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지리학회지. 30 September 2026. 235-252
https://doi.org/10.22905/kaopqj.2026.60.3.5

ABSTRACT


MAIN

  • I. 서론

  • II. 정신분석지리학, 개성화 과정, 그리고 지리학적 연관성

  • III. 지리학과 정신분석학에서의 영화분석과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에 대한 소개

  • IV. 개성화 과정과 되어가는 지리적 환경

  •   1. 신체화와 단절된 일상: 페르소나 단계

  •   2. 신체적 감각을 통한 상상의 조우

  •   3. 내면 경계의 붕괴

  •   4. 되기로서의 자기실현

  • V. 요약 및 결론

I. 서론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비재현적 방법론은 참신함, 즉시성, 생명력, 창발, 실험적 창의성 등의 문제를 다룬다. 이를 위해 흐르는 시간 속에서의 실천과 순간적인 사건 및 행위의 즉각적인 표출에 무게를 둔다(김수정 등(공역), 2023; 정학성, 2023). 이와 같이 정동과 감각의 흐름을 중시하는 비재현적 접근법은 정신분석학적 그것과 그 궤를 같이한다. 비록 Freud(1856~1939)는 개인적인 적대감 때문에 영화를 사회 탐구 및 치료의 실천적 도구로 오래 사용하지 않았지만, 오늘날 영화를 통한 정신적 차원의 접근은 이미 보편적인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나아가 영화는 보이는 세계나 이미지(재현)를 넘어 체감되는 감각의 변주와 흐름으로 풀이되면서, 비재현적 방법론이 펼쳐지는 핵심적 탐구 대상이 되었다(Trifonova, 2014). 바로 이와 같은 사실에서 본 연구가 출발한다.

물론 연구의 대상인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Attila Marcel)󰡕은 전형적인 재현에 충실한 영화로 평가받을 수 있다. 사실 비재현적 방법론 측면에서는 민족지학적 영화(Ethnographic Film)를 선택하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에 한층 더 부합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일상을 배경으로 사건, 관행, 감정의 구조, 관계가 무수한 잠재력 속에서 전개되는 과정(Vannini, 2014)을 담아낸다. 또한 정동, 체화된 경험, 물질성 등 비재현적 이론의 주요 주제를 정신분석학적 내용과 긴밀히 연결한다. 무엇보다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비재현적 순간을 묘사하여 시대를 앞서간 Marcel Proust(1871~1922)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를 모티브로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재현적 영화 이면의 역동적인 비재현적 요소를 보여주는 사유의 장(場)이자, 분석 대상으로서 충분히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한층 더 의미 있는 사실은 영화를 매개로 한 접근이 정신분석학과 지리학이 이미 공유하고 있는 공통분모라는 점이다. Adams(2017)가 매체를 통한 세계의 이해를 ‘만남의 형이상학(Metaphysics)’의 귀결로 표현했듯, 영화는 단순한 경관(혹은 장소, 공간)의 집합체를 넘어 그 속에 제시되는 메시지, 맥락, 편향 등 다양한 요소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게 한다(장윤정, 2024). 더구나 오늘날의 영화지리학은 삶의 경험과 일상, 혹은 사회적 관계의 실질적 조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Aitken and Dixon, 2006). 이는 정신분석학이 다루는 신체와 정신의 관계, 혹은 인간 정신의 본질이라는 가치 및 주제와 맞닿는 지점이다(박수경, 2025). 결국 이러한 맥락은 주관성에 무게를 둔 정서적 수행력과 그 안의 풍부한 창조적 잠재력을 논하는 ‘비재현적・수행적・정서적 전환(Non-representational/Performative/Affective Turns)’의 흐름(Jones, 2011)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영화라는 매개를 통한 정신분석지리학적 분석의 위치성을 명확히 드러낸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Carl Jung(1875~1961)의 이론을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에 적용해 심리적 치유와 내적 성숙이 ‘되어가는(Becoming)’ 과정을 정신분석지리학적 차원과 연결해 고찰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친다. 우선, 정신분석지리학에 대해 이해하고, Jung의 개성화 과정의 주요 개념과 환상 및 정동이 뒤엉킨 무의식의 공간에 대해 언급한 Steve Pile(1961~)의 연구를 논의함으로써, 이를 한층 더 주체적(개인적)이고 치유적인 맥락으로 확장한다. 다음으로 방법론적 측면에서 영화분석을 알아보고, 본 연구의 대상인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에 대해 살펴본다. 이어지는 연구의 결과는 1) 신체화(Somatization)와 단절된 일상, 2) 신체적 감각을 통한 상상의 조우, 3) 내면 경계의 붕괴, 4) 되기로서 자기실현으로 구분해 기술한다. 마지막으로 주관적 웰빙과 정서적 환경에 대해 한층 더 깊이 사유해 본다. 본 연구는 아직 정신분석지리학에 대한 폭넓은 시도가 많지 않은 국내 지리학계의 현실에서 Callard(2003)가 우려했던 지리학에서의 “정신분석 길들이기(Taming Psychoanalysis Theory)”1)를 넘어, Jung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초월적인 차원의 무의식, 다시 말해 개성화 과정을 지리학적으로 복원하는 실천적 산물이라는 점에서 학술적 의의를 지닌다.

II. 정신분석지리학, 개성화 과정, 그리고 지리학적 연관성

정신분석학에서 마음의 역동성은 우리의 의식적인 삶과 정체성을 형성하는 방식을 제시하며, 궁극적으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규정하는 무의식적 차원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Stepney, 2017). 이와 같은 흐름에서 인문지리학자들은 인간의 공간적 관계와 세계의 문제 및 쟁점을 이해하기 위해 정신분석적 이론과 방법론을 활용해 왔고, 1990년대 후반에 들어 정신분석지리학이라는 하위 분야를 형성해 그 입지를 견고히 했다. 주요한 연구의 주제는 1) 만화경 같은 복잡한 내면세계와 무의식적 소통에 대한 탐구(Kingsbury, 2009), 2) 임상에서 정신분석의 수행 및 치료 환경에서의 치료자와 내담자의 치료적 만남(Kingsbury, 2004; Kingsbury and Pile, 2014), 3) 공간성과 주관성에 바탕을 둔 무의식에 대한 연구(Philo and Parr, 2003), 4) 정신의학과 연결된 트라우마와 고통 혹은 치료적 공간의 접근(Callard, 2014)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는 정신분석학을 지리학적 개념에 적용한 결과 및 현장을 연구함에 있어 지리학자가 갖추어야 할 정신분석학적 소양을 아우른 지표이다(Bondi, 2014b; Stepney, 2017).

사실 지리와 정신분석의 협력적 작업은 Freud, Lacan(1901~1981), Winnicott(1896~1971)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Callard, 2003), 이들은 공통으로 지리적 환경을 단순한 물리적 차원을 넘어 무의식, 관계, 상징, 권력, 욕망, 사회적 구성 등이 작동하는 심리적인 장소로 재정의할 수 있는 강력한 개념적 틀을 제공했다. 한편, Jung의 아이디어는 1980~90년대 일어난 정체성, 권력, 신체, 의미 등을 무게감 있게 다룬 ‘문화적 전환(Cultural Turn)’의 기류 속에서 형성된 정신분석지리학에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는데, 그의 연구는 신화, 상징, 영성, 보편성 등 개인 차원의 신비 혹은 종교적인 역사・문화 배경을 바탕으로 전개(정명진(역), 2021)했기 때문에 비판적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던 지리학자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매력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Freud가 신체, 정신, 환경, 사회적 관계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공간적 상호작용을 바탕으로 인간의 취약성을 명확하게 표현함으로써 “정신분석은 결국 공간적인 학문이다”라는 선언을 끌어냈듯이(Pile, 1996; Kingsbury, 2004), Jung의 견해 역시 충분히 깊은 지리학적 관점을 내포하고 있다.

