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II. 국경도시이자 평안북도 관찰부 소재지인 의주읍성
1. 지도를 통해 본 의주읍성의 공간구성
2. 의주읍성 내 통군정의 경관적 가치
III. 근대도시 의주의 도시표상으로 의주공원 조성
1. ‘의주공원기성회’와 어대전 기념공원
2. 근대 도시문화를 경험하는 의주공원 이용행태
IV. 의주의 도시 정체와 국경지대 명소의 성립
1. 신의주의 부상과 의주의 정체
2. 일제강점기 관광객 유인을 위한 의주공원의 명소화 방안
Ⅴ. 결론
I. 서론
의주로는 한성과 의주를 잇는 도로로 고구려의 역원제(驛院制)에서 시작하여 조선시대 중종대에 모습을 갖췄다. 의주는 압록강변 국경에 입지한 도시로 방어의 요충지이자 조선과 중국의 외교와 무역에서 중요한 도시였다. 고려시대 용만현(龍灣縣) 또는 화의(和義)로 불리다가 1117년(예종 12) 서북면 의주로 개편되었다. 조선시대 1402년(태종 2)에 판관(判官)을 설치했고, 1413년 평안도 의주목, 세조때 진을 설치하여 국경지대의 중요한 관방(關防) 역할을 담당했다.
의주읍성은 정확한 축성연대는 알 수 없지만, 고구려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북방의 국경지대에서 동계는 함경도와 강원도의 일부 지역, 서계는 평안도 지역에 해당한다. 의주읍성은 이를 아우르는 양계(兩界) 지역에 축조된 읍성으로 분류된다(문화재청, 2014). 이때 통군정은 의주읍성의 북쪽 장대 역할을 하는 루정이다. 건립 초기에 대한 기록은 명확하지 않지만 대체적으로 15세기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조선유적유물도감 편찬위원회, 2002). 일제강점이 시작되자 통군정 일대는 근대공원으로 변모했고, 현재는 삼각산유원지로 불린다(현인, 2003).
근대공원과 관련된 선행연구를 살펴보면 도시적 맥락으로 조성된 공원의 특징과 특정 부지의 경계로 한정된 개별 공원의 변천 연구로 구분된다. 지역적으로 재구분하면 남한 내 공원에 집중된 경향을 보인다. 도시계획과 관련된 근대공원의 등장은 김영하 등(2017)은 조선시가지계획령으로 고시된 부산 소재 도시공원을 분석했고, 조세호(2016)의 경성부 도시계획에서 나타나는 공원 양상을 도출한 것이 대표적이다. 일제강점기 개별 공원은 남산공원, 탑골공원, 독립공원, 효창공원, 장충단공원, 사직공원, 훈련원공원, 앵정공원(서영애・손용훈, 2013; 김해경 등, 2013; 이유직, 2008; 김해경, 2010; 김해경・최현임, 2013; 김서린 등, 2014; 김해경・김영수, 2016; 안상민・石田潤一, 2014)처럼 경성에 집중된 경향을 보이나 근래 전주 다가공원(김해경・박세린, 2023)과 공주 산성공원(고순영, 2022)처럼 지역에서의 근대공원 역할로 확장하는 추세이다.
북한에 조성된 근대공원은 북한 사회의 폐쇄성과 학문적 교류의 불합리성으로 제한적으로 수행되었다. 북한의 공원 관련하여 김동찬 등(1995)은 북한의 공원과 유원지 형성에 대한 시대별 고찰과 평양을 비롯한 5개 사례지에 대한 분석을 수행했다. 김해경(2022)은 일제강점기 평양에 조성된 6개 근대공원의 조성 배경과 공간구성요소, 이용행태 특성을 분석했다.
