주고 있다. <1경 城山出日>과 <2경 紗峰落照>는 하루의 변화, 3경부터 6경까지는 춘하추동의 변화를 다루고 있다. 이는 또한 자연의 법칙성과 함께 제주경관에 대한 심미적 인식의 성격을 보여준다. 제주의 고유한 문화와 관련된 <5경 橘林秋色>을 제외하고는 순수자연의 보편적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에 가깝다. 구체적으로 “가는 것과 오는 것(出日과 落照), 멈춰 있는 것과 움직이는 것(春花와 夏瀑), 가까이 있는 것과 멀리 있는 것(秋色과 晩雪), 산경치와 바다경치(釣魚와 牧馬)”를 효과적이고 체계적으로 대비시키고 있다(손기범, 2009, 104). 자연에 대한 시각적인 응시를 넘어서 사색을 통한 체계화라고 볼 수 있다.
표 1.
영주십경
출처 : 김상범, 2007, 5-6
표 2.
이한우의 「영주십경시」 원문 및 해제
후반부에 다시 서술하겠지만 이한우는 특정한 폭포와 연못 등의 경승지가 가진 경관미에서 멈추지 않고 각각의 경관들에 계절성과 대표성을 부여하여 제주자연의 보편적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있다. 이한우의 시대로부터 1~2백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유학자들의 관심은 대체로 전형적인 경승지의 아름다움에 국한되어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일출과 일몰, 춘하추동경관은 한편으로는 제주경관의 다양한 장소와 경관형태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동일하게 반복되는 자연의 규칙적인 변화를 보여줌으로써 역설적으로 자연의 영원성(eternity)과 보편성을 강조하는 효과가 있다. 이는 제주를 인식하는 관점의 분명한 변화를 뜻한다. 특정한 지점(경승지)에 주목하던 것에서 제주땅을 하나의 ‘전체’로서 이해하고 인식하는 관점으로 발전한 것이다.
5경과 함께 후반부의 8,9,10경은 문화경관을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더 구체적으로 <9경 山浦釣魚>와 <10경 古藪牧馬>와 <5경 橘林秋色>의 경관에서 다루는 생업활동은 귤농사, 어업, 목축인데 이는 전통적으로 제주를 대표하는 세 가지의 생산활동이다. 귤농사와 관련해서는 근대 이전 제주에서 긍정적인 측면만 말하기는 힘들다. 고려시대 이전부터 오랜 시간동안 이어진 육지의 정부에 공물로 바쳐진 귤은 민속학자 주강현(2011)의 표현에 의하면 “원한의 과일”이며 “귤나무는 고통나무”였다. 귤은 진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컸기에, 관에서 관리하는 과원뿐만 아니라 민가의 귤나무까지 수탈을 위한 관리대상이 되었다. 이한우의 시에서는 “누런 귤 집집마다 절로 숲 이룬”, “달빛걸린 가지마다 층층 옥덩이”이라고 귤이 풍성하게 열린 이국적인 풍요의 경관으로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 이에 대해 한편으로 귤을 둘러싼 제주민의 수탈과 고통을 외면한 유학자의 한계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주문화의 정수에 주목하여 제주의 고유한 문화경관의 매력을 담아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탐라순력도』의 ‘감귤봉진’에서 보이듯이 귤농사를 관에서 주관하는 공물이라는 관점에서 묘사하던 것에 비해 진전된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영주십경의 가치는 풍경의 아름다움에만 주목한 것이 아니라 제주삶과 제주문화의 본질을 표현할 수 있는 문화경관을 선택했다는데 있다.
마지막으로 흥미로운 풍경은 <8경: 山房窟寺>(그림 7 참조)이다. 이는 산방산이라는 자연경관에 만들어진 암자를 의미한다. 일반적인 사찰과 달리 건축경관이 아니라 자연지형을 그대로 활용한 절이다. 마치 바위 위에 새겨진 불상처럼 자연경관에 남겨진 문화적 표식(traces)이다. 즉, 자연경관과 문화경관의 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산방굴사는 19세기 유학자 이한우의 관점과 1980년대 제주관광의 관점 사이의 변화를 표현하고 있다. 이한우의 시에서 산방굴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굴사의 외부 혹은 입구에서 내부를 바라보는 것이다.(“조물주 조화로 푸른 산 깎아/골짝에 구름문 절을 만드니” “천정과 바닥을 돌로 다듬고/가운데 침으로 뚫어놓았네” “쌍불만이 앉혀진 싸늘한 탁자”).