직접적인 예시로 Jung(1964)의 󰡔Mind and Earth󰡕와 그의 관점을 정리(Sabini(ed.), 2002)한 󰡔The Earth Has a Soul: C.G. Jung on Nature, Technology & Modern Life󰡕에서 공통으로 지리(사실상, 우주, 자연, 지구 등을 의미하는)와 정신의 관계에 대해 통찰한 내용을 들 수 있다. 구체적으로 북미를 여행한 후 집필한 전자에서 그는 특정한 장소가 마음에 각기 다른 방향으로 영향을 미치며, 북미로 이주한 유럽 이민자들의 출신 국가에 따른 차별적 토착화 과정을 들어 설명했다(Tacey, 2009). 그리고 후자에서는 자연과 자아의 관계는 단순한 사물과 인간의 그것이 아닌 인간과 인간의 관계성과 유사한 신성한 것이며, 그렇기에 생명을 존중하는 개인, 집단, 전지구적 차원의 실천적 행동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Hess, 2019). 그 외에도 Jung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신성 구역을 뜻하는 말이자, 치료 및 내면 작업이 이루어지는 보호공간인 테메노스(Temenos)(Madden, 2020),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칭하는 국경 혹은 접경지(Threshold or Frontier), 열등하고 죄책감에 물든 인격인 이질적 영역(Foreign Territory), 원형(Archetype)2)이 반영된 도시 구조, 기념물, 광장 등에 대한 서술(Jung, 1959) 등을 통해 탁월한 지리학적 감각을 드러냈다.

특히, 본 연구에서 주목할 Jung의 지리학적 접근으로 위상학(Topology)의 개념을 들 수 있다. 지리학에서 (공간적) 관계성 혹은 연결성으로 표현되는 위상은 주로 지도학, 공간 분석 등에서 자주 언급되는 용어이지만, 인문지리학에서도 흐름, 변형, 비틀림, 접힘, 단절, 절단 등의 어휘(Martin and Secor, 2013)를 통해 권력관계, 사회적 상호작용, 변증법적 과정을 포착하는 방법론으로 적극 활용되고 있으며, 이러한 위상학적 탐구의 흔적은 Jung의 견해에서도 발견된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연구인 Adams(1998)는 가상 및 인식적 공간의 위상학을 다루면서 물리적 공간을 넘어선 정신분석지리학적 공간을 이해하고, 이를 Jung의 견해와 융복합적으로 연결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는 가상 공간의 위상을 소통자(Node)와 소통경로(Link)로 식별할 수 있으며, 이렇게 유형화된 위상이 사회적 상호작용에 일련의 기회나 제약을 제공한다고 설명하면서 관계와 연결성의 상대적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익숙한 장소 혹은 공간의 위상을 복제하는 과정은 사회적 구조화의 특성 요소들의 공유라 할 수 있고, 그것의 수준이 얼마나 특수한지 혹은 중요한지와 같은 질문은 그 위상의 사회적 함의를 탐구하는 근거가 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공간적 은유로 차용된 위상 개념은 공간, 사회, 관계성, 변화, 권력에 대한 지리학자들의 이해에 주요한 영향을 미치는 인식론적 지평을 넓히는 데 일조했다(Martin and Secor, 2013). 결국 (그것이 물리적이던 혹은 가상(상상, 심리 등)이든) 지리적 공간의 위상은 인간 무의식 속 다양한 요소가 연결망을 형성해 외부 세계로 가시화된 결과물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신분석지리학적 (혹은 이와 밀접한 관련을 둔 감정 및 정동과 관련된 연구까지 아울러서) 관점의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낸 Pile의 연속적인 저작은 앞서 서술한 내용을 한층 더 실증적으로 뒷받침한다. Pile(2008)이 밝힌 바와 같이, 공간적 위상은 물리적 개념(거리, 좌표 등)이 아니라, 몸, 감정, 권력, 무의식 등의 관계망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지리적 위상은 도시의 실체적인 배치의 펼쳐짐 대신, 몸, 감정, 권력 등이 서로 중첩되고, 연결되어 형성하는 관계 혹은 비선형적 공간으로 이해하는 틀로서 해석할 수 있다. 상기의 주장은 Pile이 끊임없이 고민했던 주체성(Subjectivity)의 개념에서부터 출발하는데, 그는 주체를 고정된 중심점이 아니라, 공간을 통해, 공간 안에서, 그리고 공간 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형성되고 개혁되는 대상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Pile, 2008).

더 나아가 Pile(2014)에서는 뫼비우스 띠(Möbius Strip)의 위상학적 도형을 통해 Freud의 두 가지 사례로서 인간이 비인간 세계와 얽혀 있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인 공간의 뒤틀림과 권력관계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와 유사한 아이디어로 정신분석지리학에서 Freud의 의식-전의식-무의식의 위상에 대한 논의(Bondi, 2014a; Kingsbury and Pile, 2014)와 Lacan의 상상계-상징계-실제계의 위상(Kingsbury, 2003; 2007) 및 토러스(Torus), 크로스캡(Cross-Cap), 뫼비우스 띠와 같은 도형을 사용하여 주체가 어떻게 내적 배제와 외적 포함을 통과하며 형성되는지를 밝혀낸 저작(Blum and Secor, 2011) 등을 제시할 수 있다. 이론에만 머무는 것을 넘어서 안전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 사이의 위상적 차이를 공간기억패턴으로 분석한 Blum and Secor(2014)의 결과, 주체가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실존적 안보(Ontological Security)를 확보하는지 Lacan의 이론을 통해 규명한 Kinnvall and Svensson(2023)의 연구 등도 구체적인 예시가 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견해의 확장은 Jung의 분석심리학 핵심인 개성화(Individuation) 과정에서의 위상이 지리학적으로 풀이될 수 있음을 알려주는 단초가 된다. 물론, 감정적, 정서적, 주관적인 영역(다시 말해, 무의식)을 다루기 위해 다소 불투명하고, 비선형적이며, 비이성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과학적 탐구에서 추구하는 통일성과 규칙성에서 벗어난다는 점에서 그 태생적 거부감(혹은 회의론)이 있을 수 있으나(Thomas, 2010), 특정 환경과 인간 사이의 부조화가 정신적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라는 사실에서 관계, 공간, (사회문화적) 배경 등 지리학에서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개념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다. 또한 정신분석지리학에서 널리 받아들인 Lacan의 공간 분열과 뒤틀림에 대한 위상과는 차별성이 있지만, Jung의 이론도 흐트러진 정신의 조각을 모아 하나로 통합해 입체적이고, 온전한 구(Sphere)를 형성하는 위상학적 개념을 갖는다. 여기에 더해 표현할 수 없는 것 혹은 완전히 표상될 수 없는 것이 사회-공간 및 주관적 영역을 둘러싼다는 아이디어, 물질성만큼이나 환상으로 구성된 존재론, 그리고 그 환상의 물질적인 실제로의 투영, 환상의 주관성과 세계관 형성 등은 그 위상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이는 오늘날 한층 더 확대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개인의 정신적 삶과 실천적 공간 사이의 역동성을 통해 신체, 정신, 환경, 사회적 관계 등과 같은 필연적인 공간적 상호작용 속에서 인간의 취약성을 설명하는 지리적 흐름(Pile, 1996; Kingsbury, 2004)과 긴밀히 연결되는 사실이다.

한편, 개성화는 한 인간이 타인과 구별되는 자기만의 고유한 존재가 되어가는 여정을 뜻하며, Jung은 이를 ‘(심리적) 전체성(Wholeness)’을 향한 본능적인 흐름으로 해석했다. 그가 제시한 개성화는 페르소나(Persona) 다루기→그림자(Shadow) 통합→아니마(Anima)・아니무스(Animus) 인식→자기(The Self)의 중심화의 위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이부영, 2001). 그 시작은 페르소나 다루기에서 출발한다. 이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만든 페르소나(사회 속에서 드러내는 외적 인격 또는 사회적 가면)를 뛰어넘는 과정을 의미한다. 주체는 사회 속에서 드러나는 외적 인격 혹은 사회적 가면에 고착된 나를 뛰어넘어, 공격성, 질투 등 스스로 인정하지 않은 성격 혹은 억압된 감정, 다시 말해 그림자를 인식하고, 통합하는 단계를 거친다. 이와 같은 내면의 확장은 남성 내면의 여성성인 아니마, 여성 내면의 남성성인 아니무스라는 이질적인 타자를 주체 안으로 포용하고, 그 균형을 조율하는 감정, 관계, 사고방식으로 이어진다. 궁극적으로 모든 과정은 자기로 수렴되며, 이는 의식과 무의식이 통합되어 외부 기준이 아니라 주체의 중심이 확립된 내적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이부영, 2001).