선행연구를 살펴보면 경성 내 개별 공원의 공간구성에 대한 분석에 집중되었으며, 북한 지역의 근대공원 연구는 시작 단계이다. 근대의 발명품으로 여겨지는 근대공원(황주영, 2014)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지역에서는 근대도시 이미지를 표방하는 도구 역할을 담당했다. 이때 공원 조성배경에는 일제 식민지의 지배 당위성을 표출하고자 하는 의도가 작용했다. 그러나 북한에 입지한 도시는 총독부의 직접적인 영향보다 일제 식민지 지속성을 위한 교통 확장과 개발 목표에 따라서 도시의 발달이 영향을 받았다. 경의선 확장으로 만주로의 철도가 신의주에서 연결되자, 교통과 물류가 집중되었고, 의주 근대공원의 효용성은 변모했다. 평안북도 의주 통군정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공간의 효용성이 달라진 지표 역할을 했다. 시대적 상황에 따른 의주의 도시적 맥락 변천, 도시에 포함된 통군정의 역할 변화에 주목했다. 분석 과정은 의주의 도시적 변화, 통군정의 공원화 과정과 이용행태, 당시 미디어에 등장하는 명소화 방안, 의주의 도시 변천 맥락에 따른 근대공원의 역할을 도출했다. 내용 분석으로 당시 상황을 반영하는 잡지와 신문기사, 그 외 관광 목적으로 작성된 관광안내도, 공간 구축을 위해서 작도된 공원 평면도를 분석했다. 실제적인 변천 과정은 각 시대별 지도와 사진의 정합성을 확보했다. 명소스탬프 도안에 구현된 의주의 도상을 분석하여 관광의 제공자와 수용자적 도시 이미지를 살펴보았으며, 도시 성장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 통계 자료를 활용했다.
II. 국경도시이자 평안북도 관찰부 소재지인 의주읍성
1. 지도를 통해 본 의주읍성의 공간구성
조선시대 9대 간선로의 하나인 의주로의 종착지(그림 1a 참조)인 의주읍성의 형태와 공간구성은 조선시대 후기 지도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 의주읍성은 북문, 수문, 서문, 남문, 대동문, 소동문을 통하여 출입이 가능하며, 구룡산과 이어지는 능선에는 장대 역할을 하는 통군정이 위치한다. 읍성 내부에는 내아, 객사, 동헌이 위치하며 객사 전면의 넓은 도로는 남문과 연결되어 있다(그림 1c 참조). 읍성의 주진입부에 해당하는 남문은 2층 누각 형태로 1613년(광해군 5)에 축조, 1744년(영조 20)에 수리, 1769년(영조 43)에 개축, 1849년(헌종 15)에 재수리했다. 용만관(龍灣館)은 중국 사신이 조선으로 들어올 때 사신들을 맞는 객사로 북문과 남문을 연결하는 읍성 중심에 위치한다. 지방관아인 동헌에 해당하는 아사(衙舍)를 비롯한 읍성 내부의 건물은 대부분 남향이다. 남문 인접의 안과 밖은 민가이며 주변에는 시장이 형성되었고, 소동문을 통해서 외부로 나가면 향교와 연결된다.
각 도를 관할하는 행정 관청 명칭은 조선시대에는 감영(監營), 1896년 지방제도 개편으로 관찰부(觀察府), 일제강점기에는 도청(道廳)으로 개칭되었다. 1896년의 개편에서 관찰부 소재지는 경기도가 한성에서 수원으로, 강원도는 원주에서 춘천으로 바뀌었다. 경남 진주, 전남 광주, 충북 충주, 평북 정주, 함북 경성에 관찰부가 새롭게 설치되었다(최지혜・한동수, 2021). 이때 평안도는 평안남도와 평안북도로 분리되었고, 평안도 감영이 있었던 평양은 평남 관찰부 소재지가 되었고, 평북은 정주에 설치되었다. 평북의 관찰부는 1897년 정주에서 영변으로, 1908년에는 통감부 주도로 의주로 이전했다(그림 1b 참조). 이때 신의주는 행정적 요건을 충족시킬 기반시설이 부족했고, 의주는 조선시대에 구축한 기반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일제강점 초기 제국주의적 관점이 작용한 조선 국경지대의 행정 중심 도시 선정은 중요했다.
측량으로 작도된 지도인 1915년 지도를 보면 의주읍성이 지닌 조선시대 관아 건물은 일제강점기 의주군의 관청으로 활용되었다. 통군정 후면부, 평안북도 안주(安州)와 연결되는 주내면 도로 일대의 성곽이 멸실되었지만 읍성 형태는 유지하고 있었다(그림 8a 참조).