그런데, 20세기 후반의 많은 여행안내서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8경: 산방굴사>는 굴사의 입구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관광객의 시선이다. 즉, 해당 장소의 관광지(scenic point)로서의 중요성은 유지되고 있지만 시선이 향하는 방향이 달라진 것이다. 이는 아마도 20세기 관광에서 바다경관의 중요성이 커진 것과 관련된다. 산방굴사의 입구에서 해안을 바라보는 시점은 전형적으로 서구경관 및 관광에서 형성된 근대적 시점이다.2) 우리나라의 경우 인천에서 전형적인 예를 찾을 수 있는데 19세기말 개항기의 막바지에 인천 월미도 바다를 내려다보는 응봉산 위에 형성된 여러 개의 양관(세창양행 사택, 존스톤별장 등)이 그에 해당한다(진종헌・신성희, 2006). 당시 서구의 건축 및 경관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한 시점이어서 한국사람의 관점에서는 건축에 적합한 장소로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입지적 장점의 재평가와 함께 해안의 고지대에서 바라보는 바다풍경 또한 전형적인 조망지점이 되었다. 산방굴사에서의 관점변환은 일제강점기와 6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현대관광의 제도와 관점이 제주에 도입된 것에서 배경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III. 조선시대 제주를 ‘보는 방식’의 발전 혹은 진화: 「영주십경시」, 『탐라십경도』, 『탐라순력도』
1. 『탐라십경도』에서 「영주십경시」까지: 연속성
영주십경 외에도 제주의 수려한 풍경을 집경한 시도는 여러 차례 있었고, 그 중 대표적인 인물과 선정된 제주의 경관은 이익태의 『탐라십경도』, 이형상의 『탐라순력도』, 오태직의 제주팔경, 이원조의 영주십경 그리고 이한우(이한진)의 영주십경에 이른다(표 3 참조). 이한우의 영주십경이 제일 잘 알려져 있긴 하지만 그 외에도 분석의 주 대상으로 선정한 이유는 분명하다. 가장 먼저 십경의 형식으로 제주경관을 품제한 이익태의 『탐라십경도』는 현존하지 않지만 <서문>을 통해서 그 제작의도를 알 수 있다. 이익태는 1694년부터 1696년 2월까지 제주도를 두 번 순력한 후에 그 경험을 토대로 10경을 선정했다.
“본도는 바다 밖 천리에 있고, 주위가 500리이다. 한라산은 그 가운데 있는데, 동서가 200리이고, 남북이 70리이다. 사람과 물산이 번성하며, 산과 바다가 험하게 가로 막았고 진상하는 과실이 풍요롭게 열매 열리니, 실로 국가의 중요한 지역이다. 關防의 경승과 기묘한 바위와 폭포는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사람들이 모두가 등한시하니, 사실을 기록하여 저술이라고 칭할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육지에 있는 사람들은 듣고 아는 자가 적었으니, 이것이 아쉬웠다. 내가 몇 년 동안 2차례 巡歷을 하면서 풍속을 물어보는 틈틈이 볼 만한 것 중에 옛 사람들의 足跡이 닿지 않았던 곳을 물었고, 끝까지 살펴보고 두루 밟아 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 가운데 뛰어난 十景을 뛰어난 화가의 솜씨를 빌어 형태를 묘사하여 그림을 그리게 하고 하나의 작은 병풍을 만들었으며, 그 윗면에 事跡을 적어 보기에 편리하도록 했다(김새미오(2019, 380)에서 재인용).”
표 3.
이한우 이전의 제주풍경 품제시와 이한우의 「영주십경시」 비교
주 : 김새미오(2019, 379)의 표를 일부 수정보완
김새미오(2019)는 오태직을 포함한 네 사람의 품제경관을 비교하여 이한우의 영주십경이 그의 창작물이라기보다는 긴 시간에 걸쳐 제주의 풍경에 대한 관점이 진화되어온 결과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유학자들의 제주경관품제는 “제주방어와 제주를 알기 위한 경관에서 점차 제주의 아름다운 경관을 표현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초점을 좀 더 분명히 하면 제주의 아름다운 경관을 표현하는 방식과 제주경관에 부여한 정체성의 측면에서 변화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위 인용문에서 이익태가 직접 밝히고 있듯이 이익태를 비롯한 초기의 유학자들은 관방의 경관과 바위, 폭포 등 소상팔경에서 유래한 전형적인 경승지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보라(2007)는 남구만(1629-1711)이 함경도 관찰사로 재직하면서 1674년에 제작했던 『咸興十景圖』, 『北關十景圖』와의 유사성에 대해 논하고 있다. 당시 실경산수화의 전통과 명승유람의 문화가 발전하면서 제주도뿐만 아니라 지방관이 순력과 함께 명승도첩을 제작하는 것이 상당히 유행했다는 것이다(이태호, 1988). 또한 관동지방에서 지방관의 순력과 함께 『관동명승도』가 그려졌다는 기록이 있다(이보라, 2007). 서울을 중심으로 생각할 때 제주와 함께 관동지방, 함경도에서 지방관의 순력과 명승도첩의 제작이 활발히 일어난 것을 보면 문화적 의미와 함께 군사적, 행정적 의미가 강하게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초기에는 관방(군사적) 요충지와 명승지로 구성되었던 탐라십경이 이한우의 「영주십경시」에 이르면 다소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 여하튼 이한우의 「영주십경시」는 개인적인 창작물인 동시에 이익태 이후 지속적으로 시도되었던 (유학자들이) 제주의 풍경을 ‘보는 방식(a way of seeing)’이 진화한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필자는 이한우의 영주십경이 가진 문화경관의 관점이 탐라십경 이후 긴 시간에 걸쳐 점차적으로 발전되어온 유학자들 사이에 어느정도 공감대를 형성한 제주경관의 관점일 것이라고 추론하는데, 근거 중 하나는 이한우와 비슷한 시대에 영주십경을 제안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응와 이원조(1792-1871)역시 제주의 풍속과 문화경관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가 제주목사로 재임한 기간 동안 작성한 「耽羅十謠」의 내용에는 방목, 말떼로 밭밟기, 김매기, 담쌓기, 떼배, 맷돌질, 물길어 나르기, 잠녀, 수청 등 10개의 소주제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는 제주의 풍토에 대해 도덕적으로 평가하기보다는 육지에서의 농업환경과 어떻게 다른지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서술하고 있다(손기범, 2009). 