Jung의 무의식 구조와 개성화 단계는 <그림 1>과 같이 구의 위상학적 관계로 표현할 수 있다(<그림 1> 참조). 결국 개성화는 마치 마음의 지도를 찾아서 가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으며, 비록 이러한 위상은 개인에서 출발하지만, 공통성을 바탕으로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성을 띤다. 또한 단선적으로 완성되는 고정된 결정체는 아니며, 반복적이거나, 단계를 뛰어넘기도 하고, 아니면 중간의 포기도 발생한다. 이러한 흐름은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안과 밖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끊임없이 순환하며 동적 평형을 유지하는 나선형의 형태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개념을 과연 지리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 그 실마리는 정신분석지리학의 대표적인 학자인 Pile(1996)의 󰡔The Body and the City: Psychoanalysis, Space and Subjectivity󰡕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물론, Jung은 심리적인 위상의 구조를, Pile은 도시와 몸의 관계에 대한 동적인 위상 구조를 제안했다는 점에서 그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내부와 외부의 연결 관계가 흐려지고, 공간은 물리적이기보다는 심리적으로 형성되는 곳이라는 점에서 그 연결 가능성을 타진해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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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Jung의 무의식 구조 및 개성화 단계의 구 모형
출처: 이부영(2001).

구체적인 위상학적 전개 과정은 다음과 같이 정교하게 일치한다. 첫째, 도시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 설계 및 계획된 구역, 랜드마크, 질서정연해 보이는 외관을 페르소나로 볼 수 있다. 둘째, 도시 내의 후미진 골목, 주변화된 공간, 불편한 장소 경험 등 특정한 곳에서 ‘반복적으로 느껴지는’ 불쾌감 혹은 불안은 Jung의 약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어두운 내면(그림자 통합)의 일부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셋째, 남성 중심의 도시 공간에서 배제된, 여성 공간의 타자화(The Other)에 적용할 수 있다. 이는 내면의 반대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과정에 견줄 수 있는 것으로 도시의 중심-주변, 권력-배제, 자유-억압 등 주변화된 공간을 다시 의미화하는 과정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넷째, 궁극적으로 개성화 과정의 도착지는 진정한 자기에 대한 발견인데, 도시의 진정한 의미는 분리된 공간이 하나의 유기적이고, 의미 있는 전체로 통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내용과 통한다(<표 1> 참조).

표 1.

Jung의 개성화 과정의 Pile 이론 적용 및 단계적 특징

개성화 과정 Jung Pile 공통점과 차이점
페르소나
루기
∙ 생존을 위한 장(場)인 사회에서 선택한 가짜 나의 모습과 그에 대한 인정 ∙ 도시는 인간의 행동과 정신이 구성되는 곳이며, 특정한 설계 및 계획, 랜드마크, 질서정연함 등은 페르소나임 [공통점]
∙ 무의식을 구조화된 공간으로 판단하는 관점
∙ 배제된 영역에 대한 인식
∙ 언어 이전의 역동성과 정동에 대한 무게감
∙ 통합과 치유의 여정
=> 인간의 내면과 외부 세계는 분리된 것이 아님

[차이점]
∙ Jung은 직접적인 심리적 차원의 해석을 했지만, Pile은 도시라는 렌즈를 통해 마음에 대한 이해를 구성하였음
그림자
통합
∙ 억압된 욕망, 수치, 공격성, 두려움, 금지된 충동 등을 만나는 단계 ∙ 도시 내 후미진 골목, 주변화된 공간, 특정 장소에서 반복적으로 느껴지는 불쾌감 혹은 불안의 경험
아니마-
아니무스
인식
∙ 자기 안의 타자성, 억압된 반대 성향, 낯선 자기의 인식 ∙ 남성 중심적 도시 공간에서 배제된 여성 공간 등 ‘타자화된 영역’을 인식하고, 주변화된 공간을 재의미화하는 과정
자기의
중심화
∙ 자기 안의 중심을 세우는 과정 ∙ 공간에서의 주체성 형성 및 욕망, 기억, 몸, 타자 등의 경험을 통해 형성되는 유동적 주체의 모습

출처: 연구자 작성.

본 연구에서 Pile이 자신의 저서에 직접 인용한 Freud와 Lacan의 관점을 대신해 Jung의 견해를 적용한다는 것은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 Freud의 억압 및 Lacan의 소외처럼 궁극적으로 욕망으로 수렴되는 개념들이 한층 더 지리학적으로 해석하기에 의미 있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Pile, 1996). 특히, Lacan은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있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점은 Pile의 저서에서 그대로 드러나 도시를 구성하는 요소에 관한 서술을 기호학적인 차원에서 견지(Pile, 1996)하고 있어 Jung의 신비주의적 관점을 바탕으로 하는 상징성(자기실현 혹은 통합과 치유를 중심으로 하는)보다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견해를 뒷받침하는데 한층 더 용이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Jung의 견해와 정신분석지리학의 대표적인 학자인 Pile의 아이디어를 연결하는 작업은 억압된 공간 혹은 환경에서 온전한 자기를 찾아가는 지리학적 처방 또는 치유의 단서가 될 수 있다. 기존의 정신분석지리학적 접근이 겉으로 화려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거시적・이론적 담론에 치중한 나머지, 정작 개인적 수준의 실천적 치유의 대안으로서 그 역할이 한정적이었다. 이에 미시적 차원의 물질성, 정동, 체화된 경험 등이 어떻게 주체의 내면과 상호작용하면서 변형되는지 그 유연한 역동성을 마치 지도처럼 표현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연구는 영화라는 미디어를 통해 내면의 심리적 과정이 어떻게 외부 환경 및 공간적 위상과 결합하는지(다시 말해, 내면과 외면은 하나라는 정신분석학적 명제)를 실증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으로서 의의를 지닌다. 영화 속 주인공의 공간 이동과 장소 경험은 단순한 서사의 전개가 아니라, 심리적 개성화 과정이 공간적 위상으로 현현(顯現)된 결과물에 가깝다. 결론적으로 이는 고정된 실체가 아닌 공간과 주체가 맺는 끊임없는 관계적 에너지의 변화 속에서 온전한 주체성을 찾아가는 개인에 대한 추적을 종합화한 것이며, 여기에서 본 연구의 학술적 가치를 찾을 수 있다.

III. 지리학과 정신분석학에서의 영화분석과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에 대한 소개

지리학에서 영화를 포함한 매체에 대한 연구는 오락, 정보전달, 감시, 통합 등의 시각을 뛰어넘어 권력과 이데올로기로 구성된 공간(Dodds, 2008),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대한 지리적 상상력과 장소감 형성(Burgess and Gold(eds.), 1985), 미디어 관광과 공간 재구조화(Lukinbeal, 2004), 비판적 지리 문해력과의 연결성(Aitken and Dixon, 2006) 등 다각적인 방면으로 수행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재현 중심의 후기구조주의적 전통에서 벗어난 비재현적 접근은 “어떤 경험과 감각이 발생하는가(Anderson, 2009; Fowler, 2013)”에 중점을 둔다. 즉, 감각, 리듬, 움직임, 정동 등 인간적 인지 이전 혹은 그 저변에서 신체와 매체가 교류하는 떨림의 진행 과정을 무게감 있게 다룬다(장지애, 2025). 이는 Vannini(2014)가 언급한 것처럼, 단순한 ‘이야기(텍스트)’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매체 그 자체가 신체와 감각을 자극하는 ‘체험이자 실천(Practice)’의 현장임을 의미한다.