2. 의주읍성 내 통군정의 경관적 가치
통군정의 초기 기록은 불명확지만 1478년에 증축, 1538년에 개축을 비롯하여 수차례 보수를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15세기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관서명승도(關西名勝圖)는 평안도의 명승을 그린 실경산수화이다. 박정애(2008)의 연구에 의하면 은산 담담정(澹澹亭), 성천 강선루(降仙樓), 의주 통군정(統軍亭), 강계 인풍루(仁風樓), 평양 부벽루(浮碧樓)와 연광정(練光亭), 삼등 황학루(黃鶴樓), 영변 약산동대(藥山東臺), 안주 백상루(百祥樓), 개천 무진대(無盡臺), 어천 사절정(四絶亭)이다.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형태의 관서명승도가 유행하였는데, 통군정은 대부분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통군정이 관서지방의 대표적인 명승임을 반증하고 있다. 이중에서 조선시대 후기 그림에는 우측부에 의주읍성 북문이 표현되어 있다(그림 3a 참조).
통군정은 의주읍성의 장대로 일대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입지한다. 주변 조망에 유리한 지점으로 전면에는 압록강이 부감되며, 서쪽으로 신의주와 용암포, 북쪽으로 요동, 남쪽에는 석숭산과 백마산이 조망된다. 읍성이 지닌 관방적 역할에서 적군 침입의 감시를 담당했다. 통군정은 군사시설이지만, 조망되는 주변 풍광의 우수함을 시로 표현한 작품이 다수가 있다. 이안눌(李安訥)의 『동악집(東岳集)』 권2 「조천록(朝天錄)」(1601)에 ‘등통군정(登統軍亭)’이 대표적이다.
통군정 규모는 ‘평안북도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지정 요청에 관한 건’ 포함된 도면에서 부지는 264평, 건평은 118평이다(그림 2 참조). 지붕형태는 팔작이며, 전면 4칸의 58.016 m, 측면 4칸의 38.802 m이다. 기둥은 별다른 장식이 없는 열린 구조이며, 하부는 자연석 덤벙주초이다. 중심부에는 丁자형 우물마루가 구축되어 있다. 기단부는 평면상 우측부에 놓인 계단으로 진입이 가능하며, 건물 마루는 좌우쪽에서 진입이 가능하다.
일제강점 직전인 1909년 1월에는 순종의 전국 순행이 진행되었다. 그해 1월 7일부터 6박 7일 간 경상도와 충청도를 순행했고, 1월 19일에는 의주 순행을 발표했다. 1909년 1월 27일부터 7박 8일의 일정은 평양-의주-신의주-평양-개성이며, 의주는 1월 29일과 30일까지 머물렀다. 당시 사진을 보면 우측부에는 의주읍성의 흔적이 보이며, 통군정 기둥에 휘장을 둘렀고, 측면에 설치된 녹문(綠門)에는 태극기와 일장기가 걸려 있다(그림 3c 참조). 이는 순종이 통군정에 임어(臨御)했음을 보여준다(≪황성신문≫1909.1.30). 통군정은 압록강 너머까지 볼 수 있는 열린 경관을 형성하는 지점으로 순종 순행 장소가 된 중요한 건물이었다.
III. 근대도시 의주의 도시표상으로 의주공원 조성
1. ‘의주공원기성회’와 어대전 기념공원
일제강점 초기 의주는 다양한 관공서가 입지한 중심도시로 부상했다. 1915년 지도를 보면 의주읍성 내부에는 도청, 군청, 면사무소, 지방법원 출장소, 헌병분대, 위수병원 분소, 물산진열장, 공회당, 소학교, 잠업전습소, 배수지가 입지해 있다. 과거 조선시대 행정시설은 일제강점이 시작되자 도청사, 용만관은 경찰부 헌병대, 동헌은 수비대로 활용되었다. 성곽 외부는 자혜병원, 보통학교, 수도기관고, 연병장, 농업학교 경작지로 변모했다(그림 8a 참조). 이때 수비대와 위수병원 분원의 의주 입지는 국경지대라는 특수성이 반영된 것이다. 의주읍성 외곽에 위치한 자혜병원은 관립병원으로 1909년 2월 청주와 전주를 시작으로 1910년 1월 함흥, 9월의 지방 10개소 도시에 추가 건립 당시 의주가 포함되었다. 의주읍성남문은 1910년에 수리와 함께 좌측에 물산진열관, 우측에 공회당, 전면에 군청이 입지하여 일제강점기 초기 중요공간으로 인지되었다.