오태직 역시 이원조, 이한우와 거의 동시대의 제주도 문인이며, 품제경관의 유사성을 볼 때 오태직과 이한우사이에 제주경관에 대해 상당한 교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김새미오 2019, 381) 따라서, 1700년 전후 이익태와 이형상의 관점과, 19세기 중반 이원조와 오태직, 그리고 이한우가 공유했던 제주풍경을 이해하는 관점 사이에는 연속성과 함께 상당한 간극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탐라십경도』와 「영주십경시」: 변화
『탐라십경(도)』와 「영주십경시」에 대한 기존의 연구자들이 대체로 연속성을 많이 강조했지만, 필자는 변화와 차이에 보다 초점을 두고 설명할 것이다. 사실상 1694년의 『탐라십경도』는 전해지지 않기에 연구자들은 이형상의 『탐라순력도』를 통해 우회적으로 의미를 탐색해 왔다. 김태호(2016)는 이익태에 의해 집경된 제주경관이 제주목사 이형상이 제작한 『탐라순력도』에 대부분 수록되었다고 판단한다(그림 2, 3 참조). 또한 1649년본과 유사한 형식의 『탐라십경도』가 국립민속박물관의 『제주십경도』와 일본고려미술관 소장의 『탐라십경도』가 남아 있어 이를 통해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그림 4, 5 참조).
17세기는 하멜의 제주도표류(1653-1666) 등 동아시아에 대한 서양의 관심이 본격화되는 시기여서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성격이 부각되던 시기였다. 특히 『탐라순력도』에는 이같은 모습이 잘 반영되어 있다. 목사 이익태가 선정한 탐라십경은 조천관, 별방소, 성산, 서귀포, 백록담, 영곡, 천지연, 산방, 명월소, 취병담 열 곳의 장소를 의미한다. 즉, 이익태의 탐라십경은 관방과 명승의 두 측면을 고려하여 경관을 선정하였다. 조천관, 별방소, 성산, 서귀소, 산방, 명월소 등 제주방어시설이 있던 곳(김새미오, 2019, 381)으로 그 중에서도 조천관, 별방소, 서귀소, 명월소는 명확히 관방의 관점에서 선정된 장소(군사요충지)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성산과 산방(산)은 명승의 의미로 이해하여도 큰 문제가 없다. 또한 관점에 따라 서귀소 역시 주변 풍광을 두루 보여주는데 더 큰 의미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탐라십경 중 전형적인 명승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경관은 ‘성산, 백록담, 영곡, 천지연, 산방, 취병담’이며 이한우의 영주십경과 비교할 때 백년이상의 시간이 흐르면서 제주풍경을 인식함에 있어서 유사성(연속성)과 함께 상당한 변화와 확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비교해 보면, 성산(성산출일), 백록담(녹담만설), 영곡(영실기암), 천지연(정방폭포로 대체), 산방(산방굴사), 취병담(탈락, 그러나 후일 보완된 영주십이경에는 포함됨)의 6개 경관은 대체로 부분적인 변화와 함께 명승의 가치가 지속적으로 인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표 4를 볼 때, 『탐라십경도』에서 이한우의 「영주십경시」로 제주풍경에 대한 인식이 변화해 가는 방향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탐라십경도』에 수록된 경관에서 군사요충지를 제외하면 매우 구체적인 경물대상을 지칭하고 있으며, 명확히 수려하고 기이한 자연의 지형경관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김태호, 2014 참조). 물론 『탐라십경도』 전체로는 ‘관방+명승’의 조합을 통해 자연과 인문(정치)의 종합적 관점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한우의 「영주십경시」에서 드러나는 문화경관에 대한 관점은 부재했다. 이 차이가 보여주는 의미는 크다. 육지로부터 전래된 소상팔경과 유사한 경관인식의 틀을 통해 제주의 경승지를 선정(집경)하였으나 초기 단계에서 제주의 문화와 정체성에 대한 인식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표 4.
『탐라십경도』와 이한우의 「영주십경시」의 비교
| 구분 | 『탐라십경도』 | 이한우의 「영주십경시」 | 비고 |
| 연속 | 성산 | 성산출일 | 구체화(주제부여) |
| 백록담 | 녹담만설 | 구체화 | |
| 영곡 | 영실기암 | 구체화 | |
| 천지연 | 정방하폭 | 대체(정방폭포는‘서귀소’에서 부경관) | |
| 산방 | 산방굴사 | 구체화 | |
| 취병담 | 용연야범: 영주십이경. 용두암을 포함 | ||
| 추가 | - | 사봉낙조 | |
| - | 영구춘화 | ||
| - | 귤림추색 | 문화경관 | |
| - | 산포조어 | 문화경관 | |
| - | 고수목마 | 문화경관 |
이같은 과정을 통해 제작된 명승도첩이 ‘관방+명승’의 조합으로 구성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며, 이익태의 『탐라십경도』는 나라전체(육지)에서 유행하던 지방관에 의한 명승도첩제작의 관행이 제주로 이식(수입)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제주경관의 특이성이나, 고유한 제주문화와의 관련성에 대한 문제의식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지형경관 중심으로 집경이 이루어졌다.