특히 본 연구에서 주목하는 매체인 영화는 스크린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 소리, 속도, 리듬이 관객의 신체와 부딪히는 정동적(Affective) 과정의 응축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는 존재하는 현실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감정, 공간, 관계를 실시간으로 창조하는 수행적(Performative) 실천이며, 거창한 메시지나 뚜렷한 인과관계를 강요하지 않은 채 일상의 리듬과 물질성(Materiality)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실체로서 생동감 넘치는 세계와의 활발한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Vannini, 2021; 2025). 예를 들어, Makarevic(2025)이 유고슬라비아 해체 이후 제작된 영화들을 비재현적 렌즈로 탐구한 결과에 의하면, 이러한 영화들이 전개하는 정동의 흐름은 과거와 현재의 역동적인 관계를 제시할 뿐만 아니라 정체성 형성, 기억, 죄책감, 책임감과 같은 복잡한 과정을 반영한다. 결과적으로 과거에 발목 잡힌 보스니아 사회를 치유하고, 유예된 미래를 앞당김으로써 전후(戰後) 상태를 종식하는 데 기여하는 촉매제로 기능하게 된다.

더 나아가 Deleuze(1925-1995)가 정립한 바와 같이, 고전 영화는 시간을 항상 행동이나 공간 이동의 부산물로 보았던 ‘운동-이미지(The Movement-Image)’ 도식을 중심으로 했지만, 오늘날의 그것은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공존할 뿐만 아니라 비선형적 시간 경험으로 해석하는 ‘시간-이미지(The Time-Image)’ 개념으로 전환되었다(이지영, 2025). 또한 그 안에서 묘사되는 세계는 동떨어진 가상적인 것, 혹은 파편화된 실체가 아니라, 그 자체가 곧 거대한 기억이며, 현실과 비현실, 현재와 과거가 갈라지지 않고 ‘하나의 세계(One-World)’ 안에서 뒤엉켜있다. 다시 말해, 시간-이미지는 인과관계에서 벗어나, 과거와 현재가 함께 공존함으로써 관객이 논리적 이해를 넘어서 시간의 흐름 자체를 체험(비재현적 경험)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대 영화는 고정된 실체의 집합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고, 느끼며, 정동이 교차하는 과정(Deleuze, 1985)을 담고 있으며,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도 표면적인 재현 방식 이면에 이와 같은 비선형적 시간과 정동의 역동성을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정신분석학은 영화를 관객(혹은 분석가)이 화면과 만날 때 일어나는 정서적 움직임과 무의식의 공명으로 바라본다(Enckell, 1982). 무엇보다 영화가 관객의 마음 안에서 스스로 형태를 갖추어 가도록 제한을 최소화할 때, 정신분석학적으로 유의미한 무의식적 힘이 자유롭게 작용하게 된다. 이때 꿈, 착오행위(Parapraxes), 신경증적 증상처럼 내적 혹은 무의식적 갈등이 표출되며, 관객의 현재와 과거(아동기)를 연결하고 이를 미래로 밀어내는 환상(Fantasy)의 메커니즘이 시각적으로 구현된다고 본다. 이러한 측면에서 Gabbard(ed.)(2001)는 영화적 장치가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한층 더 풍부하게 확장하고 이론의 타당성을 증명하는 상호 보완적인 여정임을 짚으며, 작품의 서사, 관객의 수용 방식(Spectatorship), 그리고 장르적 특성 등을 무의식, 방어기제, 대상관계 등의 정신분석학적 이론과 유기적으로 연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영화를 단순히 오락거리가 아니라 인간 무의식이 대중적으로 발현된 거대한 텍스트로 바라보는 시각은, “영화와 정신분석은 태생적으로 깊은 친화성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한 Gabbard(ed.)(2001)의 전언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비록 지리학의 비재현적 접근은 신체와 공간 외부의 정동적 흐름에 주목하고, 정신분석학은 내면의 심리, 무의식, 또는 욕망을 한층 더 깊이 있게 다룬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두 학문 영역 모두 인간의 숨겨진 동기, 갈등, 욕망, 감정처럼 언어 이전에 작동하는 경험적 장치나 보이지 않는 힘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다시 말해, 첫째, 비재현적 이론과 정신분석학은 언어로 포착되기 전의 대상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이성적 혹은 의식적 언어로 설명하기 힘든 이면을 다룬다. 둘째, 비재현적 방법과 정신분석학은 몰입과 신체적 경험을 중시하며, 이때 영화는 관객의 존재 전체가 영화라는 환경에 얽히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셋째, 이 둘은 공통으로 고정된 의미를 거부하고, 관객에게 수용되는 과정에서 의미가 매번 새롭게 생성된다(Gabbard(ed.), 2001).

한편, 본 연구에서는 영화의 대사 혹은 서사 이전의 빛, 소리, 프레임의 크기, 카메라의 움직임, 공간적 연출 등의 물질적 요소들을 통해 관객의 신체를 직접적으로 자극한다는 사실에 착안하였다(Bellagamba, 2023). 이에 따라 시퀀스 프로토콜(Sequence Protocol) 방식(혹은 구조분석)으로 영화분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시퀀스 프로토콜이란 영화를 하나의 사건이 완결되는 서사의 단위인 시퀀스 별로 정밀하게 분절하고, 각 시퀀스 내의 시각, 청각, 서사적 요소들을 표나 도표 형식으로 기록하여 자료화하는 분석 방식이다. 다시 말해, 시퀀스 프로토콜은 움직이는 시공간을 숏(Shot)과 시퀀스 단위로 구획하여 텍스트화(Coding)하는 방식인 것이다(Ryan and Lenos, 2020). 특히, 해당 연구는 지리학적 접근에 기반하여 어느 시점에서 공간 단위가 확장되거나 축소되는지, 그리고 그 공간의 변화가 인물의 심리적 변화와 어떻게 맞물리는지 시각적으로 한눈에 파악하기 위해 공간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이는 통상 하나의 시퀀스가 어느 정도 동질적인 시간과 공간의 범위 안에서 설화 도식을 이루는 특정 부분에 상응한다는 점에 바탕을 둔 것이다(홍상은・안정호, 2016).

이러한 관점을 종합적으로 고찰하여, 본 연구에서 다룰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관객과 인물의 신체를 직접 자극하는 내용(음악(소리), 빛, 색감 등)과 극 안에서 보이는 심리적 변화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영화에서, 주인공 Paul은 어린 시절의 충격적인 사건 이후 거의 말을 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살아간다. 그는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가졌음에도 빛을 보지 못하고, 이모의 집에서 자신의 감정과 기억을 완전히 닫아버렸다. 그러던 중 이웃에 사는 신비한 여성 마담 Proust를 만나게 되고, 그녀는 Paul에게 비재현적 촉매인 특정한 허브차와 음악을 제공(청각, 미각, 후각 등 감각의 자극)하며 그를 점차 기억 속 세계로 이끈다. 주인공은 차를 마시며 어린 시절의 감각적 기억을 하나씩 되살리고, 점점 자신의 과거, 특히 부모와 관련된 중요한 사건들을 마주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억눌려 있던 감정과 기억을 다시 경험하게 되면서 점차 변화한다. 억압되어 있던 무의식(후에 밝혀지는 부모에 대한 기억과 트라우마)이 감각을 통해 재탄생하고,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이를 재경험함으로써 분리되었던 자아를 통합해 나감에 따라 주체의 삶을 회복하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Marcel Proust가 쓴 장편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모티브로 하는데, 이 작품은 한 사람의 기억과 의식 흐름을 통해 시간, 기억, 예술, 사랑, 자아 등을 탐구하는 서사를 담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 책은 시대를 앞선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전통적인 사건 중심 서사라기보다 기억의 구조를 따라 전개된다는 점에서 그 독특성을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길해옥, 2013), 충분히 비재현적인 요소로 볼 수 있다. 더불어 주목할 점은 Paul이 차를 마실 때마다 마주하는 공간의 확장과 축소, 과거와 현재의 교차, 변화하는 관계적 환경 등의 위상적 변화는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무의식의 역동과 Jung의 개성화 과정이 지닌 지리적 공간과 치유의 서사(김귀원, 2023; 김영진, 2014)를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본 영화는 비재현적 정동과 정신분석학적 공간 분석을 시도하고자 하는 본 연구의 대상으로서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IV. 개성화 과정과 되어가는 지리적 환경