일제강점 전 통군정 일대는 군사시설로의 기능이 소멸되었고, 의주 군민이 신선한 공기를 맡으며 걷는 쾌적한 산보지로 이용했다. 일제강점 이후인 1915년 11월 10일의 대정천황(大正天皇) 즉위식인 어대전(御大典)을 기념하기 위한 공원 조성이 결정되었다(≪매일신보≫1915.9.15). 1915년 10월에는 ‘의주공원기성회’가 조직되어 공원 조성 내용을 발표했다. 통군정 일대가 공원대상지로 결정된 배경에는 통군정이 지닌 경관적 가치와 함께 공사 비용의 절약이 포함되어 있다. 일제의 공사비 지원이 아닌 기성회 납부를 통해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기성회가 발표한 조성 경비는 총액 오천 원이며, 공사는 2개년으로 계획했다. 공원 계획내용을 보면 공원내 적당한 장소에 관리소 설치, 어대례기념비 건설, 주간은 국기대로 이용되며 야간에는 점등으로 활용할 수 있는 국기대 설치, 통군정과 대신궁 중간 지점을 굴하(掘下)하여 압록강 변의 구룡폭포와 연결된 통로 설치, 통로 좌측의 굴착 지점에 대고교(大鼓橋) 가설 연결, 각 공간 특색을 살린 나무와 서남면 부분의 과일나무 식재, 사설실(私說室)・끽다점・물매점・휴식소 설치(≪매일신보≫1915.10.16)이다.
의주공원의 당시 특징적인 시설물 중의 하나는 즉위비와 조명 시설을 겸한 국기대이다. 즉위비는 어대전 기념이라는 공원의 조성 목적을 보여주며, 조명시설은 압록강 인접 지역에서 시각적인 주목도 확보와 야간 이용에 대한 배려이다(그림 4 참조).
공원 조성 이후인 1917년에는 통군정 우측 구릉지에 의주신사가 건립되었다. 그해 6월 11일에 제신(祭神)으로 천조대신(天照大神)을 모셨다. 운동장과 연결된 부분의 계단이 있는 도리이(鳥居)를 통해서 진입하며, 배전과 본전을 갖춘 간결한 구성이다(그림 5c 참조). 동선은 공원 내 각 요소에 접근할 수 있는 매개체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1915년 지도에서 통군정으로의 진입은 도청 후면부를 통해서이며, 끝부분에 계단이 있다. 1934년 지도와 비교하면 소학교를 지나 운동장에서 통군정으로 진입하는 동선과 소학교의 좌측에 동선이 발생했다. 각 요소로의 접근성이 세밀하게 변모했고, 전체적으로 순환하는 형태가 되었다(그림 5b 참조).
일제강점기 엽서에는 의주공원 공간구성요소의 구체적인 형태를 알 수 있다. 산책로의 교차로 지점은 대고교라 불렸던 입체적인 구름다리를 구축했다. 산책로 중간에는 그늘시렁을 조성하여 휴게시설을 만들었고, 일부는 육각정를 도입했다. 각 공간의 경사지는 성돌을 이용한 석축을 쌓아서 안정화 조치를 취했고, 수목에는 지주목을 세웠다. 정구장으로 이용되는 운동공간 우측부에는 임시적인 간이 휴게시설을 조성했다(그림 6b 참조).
1927년에는 동물원 신설이 거론되었고, 당시 면장은 위원면 고려탑의 공원 내 이전과 정자 십여 개의 건립 계획(≪매일신보≫1927.6.14)을 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2. 근대 도시문화를 경험하는 의주공원 이용행태
전통적인 행락공간과 문화를 살펴보면 정주환경과 자연환경의 경계에서 시작하였고, 생활과 밀접한 일상의 공간과 자연 속에서 진행이 되었다(황기원, 2009). 행락 행태를 보면 주변의 자연을 활용하여 시회나 계회처럼 특정 계층의 문화로 인식되었다(김해경, 2011). 일제강점기 공원은 진입에 있어서 계층을 제약하지 않는 공공성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기존과 다른 이용행태를 보인다. 이는 근대도시 의주가 필요한 공간구성과 공원의 이용행태로 구분될 수 있다.