김태호(2014)의 분석에 따르면, 『탐라십경도』에 그려진 지형경관은 화산체, 화구, 하천, 폭포, 소, 습지, 동굴, 암괴지형, 암석해안 등 다양하며 제주의 지형적 특징을 대체로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탐라십경도』의 주경관만을 고려하면 과연 제주의 고유한 지형경관을 얼마나 중시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있다. 성산일출봉과 산방산은 화산체이지만 ‘수려하고 기이한 산경관’이라는 보편적 자연인식의 틀 속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또한 용암동굴은 『탐라십경도』와 이한우의 영주십경 모두에서 주경관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반면에 당시 육지의 유학자들에게 익숙한 경관형태였던 폭포는 천제연폭포가 주경관으로, 천지연폭포와 정방폭포도 서귀소의 부경관으로 등장한다. 즉, 『탐라십경도』의 여섯 개 자연경관인 산, 계곡, 폭포, 연못은 육지의 유학자들이 이미 익숙해 있고, 감상해왔던 자연지형의 분류에 부합하는 경관대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익태가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관리인 반면에, 이한우는 제주태생의 유학자였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즉, 150여년에 걸친 제주 대표경관의 변화과정에서 이한우는 제주태생의 유학자로서 자신이 살고 있는 고장이 어떻게 아름답고 매력적인 경관으로 인식되는가에 대한 관점을 발전시켰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이익태의 관점이 순수하게 ‘외부인의 관점’인 반면에, 이한우의 관점은 외부인이면서 동시에 내부인의 관점을 갖고 있다. 이한우는 제주인이라는 점에서 내부인이었고, 자연경관과 문화경관을 통일적으로 종합하는데 관심이 있었다. 또한 그는 제주의 ‘척박한’ 땅 위에서 노동하는 계급이 아닌 유학자(정치적 상류계급)라는 의미에서 ‘외부인’이었기에 영주십경과 같은 ‘낭만적’ 문화경관의 묘사가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이한우가 제주문화경관에 대한 관점을 심화시켰을 것이라는 추론은 사실 그의 의식적인 노력뿐만 아니라 과거시험과 여행을 통해 수차례 서울을 방문하고 체류하면서 고향의 자연에 대해 ‘경관’의 관점에서 이미지화할 수 있는 환경에 처했던 경험에 기반해있다(김새미오, 2006 참조). 김치완(2012)은 이한우의 이 같은 개인적인 경험덕분에 제주를 마치 외부인처럼 ‘낯선 공간’으로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제주인들은 당연하게도 제주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으로, 즉 ‘장소’의 관점에서 인식하면서 외부자들의 시선과 다른 방식으로 제주의 경관과 환경을 인지해왔다. 반면에 이한우는 여덟 차례나 고향을 떠나는 여행에서 타향에서 고향의 풍경을 그리고 돌아와서 자신의 고향을 ‘낯선 공간’으로 직면하는 경험을 반복하면서 고향제주의 자연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치완의 ‘낯선 공간’ 해석은 사실상 경관이론의 관점에서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이한우가 제주의 ‘외부에서’ 형성한 제주를 ‘보는 새로운 방식(a new way of seeing)’은 이런 점에서 이중적이다. 외부인의 시선을 체화했다는 점에서 ‘객관적’이고 동시에 자신의 고향 제주의 풍토에 대한 근본적인 애정이라는 점에서 ‘주관적’이다. 이한우의 ‘낯선 공간’은 결국에는 제주를 애착하고 사랑하는 그의 고유한 방식이며, ‘경관의 이중성(duplicity of landscape) (Cosgrove and Daniels, 1988)’을 설명하기에 적합하다.
토착민 이한우의 관점과 달리 이전에 제주에 파견된 지방관들의 제주의 풍토와 문화에 대한 인식은 긍정적이기 보다는 부정적인 쪽에 가까웠다.3) 제주의 척박한 토양과 기후환경 때문에 농업을 통해 풍부한 물산을 생산하기 어렵고 문화가 세련되게 발전하지 못한 것도 그러한 환경적인 요인 때문이라는 인식이 지속적으로 존재했다. 이러한 환경결정론적 담론이 지배적이었기에, 제주로 파견되는 것은 단지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으로 가는 것에 더해 유배의 의미 또한 존재했다.