1. 신체화와 단절된 일상: 페르소나 단계

영화는 시작과 함께 주인공 Paul은 자신과 닮은 남성의 폭력적인 환영(후에 아버지로 밝혀지는)을 악몽을 통해 반복적으로 경험하며, 긴장과 무기력, 심지어 실어증과 같은 신체화 증상을 보인다. Massumi(2002)가 “감정 속에서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중략)...정서는 기본적으로 타인 및 다른 상황과 연결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듯, 인간의 신체는 능동적이고 잠재력 넘치는 에너지의 주체이자 비인간 물질들과의 역동적인 아상블라주(Assemblage)로 볼 수 있다(Andrews, 2018). 이러한 맥락에서 트라우마적 경험은 과거와 현재를 융합할 뿐만 아니라, 플래시백(Flashback)과 같은 현상을 통해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신체적 감각을 재활성화한다. 다시 말해, 시간과 장소를 신체 내에 재구성하는 것이다(Adams-Hutcheson, 2017). 이처럼 트라우마는 본질적으로 지리적 요소를 포함하며 형성된다. Gordon(2008)은 이를 ‘출몰 현상(Haunting)’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며, 트라우마가 단순한 과거의 잔재에 그치지 않고 현재 공간의 안전마저 위협하는 상태로 확장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Pain, 2020).

한편, 영화에서 묘사되는 Paul의 생활 반경은 표면적으로는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주인공이 체감하는 집과 댄스교습소 등의 일상 공간은 전혀 안전하지 못하다. 대표적으로 Andrews(2018)와 Duff(2016) 같은 학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정신적 질환으로 상처받은 신체에 가치 있는 경험을 제공하고 치유를 도모하는 공간으로 집 혹은 그와 유사한 장소가 기능할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환경은 아픈 이들에게 고립과 배제를 심화시키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극성인 이모들의 통제하에 잘 정돈된 아파트, 값비싼 전문가용 피아노가 놓인 거실, 그리고 활력 넘치는 타인들과 교류하는 댄스교습소에서 Paul은 역설적으로 영혼이 없는 단절된 모습을 보인다. 이 일상적 공간들은 Paul에게 치유의 장소가 아니라, 이모들이 규정한 ‘얌전하고 재능 있는 피아니스트’라는 외적으로 페르소나를 강제당하는 억압의 지리적 공간이다. 이 안에서 Paul의 유일한 해방구는 집 근처의 작은 공원뿐이지만, 그곳에서조차 그는 적극적인 행위를 하지 못한다. 이는 Sheehan(1985)의 논의처럼, 장소와 신체의 상호작용이 우울한 내면의 자기고립감 형태가 된 것이다.

Jung의 이론에서 트라우마나 그로 인한 우울증을 페르소나 단계와 직접 결합하여 설명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그는 󰡔The Structure and Dynamics of the Psyche󰡕에서 의식이 삶의 방향을 잃거나 본연의 자기와 멀어질 때, 무의식이 상보적(Complementary) 반작용으로 우울을 만들어내어 주의를 내면으로 돌리게 만든다고 설명한다(Jung, 1970). 이 관점에서 볼 때, Paul이 일상 공간에서 보여주는 무기력과 친밀감의 부재는 이모들이 강요한 페르소나 공간과 본연의 자아 사이의 극심한 괴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다시 말해, Paul의 신체화와 공간적 고립은 무의식이 거짓된 페르소나의 공간을 거부하고, 진정한 자기를 찾기 위해 내면으로 향하고자 하는 상보적 신호를 보내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리적 요소이자, 향후 전개될 그림자 수용 단계와 연결된다.

Jung의 상보적 반작용이 신체와 시공간을 통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보여주는 지리학적 증거로서 Anderson(2004)의 연구는 Paul이 보여주는 정지된 것 같고, 속도가 떨어진 것 같은 시공간의 지루함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잘 설명한다. 지루함은 반응을 무디게 하는 환경에서 신체의 에너지 수준이 저하되어 반응이 무뎌질 때, 환경과 신체가 맺는 일종의 정동적 관계의 결과물이다. 특히, 현대 사회는 속도, 자극, 생산성, 소비 등을 요구하기 때문에, 지루함은 현대 사회의 과도한 자극 혹은 강박적인 동기부여에 의해 신체가 일시적으로 저항하거나, 탈진했음을 보여주는 표징이다(Anderson, 2004). 인간은 이처럼 시공간이 멈춘 듯한 갑갑함을 벗어나기 위해 역설적으로 새로운 행동, 상상력, 또는 다른 감각의 시작을 위한 계기를 갈망 및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모들은 정작 스스로는 모르는 Paul의 진짜 자아와 거리가 먼 페르소나를 강요하여 친밀감이 부재된 환경을 만들지만, 이는 단순한 심리적 상태나 추상적인 감정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와 친밀함을 느낀다는 것은 몸을 가진 자아로서 시공간을 공유하고, 상호 반응하는 신체적 지각을 동반하는 사건이다. 몸과 몸이 즉각적인 현존과 얼굴을 맞댄 소통은 소속감을 강화하는 핵심적인 실천이며, 친밀성은 긍정적인 감정 외에도 슬픔, 애도, 심지어 트라우마 같은 복잡한 감정까지도 신체적 기억과 감각을 통해 이어지는 과정인 것이다(Maclaren, 2014). 그렇지만 Dennis and Warin(2010)에서 이민자들이 처한 친밀감의 역설적 상황처럼, Paul에게 있어서 이모들의 과잉보호와 일상적인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행해지는 강요된 친밀감이라는 권력은 역으로 주인공의 트라우마를 반복적으로 자극하고, 생활 속의 무기력함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어쩌면 Paul의 이모들에 대한 거리를 두거나 대화를 단절하는 행위 등은, 후에 드러나는 부모의 죽음에 대한 은폐가 그녀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거부하거나 불편해하는 무의식적 표현이라 할 수 있으며, 페르소나 단계에 갇혀 있던 Paul이 마담 Proust의 정원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필연적인 전조 증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2. 신체적 감각을 통한 상상의 조우

깊은 물 속의 물고기처럼 어딘가 숨어있는 Paul의 기억을 찾아주겠다는 마담 Proust는 언어 대신 무의식의 억압된 요소인 그림자의 대면을 시작하게 해준다. 시각적으로 이모들의 집과 대비되는 강렬한 마치 작은 정원과 같은 구체적인 물질 공간 안에서, 청각을 자극하는 Paul의 모빌 음악과, 미각과 촉각을 깨우는 차와 마들렌을 통해 닫혀 있던 모든 감각을 크게 흔든다. 의식의 통제를 느슨하게 하여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이미지, 환상, 감정 등에 집중해 주체적으로 대화(상호작용)하는 Jung의 ‘적극적 상상(Active Imagination)’이 영화에서 수행되며(Fleischer, 2023),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잠재적 기억을 시각적 이미지, 상징, 신체의 움직임 등을 통해 의식의 표면으로 끌어올려 시각화한다. 정신의학 측면에서도 환자의 머릿속에 빛으로 가득한 방 혹은 평화로운 숲길과 같은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건설하는 일은 정신적 도피처(Mental Sanctuaries)를 만들기 위한 환상이 아니다. 오히려 환자의 스트레스 호르몬을 낮추고, 심리적 안정감을 유도해 면역 반응 혹은 통증 관리에 있어서의 실천적인 지리적 역동성이다(Andrews, 2004).