의주읍성 내부는 건물 밀집도가 높기 때문에 관공서 주최의 대규모 행사 진행 공간이 부족했다. 공원 조성 초기부터 운동장이 제일 먼저 고려된 배경이다(≪매일신보≫1915.10.20). 운동장 규모는 L100 m×W50 m이며, 매일 인부가 4백여 명이 투입되었다(≪매일신보≫1916.4.18). 1916년 6월 5일에 공사가 완료되어 축하회를 거행했다(≪매일신보≫1916.6.2). 운동장은 의주군민의 육상경기뿐만 아니라, 산업품평회 개최 당시에는 육각대를 설치하여 활동사진 상영과 기생의 공연(≪동아일보≫1926.9.16), 1934년에는 천도교소년연합회의 어린이날 행사 장소로 활용했다(≪조선일보≫1934.5.8). 이처럼 각계각층의 다양한 행사의 장소로 이용되면서 ‘광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1934년 공포된 조선시가지계획령이 나진을 비롯하여 1936년 경성, 1937년 대구, 부산, 평양, 함흥에 적용된 후 신의주, 진남포, 해주, 원산, 군산 등에서 도시계획으로 결정되었다. 이때 각 도시는 도시적 맥락의 공원과 광장이 고려되었다. 도시계획의 적용에서 우선 순위가 되지 못한 도시인 의주는 의주공원 내 운동장이 광장 역할을 담당했다.
운동장은 관공서 행사뿐만 아니라 학교 운동회 장소로 활용되었다. 읍성 내부에 소학교와 보통학교와 같은 교육기관이 마련되었지만, 운동공간은 없었다(≪동아일보≫1921.10.4, ≪동아일보≫1925.8.31). 일제강점기였지만, 조선인에게 중요한 명절인 단오날 행사장소로 이용되었다. 매년 단오날이 오면 운동장에서는 씨름의 다른 명칭인 각희(脚戲) 경기장소로 이용되었다(≪동아일보≫1921.6.16, ≪동아일보≫1922.6.8, ≪조선일보≫1929.6.2).
의주공원은 대규모 행사 공간 부족이 제약요소였다. 그러나 운동장 조성을 통해서 근대시민이 갖춰야 할 운동경기뿐만 아니라 관제행사를 통한 일제의 홍보를 경험하는 공간 역할을 담당했다. 구릉지에 발달한 산책로 조성은 통군정뿐만 아니라 압록강 너머의 경관을 부감할 수 있었다. 산책로와 연계된 벤치와 그늘시렁 등의 휴게시설은 누구나 제약없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이처럼 의주공원에서는 공원의 기본적인 녹음 제공과 휴식뿐만 아니라 동적인 운동, 주변 경관 조망과 함께 의주신사를 통해서 식민지 종교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IV. 의주의 도시 정체와 국경지대 명소의 성립
1. 신의주의 부상과 의주의 정체
1904년 러일전쟁 당시 경의선 종점은 중국과의 연결성으로 압록강철교를 고려했다. 이때 의주는 도시 기반시설은 갖췄으나 인접한 중국 구연성은 산지 지형으로 철교 가설이 부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의주 하부의 평지와 중국 남쪽 평야 지대인 안동(安東)의 연결이 결정되었고, 그 평지 지역은 ‘신의주’로 명명되었다(손정목, 1982). 압록강철교는 선박이 항해 가능한 회전교로 1909년 8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911년 11월에 완공했다. 중국과의 교통로 연결은 일제가 식민지 확장의 목적으로 구축한 만주국까지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신의주는 군사 신도시로의 발달과 확장이 중요해졌다. 요시다 하츠사브로(吉田初三郞)가 그린 조감도 형식의 관광지도는 실질적인 규모가 아닌 당시 사회적 배경의 중요도를 반영하여 도시를 표현했다. 1929년 작도된 관광지도에서 신의주와 의주를 비교해 보면 압록강철교와 연결된 신의주가 통군정 중심의 의주보다 크게 그려져 있다(그림 7a 참조). 1938년 지도에서 신의주는 안동과 연결된 압록강철교가 보이며, 가로가 격자형인 신도시로 발전하여 각종 관공서가 입지했다. 이때 의주와는 도로로 연결되었고, 의주는 교통이 불편하다는 표현으로 비교하여 신의주의 도시적 위상과 팽창을 보여준다(그림 7b 참조).