이익태의 제주의 수려한 자연경관에 대한 인식은 아마도 제주의 문화에 대한 기존 육지유학자-지방관들의 관점과 배치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제주의 명승경관은 ‘자연스럽게(당연하게)’ 제주의 문화(풍토)와 분리되어 인식되었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제주의 척박한 자연환경은 때로는 ‘환경결정론적으로’ 해석되었다. 다시 말해서 18세기 초반에 제주의 자연은 두 가지의 상반된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분류되었다: 수려한 명승경관과 척박한 자연환경. 유학자들이 이미 익숙해져 있던 경승지의 틀 속에서 제주의 자연은 해석되었고, 그 결과 일부 경승지와 전체로서의 자연환경(풍토)에 대한 평가는 분리되었다. 수려한 명승경관은 자연에 대한 심미적이고 문화적인 담론을 형성했으며, 척박한 자연환경은 이를 고려한 ‘훈육적’ 통치행위를 정당화했다. 문화적 담론과 정치(통치)행위는 완전히 다른 영역으로 분리되었으나 사실상 서로를 강화하는 분리였다.
IV. 일제강점기 제주경관에 대한 새로운 시선의 형성과 전통적인 자연관의 변화
1. 구로이타의 제주낙원론
표 5는 1923년에 출간된 『(未開の寶庫) 濟洲島 (미개의 보고) 제주도』에 수록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후 영주십경과 비교하겠지만, ‘삼성혈의 송풍’과 목록의 마지막에 있는 ‘竹島의 古戰場(遮歸島)’ 차귀도를 제외하고는 영주십경(용연야범은 영주십이경에 포함)과 상당히 관련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적’을 제외하고 명승지에 국한한다면 영주십경은 일제강점기 근대의 관광제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참조물이 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기할만한 점을 몇 가지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표 5.
1924년 『(未開の寶庫) 濟洲島 (미개의 보고) 제주도』 내 명승고적
첫째, ‘산방굴사’(그림 7 참조)의 묘사에서 조선시대와는 달리 굴사에서 바다를 조망하는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온 산이 겹쳐진 암석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기초(奇礁)가 솟아올라 바다를 향한 곳은 그야말로 다시없는 조망(眺望)을 이룬다” 이는 해안의 높은 곳에서 바다를 조망하는 근대의 자연조망이 일제강점기에 도입되었음을 추정하게 한다4). 18세기 초 제주목사 이형상의 묘사에서 “산 남쪽 중앙에 석굴이 있는데 기울어진 바위집과 같다. 물이 천정에서 점점 떨어져 내리는데... 옛날 스님이 그 속에 부처를 만들었다고 하여 이름을 굴바위라고 하였다...(이상규·오창명 역, 2009,83)” 와 같이 서술하고 있는 것을 볼 때 150여년 사이 어느 시점에 굴사가 만들어졌고 이름에 새로 명명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찰의 건축은 바위에서 내려다는 시점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둘째, 명승고적의 제도와 담론이 도입되어 제주의 역사경관이 본격적으로 역사/전통/고적의 제도에 편입되었다. 1933년 조선총독부는 ‘조선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령’이라는 법령을 공포하고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를 구성하여 1943년까지 보물 340건, 고적101건, 고적 및 명승 3건, 천연기념물 146건 등 모두 591건을 지정했다. 조선시대의 명승지(경승지)와 비교하면 명승/고적의 의미는 명확하다. 즉, 조선시대에 이익태의 『탐라십경도』나 이형상의 『탐라순력도』는 ‘관방+명승’의 구조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는 경관의 수려함에 대한 인식(예술)과, 그 땅에 대한 통치의 제도와 기구(정치)를 같이 종합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새로 도입된 근대의 제도와 식민주의의 시선을 통해 과거의 관방시설은 ‘고적’으로 간주되어 명승과 함께 보호의 대상이 되었다.
셋째, 명승에 대한 묘사에서도 부분적으로 과학담론에 기초한 사실적 설명이 포함되기 시작했다. 예컨대 성산일출봉에 대한 묘사에서 “...중앙은 함몰되어 있다. 이것이 분화구이며...”라고 언급한다. 또한 천제연폭포에서는 “요즘에는 이 낙차의 수력을 이용하여 전기를 일으키고 문명적 시설을 해보고 싶다고 떠들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묘사 전반에 걸쳐 여전히 심미적이고 문학적인 관점이 주를 이룬다. 목록의 마지막에 있는 차귀도는 조선인의 관점에서는 다소 생경하지만 식민지배의 관점에서 중요한 역사유산으로 여겨진 듯하다.
그리고 어쩌면 위의 요소들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저자 구로이타는 제주의 자연과 문화에 대한 대단히 긍정적인 관점을 지속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조선시대에 제주에 파견된 중앙관리(목사)가 대체적으로 가졌던 제주의 풍토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과 완전히 대조적이어서 흥미롭다. 책의 앞 부분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南鮮의 낙원이라고 일컬어지는 제주도란 어떤 곳일까? 풍광이 뛰어나고 기후온화 天産物 풍부한 하늘이 준 낙원이지만 알지 못하는 분들에게는 한번 실지유람을 권하고 싶은 곳이다...(제주도 편역, 1997, 21)”
구로이타가 제주를 낙원으로 보는 이유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산물이 풍부하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제주는 “사계절이 온화하고” “토지는 비옥하고 임야가 넓게 발달하여” “임업에도 목축에도 농사경영에도 매우 유망한” 조건이다. 주위 사면의 푸른 바다에 “조류를 따라 수천만의 어족이 모이는” 최고의 어장이다. “해안에는 무진장이라고 할만큼의 전복 소라나 미역 등이 번성하는 ‘天與의 樂土’이다(제주도 편역, 1997, 22)”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낙원은 풍요로움을 표현한다. 빈곤한 삶과 낙원의 이미지는 좀처럼 연결짓기 쉽지 않다. 따라서 그가 생각하는 풍요는 단지 미래의 가능성에 있을 것이다. 제주를 “숨겨진 보고”라고 말하는 것은 “산업발전의 천연요소”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제주도 편역, 1997, 74). 외부인의 관점에서, 그리고 근대적 개발과 제국주의적 지배의 관점에서 제주의 산업적 가능성을 본 것이다.