Andrews(2004)가 밝힌 것처럼, 치유의 과정은 반드시 특정한 물리적 장소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 및 회상하는 것(Imagined Places)으로도 정서적 안정과 치유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실제로 심상훈련, 자율훈련, 이완기법, 명상과 같은 관련 심리적 치료 기법(William, 1998)은 진정한 삶은 상상력, 감각, 그리고 기억 등 인간이 가진 모든 능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자신만의 우주를 발견할 수 있는 상태, 즉 몸과 마음을 연결하는 작업이 원활하게 할 수 있을 때 그 역할이 온전해지는 것이다(Jackson, 1989). 결국, 인간은 몸에 속해 있는 물리적 공간뿐만 아니라, 마음과 기억이 머무는 상상의 공간에서도 동시에 살아가는 존재라 할 수 있으며, 진정한 돌봄과 치료는 환자의 이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와 물리적 신체가 맺는 역동적인 관계를 수용하고 지지해 줄 때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Paul의 그림자는 아버지의 폭력(후에 잘못된 기억으로 밝혀지는)이었다. 억압되어 있던 개인의 트라우마와 분노는 이 그림자라는 구체적인 환상과 만났을 때, 비로소 행동(예: 사진에서 아버지 모습 삭제 등)을 통해 공간 밖으로 폭발하듯 해방된다. 이러한 물질성의 물리적 훼손은 견고해 보이는 Paul의 일상에 강력한 균열을 내는 행위인 동시에, 분노를 통해 훼손된 그 자리는 더 이상 누군가의 지배가 아닌 Paul의 주체적인 감정이 가득한 새로운 기억의 공간, 다시 말해 신체와 사물이 새로운 정동적 관계를 맺는 대안적 경관으로 재탄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Kosatica, 2023). 이모들이 구축한 집과 댄스교습소의 공간은 순응과 엘리트 교육만이 허락된 비관용적인 곳이었으나, Paul의 내면에 쌓인 부모를 잃은 상실감과 분노는 그 공간 안에서 표출되지 못한 채 구조적인 모순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유배된 분노(Exiles of Anger)’를 형성했다. 그렇지만 Paul의 분노를 개인의 정서 조절 실패 혹은 치료받아야 할 대상으로 환원하지 않은 마담 Proust는, 대면하기 어려운 감정을 안전하게 바라보고, 표출할 수 있도록 감정에 대해 관심을 두고 분노를 억제하거나, 제거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그저 면밀하게 관찰해 주는 대상으로서의 존재이다(Eslen-Ziya et al., 2019).

이처럼 돌봄과 치유는 멀리서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위치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연구자든, 혹은 치료사든 대상에게 기꺼이 다가가 그들의 감정적 역동 속에 함께 머무는 위험과 책임을 감수할 때, 비로소 깊은 상호작용과 치유의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특히, 트라우마, 분노, 슬픔 같은 가공되지 않은 부정적 감정을 가지고 있는 대상을 통제하거나 교정하려 하지 않고, 존재 자체로 인정하고 품어주는 행위는 매우 중요하다. 마담 Proust처럼 가까이함과 수용을 통해 재탄생한 마음의 자리는 주체적인 감정과 대안적 경관이 실현되는 ‘희망의 공간(Hopeful Ontologies)’이 된다(Whitehead, 2014). 비록 마담 Proust가 이모들의 배척에 의해 공간을 떠났지만, Paul은 정원에서 얻은 경험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는 주체적 노력을 이어간다. 끝내 아버지의 어머니에 대한 폭력이 그들의 생계적 수단이었던 레슬링 연습이었다는 사실로 밝혀지는 과정은, 그림자는 외면하고, 무시할 존재가 아니라, 수용하고 받아들임의 과정임을 언급한 Jung의 이론과 맥을 같이 한다. 이는 곧 언어화되지 못한 정서적 에너지(감응)가 한계점에 도달해 신체 밖으로 터져 나온 물질적 증거인 눈물로 승화된 솔직하고, 물질적인 실천으로 볼 수 있다(Watkins, 2011).

그렇지만 이는 주인공이 부모의 행복을 확인한 일종의 안도감을 뛰어넘는 것으로, 지배 구조(이모들)의 통제하에 평화롭고, 이성적인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희생된 삼촌 혹은 폴처럼, 누군가가 흘려야 했던 고통의 눈물이자 분노를 억압해 온 모순과 폭력성의 틈새 사이에 묻혀있는 진실이 가시화하는 매개체로서의 눈물이기도 한다(Schönfeldt-Aultman and Mendieta, 2024). 부모의 죽음이 결국 자신이 추구하던 미래이자 이모들의 강요된 세계였던 피아노로 인한 것이었고, 그 피아노가 부모를 덮쳐 앗아갔다는 잔인한 진실을 대면하는 순간, Paul의 눈물은 비로소 이모들이 짜놓은 견고한 순응의 직물을 완전히 찢고 상실의 매개체인 피아노 뚜껑을 닫아버리는(이로 인해 손가락이 다쳐 피아노를 그만두는) 행위는 이모들의 완벽한 이성적 세계에 돌이킬 수 없는 파열구를 내는 실천적 저항의 수행이다. 이처럼 신체적 감각의 흔듦을 통해 무의식의 그림자를 대면하고, 눈물로 진실을 가시화한 Paul의 여정은 치유가 단순히 과거의 고통을 망각하거나 위로받는 것에 그치지 않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억압적인 공간의 직물을 주체적으로 찢고, 타인의 억압에서 벗어나서, 자신만의 대안적이고 희망적인 존재론을 스스로 구축해 나가는 공간적 역동성의 실현이며, 마담 Proust가 남긴 “수도꼭지를 트는 건 네 몫이란다”라는 마지막 메시지와 같이 스스로가 삶의 중심이 되는 주체적 경로를 개척해 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3. 내면 경계의 붕괴

Paul에게 그리움의 대상이자, 원형인 어머니는 감각의 체화에 있어 중심이 되는 인물이다. Jung이 말한 것처럼, 아니마・아니무스는 개인적인 무의식 및 원형적 요소를 포괄하며, 주체는 자기의 무의식(보통 남성은 여성적 성질, 반대로 여성은 남성적 그것)을 타인에게 투사하게 된다(이부영, 2001). Paul 또한 대립하는 내면의 모습(아니마)을 누군가에게 찾으며, 그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내부와 외부라는 공간적 경계가 허물어지는 경험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이 부정적으로 발현되면, 보통 남자는 우울증과 비참함에 자주 휩싸이면서 심리적으로 위축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아 마치 Jung이 “여성이 앙탈을 부리는 것 같다”라고 묘사한 상태가 된다(정희주, 2024). 우울증, 실어증, 자신감의 상실, 고독, 거리감 등의 모습을 보이는 주인공의 모습은 그를 둘러싼 시공간적 환경과 관련성을 지닌다. 이처럼 의학이나 정신의학에서 정신질환의 원인을 개인의 생물학적 차원에서 찾으려고 하는 노력을 뛰어넘어, 지리적인 장소의 부적합성 혹은 트라우마, 억압, 과도한 자극 등을 유발해 오히려 개인을 ‘짓누르는(Getting To)’ 곳이 된다(Twigg and Duncan, 2018).

신체는 장소 안에 존재하지만, 동시에 장소의 성격 역시 그곳을 채우는 신체들의 행위와 정서에 의해 지속적으로 재구성된다(Philo, 2016). 다시 말해, 주체적인 자아상이 결여된 채 세상과 단절된 Paul은 제대로 관계를 맺지 못하는 불편함과 소외의 상태에 머무른다. 그러나 무의식에 머물던 부모님의 진실이 봉인된 부모님에 대한 새로운 기억(아버지가 어머니를 폭행한 것 대신, 어머니를 사랑했다는 것, 그리고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회복하면서 그동안 내면에서 찾지 못했던 아니마를 회복한다. 아버지를 오려낸 사진을 다시 봉합할 정도로 자신감을 회복한 Paul은 이전과 달리 적극적으로 피아노 대회에 나가 최고 연주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단순한 페르소나를 억압받던 말 잘 듣는 피아니스트의 모습을 뒤로 하고, 무대에서 피아노라는 물질성과 공명하여 연주의 신체적 수행 자체를 즐기는 진정한 피아니스트의 모습으로 승화하게 된다. Yarker(2019)의 연구에서와 같이, 자신감을 회복한 주체는 비로소 주변 환경 혹은 삶의 장소에서 타인 혹은 세계와 자연스럽고, 역동적이며, 진정한 정동적 연결감과 편안함을 형성하게 되며, 이는 고정된 내면의 자기확신이 아니라, 신체가 세계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고 마주칠 때 완성되는 성취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인데, 이러한 모습을 아니마의 회복과 연결해 보여준다.