도시적 관점에서 신의주 발달과 의주의 정체는 관공서 이전과 상관성이 높다. 1921년부터 통군정 하부의 입지한 평안북도청의 신의주 이전설이 등장했다. 1923년 4월 19일에 건물이 화재로 전소되었고(≪동아일보≫1923.4.21), 도청의 개축설과 이전설이 함께 거론되었다. 그러나 평안북도청은 신의주로 이전하여 그해 12월 이전식을 진행했다(≪동아일보≫1923.12.2). 1915년과 1934년 지도를 비교했을 때, 남문 근처 의주군청이 도청 부지로 이전했고, 잠업전습소, 위수병원 분소, 헌병대, 수비대, 헌병분대가 사라졌다. 그러나 읍성의 멸실 부분과 전체적인 도로 체계는 큰 변화가 없다(그림 8b 참조). 다만 도청의 신의주 이전 후 의주공원은 의주면에서 관리를 담당했다(≪매일신보≫1927.6.14). 1922년에는 신의주에 신만(新灣)운동장이 건립되어(≪동아일보≫1922.6.3), 축구경기와 같은 대규모 행사를 진행했다. 이에 의주공원 내 운동장 이용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서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1934년 지도를 보면 소학교 전면 경찰부 헌병대가 신의주로 이전 후 운동장으로 변용되었다(그림 5b 참조).
의주와 신의주의 도시 변화는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인구 관련 통계 자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조선총독부통계연보(朝鮮總督府統計年報)』를 보면 관청 이전과 이후의 의주와 신의주의 인구 변화가 확인된다. 1925년에서 1942년까지 신의주는 전체 인구가 104,569명이 증가했고, 이중에서 일본인은 4,716명 증가, 조선인은 89,879명이 증가하여 급격한 인구 변화를 보인다. 의주 전체 인구는 1940년대에 들어서자 일시적인 증가를 보이기도 했다. 1942년 전체 인구에서 감소가 있기는 했지만 인구 구성에서 일본인은 606명 증가, 조선인은 818명이 감소했다(그림 9 참조). 이처럼 의주 조선인이 감소한 것은 도시의 정체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지표이다.
2. 일제강점기 관광객 유인을 위한 의주공원의 명소화 방안
1) 벚꽃과 단풍을 통한 계절적 명소
조선 후기 관서지방은 중국과 조선을 오가는 사신과 역관, 상인들의 경유지로 중요했지만, 관찰사 교체가 빈번했고, 이로 인한 환영과 전송 의례, 위로, 향연과 관련한 공연이 활발했다. 이때 건축물인 평양 연광정과 부벽루, 성천의 백상루, 선천의 의검정과 천연정, 의주의 통군정과 인접한 강에는 배의 띄운 선유놀이를 즐겼다(송혜진, 2011).
철도 발달은 조선내 각 도의 명소가 관광지로 부각되었으며, 관광지도와 책자 발간을 촉진시켰다. 이때 각 명소는 방문을 유인하기 위해서 사진과 함께 지역 특색을 간략하게 서술하여 홍보했다. 신문 또한 각 명소에 대한 기사가 증가했고, 수익을 위해서 관광객을 모집하기도 했다. 의주는 북조선 구석에 위치한 철도와 연결되지 않은 역사성을 지닌 도시이며, 압록강의 어적도, 검동도, 묵동도, 위화도가 조망되는 관서팔경의 하나로 서술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선조가 통군정에서 통곡하여 ‘통곡정’이라고 불렸다고 했다(≪동아일보≫1926.8.25). 1929년 ≪조선대도회≫를 보면 신의주는 건물이 밀집한 근대도시의 면모를 갖춘 모습으로 묘사되었고, 의주는 자연구릉지 정상부에 통군정이 입지한 자연지형이 강조되었다(그림 7b 참조). 표현된 도시 모습에서 의주는 통군정을 지닌 명소임이 부각되었다.
『조선의 사계(四季の朝鮮)』를 보면 서선(西鮮)의 꽃 명소로 의주가 거론되었다. 통군정 일대는 1915년부터 벚나무 수 천 본을 식재했고, 해마다 경관적 가치를 향상시키는 보식을 진행했다. 개화기에는 일본인이 내지의 봄을 연상시키며, 이 모습은 하얀 구름 위에 통군정이 위치한 것처럼 보인다고 묘사했다. 통군정 주변에 벚꽃이 피는 풍광은 일제강점기 엽서로 발간되어 판매되었다(그림 10 참조).