구로이타의 ‘제주=낙원’ 관점은 20세기 이후 나타난 근대의 시각으로, 1930년대 이후에 신문에서 더러 발견되기 시작했다. 1935년 조선일보기사에 따르면 ‘남해의 낙원 제주’에서 29명의 천연두환자가 발생했다는 기사가 있다. 때로는 제주의 환경은 원래, ‘과거에’ 낙원으로 여겨질 만한 곳이었다는 인식 즉 ‘실낙원’의 관점도 곳곳에 드러난다. 이는 그 시점에서 낙원이라고 하기 힘든 제주의 현실 때문이기도 하고, 육지와 다른 제주의 환경에 대한 상찬이라고 할 수 있다.
“삼성혈의 전설에 유래된 고양부 삼씨의 시대는 절해의 낙원천국이었고 이조의 당쟁시대에는 원한의 유배지였고 피상적인 외지의 사람에게는 막연한 낭만의 섬이었던 제주도는 해방후 확실히 비극의 섬이었다...(1957년 9월 6일 조선일보)”
“탐라의 실낙원(1964년 7월 8일 경향신문)”
제주가 실낙원이 된 원인은 무엇일까? 이건의 『제주풍토기』 (양진건, 2008)에서 알 수 있듯이 가장 대표적인 근거는 벼농사가 쉽지 않은 토양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많은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았을 때, 공물로 끊임없이 수탈당했던 전복과 귤과 많은 산물들의 생산량을 고려한다면 제주는 생산을 위한 자연환경 측면에서 어쩌면 전체적으로는 근대 이전에도 풍요로운 낙원에 가까웠을 수도 있을 것이다.
2. 지크프리트 겐테의 근대적 심미안
낙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제주를 매력적인 장소로 여기게 된 새로운 근대적 관점은 독일인 지리학자이자 여행가였던 지크프리트 겐테의 저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1901년 6월 제주로 여행하면서 리파리군도(지중해 시칠리아 북쪽에 위치한 섬)에 바짝붙어 여행하던 과거를 회상한다. “...섬과 암초들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요염한 구름모자와 거품이 끓어오르는 듯한 모습으로 해안에 웅장하게 솟은 원추형 산은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저 높은 산봉우리에 올라서면 얼마나 멋진 광경이 펼쳐질까...(권영경 역, 2007, 239)” 겐테가 제주도에서 기대하는 ‘아름다운’ 풍경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39개가 넘는 기생화산 봉우리들이 나와 한라산 사이에 놓여 있었다(지그프리드 겐테, 2007, 257).”
“제주도 한라산처럼 형용할 수 없는 웅장하고 감동적인 광경을 제공하는 곳은 지상에 그렇게 흔하지 않을 것이다. 바다한가운데 솟아 있는 한라산은...거칠 것 없이 펼쳐진 바다위로 가파르게 우뚝 솟은 한라산 정상에서는 확 트인 시야에 온 사방을 둘러볼 수 있었다. 가지고 있는 두 개의 아네로이드 기압계로 신중하게 특정해 본 결과 분화구 맨 가장자리 높이는 해발 1,950m다....대서양에 우뚝 솟아 있는 그랜드 카나리아 섬의 피코 델 포조 데 라스 니에베스정도가 내가 말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비교대상이 될 것 같다...(권영경 역, 2007, 272)”
겐테의 관점은 자연을 인식하는 전형적인 근대인의 관점 즉, 낭만주의적 감각과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등반인(혹은 과학자)의 근대적 실천이 연결되는 지점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겐테는 비록 1세기전이지만 알렉산더 폰 훔볼트가 안데스산맥의 침보라소산을 오르면서 실천하여 이후 많은 자연과학답사의 전범이 되었던, 끊임없이 고도와 기압을 측정하고 신체의 지각과 반응을 확인하는 과학적 근대인의 태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낭만주의 대표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위의 방랑자(1815)’처럼 한라산정상에 서서 자연에 직면한 관조자의 시적 감각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진종헌, 2009 참조). 홈볼트는 자연을 끊임없이 측정하되 궁극적으로 하나의 통일체(Ganzheit)로 인식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실증주의적 과학자로 남지 못했지만, 백년후의 탐험가 겐테에게 이러한 태도는 이미 근대의 여행자들에 의해 수없이 반복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자세였다. 즉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관점의 심미성과 가치는 새로운 근대적 주체와 시각을 가진 등반에 의해 구성되었다.