이처럼 긍정적인 경험은 건강 증진에 기여하게 되며, 그것이 일어나는 장소는 물리적, 사회적, 상징적 차원이 상호작용하여 개인의 치유를 가져온다. 새로운 주체적 역량을 구축한 신체는 자신에 대한 인식에 직면, 협상,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며, 또한 주변 환경에 대한 인식을 바꿔 기존의 자신에 대한 규범에 도전할 수 있는 힘을 갖추게 한다(Duff, 2011). 특정한 장소의 ‘재건(Instoration)’은 신체와 환경 간의 정동적 흐름을 재정렬하여 고갈된 잠재력과 역량을 확장하여 이를 안도감과 회복력으로 전환하는 것을 뜻하며, 특징지어진 환경적 요소보다는 이용가능성, 접근성, 참여기회에 따라 달라지는 관계적 성과와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Pearce et al., 2026). 이 영화에서 Paul의 행동이 한층 더 의미 있는 전개는 아니마와의 성공적 통합 후에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 내면의 진실을 찾아가는 모습이다. 이모들에게 강요받았던 꿈인 피아노가 바로 부모님의 죽음에 직접적인 영향이라는 트라우마적 환상에 대면하고,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억눌렀던 피아노라는 아상블라주와의 완전한 결별을 미련 없이 선언하는 장면이다. 이는 Paul의 온전한 주체로서의 선택일 뿐만 아니라, 기존의 억압에서 벗어나 어머니가 바랐던 “그저 아이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자라는 것”에 대한 의지의 실현이 된다.

아니마와 같이 내적으로 타자화된 사람들과 그것에 대한 인식론은 사실 지리학이라는 학문 분야 내에서 여전히 주변화, 배제, 말살(혹은 묵살) 등의 행태로 남아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경향성이 있다(Sibley, 1995; Pile, 1996; Oswin, 2020). 그렇지만 Pile(1996)이 언급한 바와 같이, 타자성은 그저 외부에서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개인의 주체 내부에 이미 형성되어 다만 공간으로 투영되는 것으로서 이는 대면하고, 저항하며, 통합해야 비로소 주체성이 꽃피울 수 있는 것이다. Paul의 내면이 아니마를 수용하고, 진실을 포용해 자신을 눌러 온 공간적 경계와 억압의 상징을 해체하는 일련의 과정은 내면의 타자와의 성공적인 결합이 어떻게 주체가 스스로 해방을 통해 신체와 공간을 재의미화하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학술적으로도 Sibley(1995), Simpson(2015), Oswin(2020) 등은 같은 맥락에서 타자는 주체가 배제하거나 외면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기존의 억압적 경계를 해체하고 주체성을 재구성하기 위해 내면화하고 중심에 놓아야 할 포용의 대상으로 보았다. Paul이 내면의 아니마와 어머니의 진실이라는 타자성을 거부하지 않고 삶의 중심으로 가져온 행위는, 자신을 둘러싼 공간적 억압을 극복하고 진정한 주체로 나아가는 이행 과정이라 할 수 있다.

4. 되기로서의 자기실현

개성화의 마지막에 닿은 Paul은 이전의 자신과 다른 모습이다. 무기력한 환경 속에서도 진정한 자아를 찾는 정동이야말로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꿈꾸게 하는 희망의 원천을 상정하게 된다(Georgis, 2020). 일상적인 공간에 머물던 Paul은 Proust 부인의 묘를 찾아가 마지막 인사를 한다. 그리고 Paul은 이모들의 억압적 페르소나였던 거대한 피아노를 떠나, 자기 신체와 유기적으로 대화하는 우쿨렐레를 선택한다. 더 이상 외부적 요소는 Paul을 억누르는 억압적 기제가 될 수 없으며, 주체의 세계와 공명하는 신체는 외부와 내부가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뤄 Jung의 자기실현 단계가 전체성을 획득한다.

이처럼 정서적 교감은 자아와 장소 사이의 의미 형성 과정의 기초를 이룬다(Bondi, 2005). 특정 장소에서 유발되는 정동은 환경적 및 관련 자극에 대한 의식 이전의 반응이며, 신체적 마주침으로 작용한다. 정동은 우리가 장소에 존재한다는 느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특히, 낯설고, 기괴하며, 때로는 두려운 환경에 놓일 때, 개인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무의식적 자아나 삶의 패턴은 흔들어, 자신의 취약점, 숨겨진 욕망, 내면의 적응력을 발견하게 만드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Paul의 변화된 환경, 낯선 것이 된 일상적인 장소와 감정적 얽힘(Entanglement)을 나누는 과정은 단순함에 그치지 않고, 자아와 장소가 상호 변형되고, 끊임없이 ‘되어가는’ 역동적인 과정에 무게를 둔 것이다(Boğaç, 2020).

또한 개성화 과정은 개인의 완성으로 끝나지 않는다. Paul은 관계를 확장하는 것을 통해 자신을 증명한다. 특히, 처음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여성 미셸과 결혼을 하고, 새로운 생명을 맞이하는 결말은 관계적 환경의 근본적인 재편을 말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악몽에서 보았던 하와이의 한 봉우리에서 아버지와 다르게 자신의 자녀(딸)에게 따뜻하고, 다정한 기억을 남기는 장면(“아빠(PaPa)”라고 말하는)은 비극적 내면에 갇혀 있던 Paul이 스스로 치유의 과정을 완수한 주권자가 되었음을 증명한다. 이러한 서사적 관점에서 볼 때, 삶의 흐름이 깨지는 것 같은 슬픔 경험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써 내려가야 하고, 이러한 자아의 재서사화는 일상적인 장소 속에서 신체적 수행과 실천이 새롭게 재구성될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달성할 수 있다(Willis, 2009). 결국 이러한 자기실현은 과거의 상처를 완전히 새롭게 하는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새로 써 내려가는 역동적인 생성의 과정이다.

무엇보다 풍요로움, 잠재력, 창의성은 단순히 그 순간 자체(현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유산이 현재로 계승되는 과정에서, 특히 현재의 신체적 감각을 통해 끊임없이 재조립되고 변형되는 상상력, 창의성, 그리고 (생산적인) 정서적 교류의 토대가 되는 기억을 매개로 발현되는데(Jones, 2011), 이러한 과정은 세대로 이어진 자신의 왜곡된 기억을 체화된 실천을 통해 세대 간의 악순환을 과감히 단절하고, 매 순간 새롭게 형성되어가는 Paul의 모습이다. 특히, 가정은 과거의 경험, 가족과의 추억, 감각적 기억(냄새, 소리, 풍경 등)이 축적되어 형성되며, 그렇기 때문에 고정된 장소로서의 의미를 뛰어넘어 삶의 궤적과 이동에 따라 정체성이 끊임없이 재조정되고, 변형되는 가변적인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가정을 형성한다는 것은 물리적인 공간을 구축하는 행위보다 더 큰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현재의 나 혹은 후세대의 정체성을 세워가는 흐르는 과정으로 볼 수 있는데(Ratnam, 2018), 이 영화의 마지막은 이를 보여주며 희망적인 메시지로 결말짓는 것이라 할 수 있다.

V. 요약 및 결론

본 연구는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을 대상으로 Jung의 개성화 과정을 적용하여, 한 개인이 어떻게 치유와 성숙을 이루어가는지를 정신분석지리학적 관점에서 고찰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영화 속 주인공 Paul은 원인을 모른 채, 긴장과 지루함 속에서 살아간다. 우연히 만난 마담 Proust는 그에게 내면을 돌아볼 기회를 주고, 그 과정에서 어렴풋하게 숨어있던 그림자를 마주하고, 어머니로 상징되는 여성성(아니마)을 포용함으로써 마침내 진정한 자신에 이르게 된다. 이는 Jung의 개성화 과정3)과 부합할 뿐만 아니라, 정동, 물질성, 수행 등의 비재현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어 지리학적 탐구 대상으로도 의미를 갖는다(<표 2> 참조). 그렇다면, 개성화의 각 단계에서 발견되는 비재현적 요소를 지리학적 관점에서 복원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표 2.