1927년에 ≪경성일일신문≫과 ≪동아일보≫에서 철도국의 후원으로 ‘조선팔경’을 선정하는 미디어 이벤트를 진행하였는데, 통군정이 포함되었다. 벚꽃 개화기에 국경의 봄을 알려주는 장소이자 가을의 단풍 명소가 선정 배경이 되었다(≪조선일보≫1936.4.26). 조선팔경은 통군정, 무등산 적벽, 평양 모란대, 황해 장수산, 충북 속리산, 경북 주왕산, 함북 주을온천, 충남 부여(홍영미, 2012)이며, 조선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홍보되었다.
각 미디어에 의주가 명소로 등장할 때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내용은 봄에는 앵꽃(벚꽃), 가을에는 단풍이다. 더불어 원경에는 안동과 신의주가 조망되는 장점으로 신의주와 안동 간 완상객이 많이 몰린다고 했다(≪동아일보≫1927.5.23). 이처럼 의주는 벚꽃과 단풍으로 구축된 계절적 명소로 일제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발견되었고 홍보되었다.
2) 일본의 전적지 강조를 통한 상징적 명소
의주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패를 좌우했던 분기점이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당시 격전지인 호산(虎山) 구연성이 조망된다고 했다(≪동아일보≫1926.8.25). 1926년 5월에는 일본군의 용맹을 기념하기 위한 충혼비 건립이 논의되었다(≪조선신문≫1926.5.27). 위치는 국경지대에서 여행객들이 대부분 방문하는 통군정으로 정해졌다(≪경성일보≫1926.7.8). 충혼비 하부는 계단형의 점층적으로 높아지는 기단부 위에 석재 조적조로 보이는 오벨리스크 형태였다. 높이는 도면이 없지만 인물 크기로 비교할 경우 7m 남짓으로 추정된다(그림 11b 참조). 1927년 5월 11일에 의주군의 주요인사가 참석한 충혼비 제막식을 거행했다(≪조선신문≫1927.5.11). 충혼비의 입지 특성은 1929년 관광지도와 신문기사, 1934년 지도에서 찾을 수 있다. 관광지도에서 통군정 우측부에는 충혼비가 표시되어 있어 당시 의주에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시각적 점경물 역할이 확인된다(그림 11a 참조). 조선시대 역사적인 명승지인 통군정과 일본과 관련된 전적지를 표상하는 충혼비가 동등한 위상임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전적지임을 강조하기 위한 노력은 1937년에 군당국의 보승회 조직으로 이어졌다. 의주군수가 회장인 ‘통군정보승회’였는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기념관을 조성하고자 노력(≪경성일보≫1937.6.2)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그해 6월에는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고적보물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의 위원회에서 통군정을 명승고적으로 지정했다(≪조선일보≫1937.6.5). 통군정의 지정 배경에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전적 기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조선일보≫1938.1.11).
일제강점기 철도는 ‘이동’과 ‘소비’라는 관광으로 실체화되었고, 각 지역의 방문을 유도하기 위해서 각 도시의 특징을 도상으로 표현한 철도 기념스탬프가 등장했다(김경리, 2019). 이때 각 도상은 일제의 시선으로 선택되고, 부각된 지역 명소 역할을 부여받게 된다. 의주와 관련된 명소스탬프를 보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요소는 통군정, 충혼비, 벚꽃, 압록강이다. 벚꽃 형태 내부에는 ‘平北’과 ‘統軍亭’이라는 글씨와 통군정과 충혼비가 표현되었다. 통군정 건물 하부의 구름 도형 속에 벚꽃이 핀 모습과 X자형으로 배치된 일본검 도상으로 전쟁의 전적지임을 간결하게 보여준다(그림 11c 참조). 1932년 의주우편국에서 발간한 스탬프는 보다 실경에 가깝게 압록강을 포함한 주변 경관까지 사실적으로 묘사된 충혼비과 통군정이 보인다. 이때 전면에 내세운 것은 구릉지에 랜드마크(landmark)처럼 시각적으로 강하게 인지되는 충혼비로 통군정을 배경으로 활용했다(그림 11d 참조).