백록담에서 겐테가 느끼는 압도적인 감동과 주변풍광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은 조선시대의 유학자들과 관리들이 느낀 다소 무덤덤한 경험 및 묘사와 대조된다. 목사 이형상은 한라산 산행을 꽤 길게 다루고 있는데 “혈망봉과 마주 앉았는데 봉우리에는 구멍 한 개가 있는데 구름낀 하늘을 엿볼 수 있다.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니 절벽이 천길이나 되는 깎아지른 석벽이어서 밑으로 내려가더라도 땅이 없을 것 같았다. 몸이 울렁이고 혼이 놀라 두근거리어 차마 위험을 무릅쓸 수 없었다...둘레는 10여리나 되고 깊이는 800자나 되는데 그 밑에는 백록담이 있다...(이상규·오창명 역, 2009, 54)” 이러한 묘사는 그가 전형적인 경승지에서 보이는 묘사와 큰 차이가 있다. 영실기암을 보면서 그는 “...그 지경을 말하자면 기암과 괴석들인데, 쪼아 새기고 갈고 깎은 듯 삐죽삐죽 솟아 있기도 하고...대화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이는 조물주가 정성스럽게 이루어 놓은 것이다.”(이상규·오창명 역, 2009, 67) 즉, 이형상은 백록담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아름답고 웅장하다는 느낌보다는 위험의 감각을 주로 느꼈던 것이고, 이는 그에게 ‘학습된’ 전형적이고 심미적인 경관체험의 형식 속에 백록담에서 아래의 바다를 조망하는 시선-근대의 시선-이 자리잡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3. 고토 분지로의 지질학적 관점
제주를 향한 근대의 세 번째 시선은, 겐테의 시점과 묘사에서처럼 심미적 경험의 변형으로 나타난 동시에 고토 분지로에 의해 과학(지질학)의 언어로 표현되었다. 그는 제주를 답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겐테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기록에 근거하여 간략한 지질학적 서술을 『조선기행록』에 포함시켰다. 그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자료에 근거하여 (아마도 그의 관점에서 지질학적으로 의미 있다고 생각한) 정상에 화구호(분화구)가 있는 화산추만을 대상으로 목록을 만들었다. 이를 합하면 제주지구 6개, 정의지구 4개, 대정지구 3개이다(표 6 참조). 고토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참고하였는데, 『남환박물』의 오름목록과도 유사하다. 아마 이형상목사 역시 동국여지승람을 참고했을 것이다. 『남환박물』에서 세 개의 지구를 합하여, 51개의 오름을 열거하고 있는 반면에 고토는 그 중에서 분화구(화구호)가 있는 오름만을 선별하여 지질학적으로 의미를 부여한다. 제주의 지형과 지질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이 없었던 그는 분화구의 유무를 화산지형의 근거로 인식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겐테와 고토 이래로 제주의 화산체는 분화구와 오름이라는 2개의 서로 다른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이렇게 형성되기 시작한 제주에 대한 지질학적 시선은, 이후 20세기 후반의 관광안내서에서 대표적인 오름들이 기생화산(parasitic volcano) 분화구로 소개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오름의 특징 혹은 일부 구성요소인 분화구가 아니라, 오름이라는 전통적 명칭을 대체하여 더 과학적인 ‘기생화산 분화구’로 명명된 것이다(그림 6 참조). 고토가 화산체를 단지 분화구로 명명했듯이 문화(오름)와 과학(분화구)은 이분법의 틀을 통해 대립되는 것으로 보여졌고, 20세기 후반까지도 꽤 강하게 유지되었다.
표 6.
고토 분지로의 『조선 기행록』에 나타난 제주 화산추 언급
출처 : 손일 역, 2010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의 대부분의 관광안내서에서 ‘오름’은 좀처럼 찾기 힘들었고 산굼부리를 비롯한 대표적인 오름만이 ‘기생화산’ 혹은 ‘분화구’로 소개되었다.5) 고토 분지로 이후 서서히 출현한 제주에 대한 새로운 근대적, 과학적 시선과 조사를 통해 ‘지질학적 비전’(geological vision, Braun, 2000)의 기초가 형성되었다. 라우텐자흐(김종규 등 역, 2014)는 이로부터 일제강점기 동안 축적된 제주에 대한 지질학적 지식을 종합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시대 문인들이 애매하게 대했던 백록담, 용암동굴 등 자연지형의 과학적, 교육적 가치가 해명되었고, 과거 경승지에 더하여 제주의 새로운 상징경관이 되었다. 물론 이는 외돌개나 용연과 같은 기존 경승지의 미학에 과학적 가치를 더하여 ‘지질학적 경관’의 또 다른 중요한 부분을 형성했다. 그러나 이 과정의 사회적 제도화는 상당히 느린 속도로 진행되었는데, 예를 들면, 주상절리에 대한 자연과학적 설명이 관광안내서에 명확히 포함되고, 용두암을 화산지형으로 설명하는 것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이다.