영화 속 개성화 과정에 따른 비재현적 요소

개성화 과정 정동 물질성 수행 지리적 연결성 주요 장면
페르소나
다루기
∙ 트라우마와 긴장
∙ 무기력함
∙ 지루함
∙ 과잉보호와 통제의 아파트
∙ 고급 전문가용 피아노
∙ 통제된 댄스교습소
∙ 실어증, 악몽 등의 신체화 증상
∙ 거리두기, 대화 단절
∙ 규칙에 대한 영혼 없는 순응
∙ 강요된 친밀감의 환경
∙ 억압과 그에 대한 무의식적 저항의 공간
∙ 이모들과의 생활
∙ 댄스교습소에서 무의미한 반주자로 활동
∙ 공원에서의 지루한 일상
그림자
통합
∙ 닫혀 있던 오감의 자극
∙ 분노와 상실감
∙ 안전하게 받아들여짐에 따른 온기
∙ 마담 Proust의 정원 차, 마들렌, 모빌
∙ 훼손된 아버지 사진
∙ 차와 모빌을 통한 감각 재활성화
∙ 사진 속 아버지의 모습을 잘라냄
∙ 진실을 마주한 눈물
∙ 적극적 상상
∙ 정신적 도피처
∙ 희망의 공간
∙ 마담 Proust와의의 치유
∙ 아버지의 폭력과 마주한 상상
아니마-
아니무스
인식
∙ 피아노와 신체의 공명
∙ 타자성(어머니로 상징되는 여성성)의 포용
∙ 통제의 거부
∙ 피아노라는 강요된 아상블라주
∙ 봉합된 사진
∙ 피아노 뚜껑
∙ 연주를 즐기는 신체적 수행
∙ 손가락 부상을 알지만, 피아노를 닫아버리는 거부
∙ 부모 사진의 복원
∙ 내면의 타자성과 통합하고 억압적인 아상블라주와의 결별을 통한 장소의 재건 ∙ 피아노 대회
∙ 부모님 죽음의 진실과 (상상에서의) 대면
∙ 피아노에 대한 거부
자기의
중심화
∙ 과거 상처에서부터 벗어난 평온함
∙ 세대 간 악순환을 끊어버린 희망
∙ 묘비
∙ 우쿨렐레
∙ 하와이의 봉우리와 새로운 가정
∙ 피아노 대신 우쿨렐레와의 대화(연주)
∙ 딸에게 다정하게 말하기
∙ 삶의 장소를 능동적으로 바꿈
∙ 되어가기의 삶
∙ 자신만의 집(가정)의 구축
∙ 마담 Proust 묘소 방문
∙ 주변 사람들과의 융화
∙ 결혼과 가족(하와이 여행 포함)

출처: 연구자 작성.

오늘날 정신분석을 탐구하는 거시적 경향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반영한 자기실현(Self-actualisation)으로 통합되고 있다(Mullan, 2014). 여기에서 말하는 자기실현은 의학의 진보에서 파생된 것으로,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사회문화적 환경 안에서 한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전인적(Holistic) 치료 혹은 치유를 의미한다(Hartley, 2004). 이러한 점에서 관련된 행위가 일어나는 지리적 측면, 특히 마음 혹은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공간에 대한 고찰은 마땅히 다뤄야 할 주제가 된다. 이는 정신의학 및 심리학과 연계하여 정서의 구성, 출현, 촉진, 방해 등의 요소를 폭넓게 이해해야 하는 때이며, 어떤 것이 심리 혹은 정서적인 면을 소진시키는지, 어렵게 만드는지 혹은 긍정적인 활력을 주는지 등에 대해 ‘마음의 공간’을 중심으로 탐구해야 한다는 Pile(2010)의 주장의 실천인 것이다(Kingsbury, 2010).

구체적으로 현대 정신 혹은 심리치료에서 활용되는 미충족 또는 미해결된 자아와 만나는 게슈탈트 치료의 빈 의자 요법과 같은 내면아이치유, 트라우마 치유를 위한 신체심리적 접근법인 SE(Somatic Experiencing), 내면의 다양한 인격을 진짜 자아가 끌어가는 방식인 IFS(Internal Family Systems) 등은 모두 상처받은 당시의 신체적 느낌, 정서적 강도, 행동적 패턴, 무의식적 역동 등의 시공간적 아상블라주로 회귀하여, 멈춰있던 비재현적 요소를 다시 흐르게 함으로써 내적 성장을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비재현적 요소를 따라가며 지리적으로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을 바라보는 것은, 정신질환(혹은 병리)을 단순한 교정 대상이 아닌 호기심을 가지고 직면해야 할 것으로 재평가하는 작업이다. 나아가 이는 비언어적이면서도 관계적 경험이 결합할 때 비로소 진정한 치유와 인격적 변형(Willemsen, 2024)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실현적 체험이 된다.

특히, 이러한 치료 요법은 심리적 외상이나 발달 초기의 상처가 언어, 상징, 이미지로 전환되지 못한 채 신체적 감각이나 혼란으로 남아 있는 경우에 효율적이다. 환자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비표상적인) 고통과 신체 증상을 먼저 이해하고, 이후 이를 말과 기호(표상)로 전환해 나가는 과정이 치료의 핵심이라는 점(Oliner, 2013)을 본 연구는 영화 속 장면을 통해 조명하고자 한다. 나아가 이는 장소를 단순히 물리적 좌표가 아닌, ‘사람들이 느끼고 의미를 부여하는 정서적 마당’으로 바라보는 관점(MacKian, 2004)을 제공한다. 특정한 장소에 대한 기억과 감각(자극)은 개개인에게 매우 강렬하고 비언어적인 정서적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지도나 텍스트처럼 고정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몸과 장소가 만나는 순간 정동, 물질성, 수행이라는 비재현적 요소와 감각을 통해 끊임없이 새롭게 재생산되는 것이다(Jones, 2011)

‘몸・마음’과 ‘환경’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청각, 촉각, 후각 등 감각의 역동적 흐름은 온몸으로 흡수되는 순간,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과거의 기억, 무의식적 갈등, 정서적 상태와 결합하면서 하나의 생생한 경험으로 승화된다(Bingley, 2003).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형성된 자아, 특히 치유에 있어 능동적으로 주관성을 회복해 가는 자아는 치료적 환경에 있어 가장 우선시되는 대상이자 근본적 가치가 된다. 이러한 점에서 본 연구와 같은 인문지리학적 관점은 웰빙과 질병에 대한 사회적인 이해를 넓히는 데 기여할 뿐만 아니라, 건강을 달성하고 유지하는 데 있어 인간의 행위 주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더욱 깊이 규명한다는 데 공헌한다(Williams, 1998). 결론적으로 마음(감정 및 심리)과 실질적인 사회적 맥락(환경) 사이의 무의식적이며, 반사적인 움직임을 바탕으로 지리학적 개념을 재정립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며, 바로 이 지점에서 본 논문이 지니는 차별화된 학술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Acknowledgements

본 연구는 2026학년도 상명대학교 교내연구비를 지원받아 수행하였음. (2026-A000-0051)

본 연구의 문법 교정과 그림 작성 과정에서 Gemini를 보조적으로 활용하였음을 밝힌다.

註

[3] 1) Callard(2003)는 문화 혹은 사회지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지리학에서 유용하다고 판단되는 정신분석학 일부만을 받아들이고, 이론 그 자체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축소하던 행위를 비판하면서 정신분석학을 “길들여왔다(tame)”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또한 그녀는 불편한 진실을 지리학자들이 외면할 것이 아니라, 이론 그 자체를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4] 2) 이는 집단 무의식의 내용물로 인류 보편적인 심리적 경험이 구조화된 무의식적 형상을 뜻한다.

[5] 3) 이 영화에서 Jung의 개성화 과정은 영화적 상상력에 의해 극적으로 표현되었음을 인지해야 한다.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개성화는 뚜렷한 단계를 구분 지어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본문에서 밝힌 것처럼 나선형의 궤적을 그리며 무한히 반복되는 과정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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