이처럼 일제강점기 의주는 과거 조선의 국경도시가 아닌 통군정을 중심으로 일본의 전쟁 관련 기념물이 복합된 공원이 벚꽃 명소로 부각되었다. 공원 명칭은 ‘의주공원’과 ‘통군정공원’으로 혼용되었는데, ‘의주를 대표하는 공원’, ‘의주 유일의 공원’, ‘의주를 대표하는 시각적 점경물인 통군정’이란 의미를 내재하고 있다. 국경을 넘어서는 여행객들이 통군정 공원을 방문할 경우 의주신사를 통한 종교적 상징성, 공원의 공공성, 기념물을 통한 일본 전쟁의 당위성을 경험할 수 있는 장소로 변모한 것이다.
Ⅴ. 결론
일제강점이 시작되자 각 지역에는 근대도시로의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전국적으로 근대공원 조성이 진행되었다. 이때 평안북도 의주는 1916년 공원 완성 이후 근대공원 경험이 도시적 맥락의 변천과 맞닿아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 통군정공원이자 의주공원의 성립 배경과 이용행태, 공원 조성 후 도시적 맥락의 명소화 과정을 분석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시대 의주는 국경지대 관방 역할로 중요시 되었다. 의주읍성의 가장 높은 지점에 입지한 통군정은 관서팔경의 하나로 관서명승도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이러한 경관적 가치의 우수함으로 순종의 순행장소가 되었다.
둘째, 일제강점이 시작되자 의주읍성 내 조선시대 감영시설은 평안북도청, 의주군청, 면사무소, 지방법원 출장소, 군사시설인 헌병분대와 수비대로 사용되었고, 위수병원, 잠업전습소 등 다양한 시설이 입지했다. 일제강점 초기까지 의주는 행정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다. 이때 통군정 일대를 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해서 일제 주도가 아닌 ‘의주공원기성회’가 조직되었다.
셋째, 통군정 일대의 근대공원 조성 배경은 우수한 경관적 가치를 지닌 장소였기 때문이다. 휴식과 산보를 위한 공원 시설물 조성 경비를 절약할 수 있었다. 표방된 조성 목적은 1915년 일본 대정천황의 어대전 기념이었으며, 1916년 공사가 완료되었다. 통군정 측면에 즉위비와 조명시설을 겸한 국기게양대를 설치했고, 운동장을 비롯한 휴게시설과 산책로를 구축했다. 1917년에는 우측 구릉지에 의주신사가 조영되어 공원 조성 초기 위락공간과 종교공간이 공존했다.
넷째, 통군정공원 조성 당시 운동장 조성이 가장 우선시 되었다. 일제강점 초기 관제행사 장소가 요구되었으나 의주읍성 내부에는 공간이 협소했다. 운동장은 정지작업 후 주변 경사지의 안정화를 위해서 의주읍성 성돌을 사용했다. 의주군민이 참여하는 단오행사를 비롯한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는 장소였다.
다섯째, 경의선 종착역이 신의주가 되고 1911년 압록강 철교가 중국과 연결되었다. 1923년에는 평안북도청을 비롯한 관청과 군사시설이 신의주로 이전했다. 격자형 도로가 발달한 신도시인 신의주의 발달과 달리 의주는 과거 국경지대의 행정 중심도시다운 면모는 소실되었고, 인구 변화가 없는 정체로 이어졌다. 근대도시 문화를 전승하던 의주공원은 관광객을 유인하기 위한 명소화 방안이 진행되었다. 판매되는 엽서와 관광지도에 국경지대 봄철 벚꽃과 가을 단풍 명소로 홍보되어 관광 목적의 방문을 유도했으며, 1927년에는 조선팔경에 선정되었다. 단지 경관적 가치뿐만 아니라 1927년에는 일본의 러일전쟁과 청일전쟁의 전적지임을 표식하는 충혼비를 건립했다. 의주우편국 기념스탬프에는 통군정과 충혼비가 도상으로 구축되어 전적지 상징성을 시각적으로 보여줬다. 이처럼 의주공원은 근대도시로의 표상에서 관광과 일본 전적지가 공존하는 장소로 인식이 변모했다.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 초기 의주의 도시적 변천에서 통군정을 내포한 의주공원의 장소 인식 변화를 도출했다. 이는 근대공원 연구의 지역적 확장뿐만 아니라 공원의 다층적인 역할 도출에 의의가 있다. 이후 통군정공원의 해방 이후 공간적 변천에 대한 후속 연구 진행이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