V. 결론
앞에서 정리한 것처럼 19세기말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위처럼 근대의 제주를 인식하는 세 가지 시선--① 자연에 대한 개발자의 시선-구로이타, ② 자연에 대한 낭만주의적 시선-겐테, ③ 자연에 대한 지질학적 시선-고토 분지로--이 새롭게 형성되었다. 이 세 가지 시선은 어쩌면 자연에 대한 근대적 시선의 주된 특성이기도 하다. 예컨대 19세기 유럽에서는 알프스에 대한 관점의 변화가 아래와 같이 세 가지 측면에서 나타났다. 알프스에 대한 종교적 두려움이 사라진 자리에 심미적 시선이 형성되었으며, 과학답사뿐만 아니라 정상등정을 위한 근대알피니즘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근대적 시선의 형성과 함께 영주십경의 경관적, 문화적 지위는 자연스럽게 격하되었다. 이한우의 시대에 유학자들 사이에 공유되었던 제주경관을 인식하는 종합적 관점으로서의 지위는 해체되었고, 세 종류의 근대적 시선으로 대체되었다. 전통적인 관점의 일부였던 ‘경승지’들은 명승고적의 근대담론과 제도속으로 포섭되었고 동시에 변형되었다. 전통적인 제주의 경승지는 양식화된 보는 방식에 의해 쉽게 인식할 수 있는 폭포와 절벽, 연못 등의 경관대상에 국한되었는데, 이러한 경관관점은 용암동굴과 같은 낯선 지형을 만날 때 감탄의 평가를 유보하게끔 만들었다. 또한 관광객의 시선은 Urry and Larsen (2011)에 의하면 “사회적으로 학습된 관점”이기에, 육지에서 경험하지 못한 백록담에서는 내려다보는 운해와 끝없이 펼쳐진 먼 바다의 심미성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지에 대해 유학자들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영실기암을 보면서 서로 경쟁하듯이 찬탄에 마지않으면서 시적 감흥과 정서적인 격동을 숨기지 않던 그들은 백록담 위에서 건조하고 차분히 가라앉은 설명문을 써 내려갔다. 근대의 경험은 겐테의 시선과 감흥을 점차 일반적인 것으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제주도뿐만 아니라 조선전체의 영토를 인식하는 새로운 관점-지질학적 비전(Braun, 2000)에 의해 용암동굴과 같은 특정한 지형경관들의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기존의 경승지들의 문화적 가치를 수정했다. 영주십경에서 강조되었던 문화경관은 ‘낙원제주’의 개발을 위한 자원으로 간주되었다.
이처럼 이한우가 품제한 영주십경은 제주를 ‘보는 새로운 방식(a new way of seeing)’으로서 역사적으로 형성되었고, 사회변화와 함께 변형되었다. 그리고 유학자들이 공유했던 상징경관으로서 영주십경의 형성과 쇠퇴의 과정은 전통과 현대를 단순하게 대립시키는 기존의 (무의식적인) 이분법을 수정한다. 20세기 후반의 제주관광에서 전통적 경관수사학으로서 영주십경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에 대해, “전통의 계승 혹은 재발견”이라고 단순히 설명할 때 우리는 영주십경이라는 ‘전통’의 역동성과 이질성, 그리고 역사적 변화의 중요한 의미들을 놓칠 수 있다. 전통과 현대를 고정성과 역동성의 대립으로 이해하는 것은 영주십경의 문화적 의미를 제한적으로만 인식하는 것이다. 영주십경을 ‘보는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현재-과거, 근(현)대-전근대(전통)의 이분법을 벗어나면서, 경관을 역사적으로 변화하는 사회관계 속에서 이해하고 문화적 의미를 찾는 것이다(진종헌, 2013 참조).6)
주
1) ‘11경 용연야범’과 ‘12경 서진노성’은 이한우의 영주십경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그 후 제안된 영주십일경과 영주십이경에 포함되는 장소로서 특히 11경에 속한 용연은 용두암과 함께 현대에도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2) 해안지대는 19세기 이후 위험한 변방지대에서 요양과 건강을 위해 우수한 환경으로 재인식되었고 주거지로서 장점을 갖게 되었다. 캘리포니아의 말리부 해안과 같은 고급주택가는 그같은 해안지대의 지리학적 입지적 장점에 대한 인식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3) 참고로, 문화지리학자 네메스(고영자 역, 2012, 81)가 ‘한국의 하와이, 제주’라는 마케팅과 함께 제주가 연중 쾌적한 기후라는 ‘신화’가 20세기 후반에 수십년간 만들어졌다고 언급하는 것은 흥미롭다. 그에게 제주는 연평균 70일 정도를 제외하고는 눈비가 내리는, 온화한 기후와는 거리가 먼 환경이며, 오히려 그의 객관적 기후평가는 과거 육지에서 제주에 파견된 지방관의 부정적 인식과 유사하다.
4) 이에 대한 설명은 논문의 앞 부분을 참조
5) 1990년대 이후 오름경관에 대한 심미적 관점의 형성과 함께 오름은 기생화산 대신 본래의 이름을 서서히 되찾게 되었다(진종헌, 2016 참조).
6) 본 논문은 애초 준비과정에서는 관광안내서의 이미지에 대한 도상학적 분석을 통해 20세기 후반 제주관광에서 영주십경의 이미지가 어떻게 재현되는가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일제강점기-20세기 후반’의 시계열적 변화 속에서 영주십경의 이미지가 어떻게 차별화되어 재현되는가를 살펴보려 했다. 그러나, 전체 분량이 너무 방대해지고, 주제의 일관성이 흐려진 탓에 해당내용을 후속연구로 출판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